6.25 참전 상이용사의 ‘ 인간승리사’
실향민 시련극복, 4통8달 억척추진력

▲ 이용만(李龍萬) 전 재무부 장관의 인생 이야기 ‘ 이 용만 평전’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6.25 참전 용사에다 실향민으로 온갖 시련을 극복해온 이용만(李龍萬) 전 재무부 장관의 인생 이야기가 무려 830페이지의 ‘이용만 평전’으로 나왔다. 올해 여든넷의 이 전 장관은 아직껏 6.25 때 총탄 파편을 몸에 간직하고 있는 상이용사로서 화제도 풍부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남덕우 재무장관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경제개발사에 헌신한 발자취를 남겼다.

4통8달식 특별한 자질과 강점 15가지

이 전 장관이 공직에 입문한 것은 5.16 직후 내각수반 기획통제관실로부터 출발했지만 곧 재경직으로 전환하여 재부무로 옮겨 경제관료로서 꽃을 피웠다. 이 시절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은 정부주도식, 관치금융시대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재 2과장, 이재국장 시절 그는 특유의 소통력과 친화력으로 논란을 극복하며 내자동원이나 금리와의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이용만 평전’을 집필한 공병호 박사는 이 책 속에 ‘이용만의 특별한 자질과 강점 15가지’를 골라냈다. 공 박사는 이 전 정관의 고대 후배로서 특별히 장점과 강점을 찾아냈을는지 모른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이 전 장관을 ‘마당발’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저자가 다각적인 인터뷰 등을 통해 특별한 자질과 강점을 잘 요약 정리했다고 동의하게 된다.
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지구력 ② 낙관적이고도 긍정적인 생각 ③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 ④ 타인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 ⑤ 목표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 선택의 융통성 ⑥ 분쟁과 대결구도에 뛰어들 수 있는 과감성 ⑦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과 동기부여 ⑧ 넉넉함과 베풂의 일상화 ⑨ 탁월한 친화성과 사회성 ⑩ 한시적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자제력 ⑪ 핵심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능력 ⑫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 ⑬ 털털함과 치밀함의 절묘한 조화 ⑭ 강력한 책임감과 정면 돌파력 ⑮ 확고한 국가관과 애국심 등.
이 책 속에 이용만 전 장관의 거대한 ‘인간조직’이 나온다. 정·관계와 금융계 인사는 기본이지만 언론계와 친구·지인 편에 보면 그야말로 4통8달의 그의 얼굴이 보인다. 특히 이 전 장관이 ‘감사를 전하고 싶은 분들’이라고 지명한 인사도 실명으로 수백 명을 헤아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 같은 그의 삶과 생활방식으로 축적된 ‘인간조직’이 고위공직자로서 크게 성공하여 전문작가로 하여금 800쪽이 넘는 방대한 평전을 집필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일성세상 놀라 이승만을 이용만으로 개명

이용만 전 장관은 1933년 8월, 강원도 평강(平康)군의 자수성가 부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8.15 해방을 맞고 보니 갑자기 김일성의 세상이 되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토지개혁으로 천지개벽 소리가 났다.
또 ‘이승만과 김구 타도’, ‘스탈린 대원수 만세’ 소리가 들리자 부친이 이승만(李承萬) 본명을 이용만(李龍萬)으로 서둘러 개명했다.
평강초등을 졸업하고 평강고급중학에 입학했을 때는 마을인민위원회에 가담한 조카가 “큰아버지 동무 자아비판 하시오”라고 겁박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이용만은 평강고급중학에서 최우등생 성적을 올렸지만 평양 전국최우수생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지주집 자식이라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지목한 모양이다.
그의 부친이 위기감을 감지했던지 평강에서 김화로 이사하여 이용만이 김화고급중학으로 전학했다가 6.25를 만났다. 이용만은 인민군 징집을 피해 형님이 수의사로 근무하는 세포면 추가령 목장으로 피신했다. 몇 달 뒤에 귀가하자 부친이 한약방에 부탁하여 설사약 처방을 받아 마치 환자처럼 병약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징집을 피해 벼 베기 노력동원 등에 참여하고 있다가 국군이 곧 입성한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실제로 얼마 뒤 국군 6사단이 김화를 탈환하여 치안대와 학도대를 조직할 때 이용만도 참가했다. 그러나 학도대가 공비토벌에 출동했다가 김화경찰서로 복귀할 때 인민군 패잔병이 읍내를 장악하여 기관총 사격전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가족과도 이별하고 포천여중 교사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 학도대장을 맡아 열심히 군사훈련을 받았다.

