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톡뉴스] 입춘도 지나고 우수, 경칩도 지나니 봄이 한층 기다려진다. 햇차 맛을 빨리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햇차 맛도 향내가 짙을까? 마음이 차밭으로 달음질치니 입안에 벌써 차향이 감도는 듯하다. 30년 넘게 차를 ‘탐식(貪食)’해오고 있다. 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맑게 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체내의 독기를 배출하는 등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참으로 ‘수중군자(水中君子)’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곡우(穀雨) 무렵부터 입하(立夏)까지 새잎을 따서 만든 맏물(첫물)차와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에 딴 두물차 등이 있고, 차 잎의 여리고 굳음에 따라 세작·중작·대작으로 나뉘는데, 특히 맏물차 가운데서도 곡우 전에 따서 아홉 번 덖어 만든 우전차(雨前茶)는 최상의 명차로 꼽힌다.

▲ 다산 정약용(1762-1836)

오랜 세월의 우리나라 차 역사를 빛낸 명인도 많고 재미있는 사연도 많았지만,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초의선사(草衣禪師),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 세 사람에 얽힌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모두 빼어난 예술가요 학자요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차와 선(禪)을 지고의 경지로 승화시킨 풍류명사이기도 했다.
다산은 고난에 찬 유배생활 중에도 승속(僧俗)을 초월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다선불이(茶禪不二)의 경지에 다다랐던 다선(茶仙)이었다. 다산이 차 맛에 반하게 된 것은 강진에서 18년에 이르는 기나긴 유배생활 초기 고성사의 스님한테서 우전차를 얻어 마신 뒤부터였다. 이후 차의 ‘걸신(乞神)’이 된 그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승려 혜장(惠藏)을 만나게 된다.
학승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역(周易)’을 배우고, 차와 선을 논하며 승속을 떠난 인간적 교유를 시작한다. 혜장은 또 나중에 자신의 제자 초의를 다산에게 인도하여 가르침을 받게 하는데, 이 초의가 바로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중흥조다. 초의는 뒷날 다산의 맏아들 학연(學淵)의 소개로 동갑내기인 추사를 만나 다산-혜장-초의-추사로 이어진 전설적 다화(茶話)를 엮어나간다.

다산은 유배가 풀려 다산초당을 떠나면서 해마다 햇차를 얻어 마시기 위해 다신계(茶信契)라는 기상천외한 계까지 만들었으며, 차에 관한 시 70여 수와 ‘동다기’ ‘다무’같은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얻으려고 써 보낸 ‘걸명소(乞茗疎)’야말로 우리 다도사·풍류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다. ‘걸명소’에서 다산은 이렇게 통사정했다.
‘나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어 차를 약처럼 마신다