춘천 가리산 전투서 부상, 명예제대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할 무렵 청량리로 이동하여 제2 국민병 모집에 지원했다가 대구 육군훈련소에서 정식 군번(0180826)을 받았다. 잠시 보충대 대기 중에 중학생 이상 학력자는 손을 들라고 해서 미군 2사단 38연대 록 레이저(Rock Range) 중대로 배치됐다.
록 레이저 중대는 수색대로서 중공군의 5월 공세에 대비하여 홍천군으로 이동, 춘천 가리산(해발 1051m) 중턱에 잠복 배치됐다가 적 수색대와 교전이 빚어졌다. 이 전투에 지원사격 나섰다가 중상을 입었다. 이때 소대장 김창조(金昌祚) 중위가 급히 달려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 김 중위는 나중에 중령으로 전역하여 한국주택은행 차장으로 근무했고 이용만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은행감독 지위에 올라 있었다.
이용만은 2년간 복무 후 1953년 1월 육군하사로 명예 제대했으니 국가 유공자이다. 저자가 가려낸 15가지 특징과 강점의 하나인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여기서 우러나왔다고 볼 수 있다.

5.16후 공직진출, 재무부 이재국서 맹활약

이용만은 6.25 사선(死線)을 넘어 명예 제대했지만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처럼 외톨이 신세였다. 수소문 끝에 6촌 형이 대전 체신청 인사계장으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대전우체국 서무과에 취직할 수 있었다. 9.28 수복 후에는 서울중앙우체국으로 옮겨 근무하며 밤에는 장충단 언덕 위에 있는 야간대학인 국제대학에 등록도 하지 않고 법학과 강의를 받는 ‘가짜 대학생’이 됐다.
그 뒤 성균관대학 법대에 정식으로 입학해 다니다가 고대 법대 행정학과에 편입,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우체국 근무 인연을 살려 우표 수출입 업무를 배우고 익혔다.
대학 졸업 후 5.16 정부가 정부조직법을 개편하여 내각수반 직속기구로 설치한 내각기획통제관실과 인연이 닿았다. 기획통제관에 평북 출신 김정무(金貞武) 장군이 취임하자 비서관인 한호준 씨가 이용만을 같은 이북출신이라며 추천, 1962년 6월 처음 출근했으니 공직의 출발이었다. 내각기획통제관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5.16 정부 공약사업 컨트롤타워 기능을 맡은 중요한 기구로 이용만은 고등전형 시험을 거쳐 행정사무관 4호봉으로 근무했다.
얼마 뒤 청와대 서봉균 정무비서관실로 파견됐다가 서 씨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재경직 전환시험을 거쳐 재무부로 옮겼다. 이재(理財) 2과장직을 맡고 보니 요직이자 눈코 뜰 사이 없는 전투직이나 다름없었다. 이재 2과는 저축, 신탁, 은행 관리감독이 주 업무라 5.16 정부의 공약사업 실천을 위한 저축 장려와 내자동원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는 만근(滿勤)으로 사생활을 거의 포기해야만 했다.
이어 1969년 10월에는 남덕우 교수가 장관으로 부임하여 장수하면서 금융정책, 국책은행 등을 관리·감독하는 이재 1과장 2년, 이재국장 3.5년의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이용만 전 장관은 이 시절 남덕우 장관을 스승이나 큰형님처럼 모시고 일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재무부는 통화긴축, 부실여신 등과 씨름하고 사금융 양성화, 서민금융 지원 등으로 고심해야 했고 박 대통령의 특별 극비지시에 따른 ‘8.3 긴급조치’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잘 나가다 신군부시절 숙정대상 날벼락

▲ 1980년 공직에서 도중하차 후 11년만에 재무부장관으로 복귀 (1991)

재경직 고위직으로 잘 나가던 이용만 이재국장이 재정차관보를 거쳐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으로 옮겼다가 신군부의 숙정대상 추가명단에 오른 날벼락을 맞았다. 1980년 5월, 장덕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장이 재무부 차관으로 옮긴 박봉환 상임위원(뒤에 동자부장관 역임) 후임 자리를 제의하여 옮겨 앉아있을 때 뒤늦게 통보를 받고 해고된 것이다.
듣고 보니 재정차관보 시절 이규광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이 재무부로 취임 인사차 방문했다가 “주요 회의 중이니 기다려 달라”는 여비서에게 호통을 치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규광 사장은 헌병감 출신에다 이순자 여사 부친 이규동 장군의 동생으로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국영기업체 사장 못해먹겠다”고 불평한 모양이다. 전 대통령이 즉각 “그 사람 잘라버려”라는 한마디로 이용만이 오랜 공직 자리에서 불명예 퇴출됐다는 이야기다.
분명 말도 안 되는 날벼락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서봉균 전 장관이 이규광 사장을 골프장에서 만나 “이용만 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 오해일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이 말을 전해들은 국회의원 지상욱 씨의 부친 지성한 한성실업 회장도 이규광 사장을 만나 적극 해명했다.
지 회장은 강원도 김화생으로 이용만 전 장관과 동향이고 헌병대령 출신으로 헌병감 출신의 이규광 장군과 같은 병과인데다가 육군과학수사연구소장, 대통령 민정비서관을 지낸 경력이 화려하다. 이처럼 몇 사람의 해명을 듣고 이규광 사장이 오해를 풀고 이승윤 재무장관을 만나 “이용만 씨의 복직 길이 없겠느냐”고 문의하더라고 했다.

은행장 돌고돌아 재무장관 금의환향

▲ IMF연차총회에서 연설 (1991)

이용만이 오랜만에 공직을 떠나 한가한 시간이 생기자 하버드대 객원 연구원 6개월 코스를 잡아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김만제 재무부 장관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추천됐으니 급히 귀국했으면 좋겠다”고 연락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와서 보니 대통령 정무비서관 허문도씨가 “우리가 자른 양반, 우리가 다시 쓸 수 있느냐”고 비토하여 이사장 자리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 강원도 출신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이 경영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고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도 일자리 전갈을 보내왔지만 완곡히 사양했다. 또 재일교포 이희건 씨 등의 모금으로 발족한 신한은행 초대 은행장으로 추천됐지만 역시 허문도 비서관의 반대로 취임할 수 없었다. 반면에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이 중앙투자금융 사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직원 100명의 제2 금융권의 보잘 것 없는 자리 같았지만 금융 본업(本業)생각으로 1982년 2월 취임했다. 그 뒤 1985년 2월에는 신한은행 제2대 은행장을 맡고 1988년 2월에는 사공일 재무장관 추천으로 외환은행장을 맡았다.
이어 1990년 3월에는 정영의 재무장관 추천으로 은행감독원장을 맡아 1년 2개월 근무하다가 정 장관 후임으로 제36대 재무부 장관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았으니 재무부 친정 퇴출 11년만의 금의환향이었다.
이용만 평전의 저자 공병호 박사는 ‘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라고 설명했지만 이 전 장관 스스로는 6.25 참전 상이용사로 가족을 잃고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은행장과 장관을 지낸 경륜을 “은혜의 강물이 흘러내려 오늘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어려운 순간마다 길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장관은 최근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 고문단 일원으로 안응모 전 내무부 장관, 정원식 전 국무총리, 백선엽 장군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국기 흔드는 종북 좌파 독버섯을 척별하자’는 시국선언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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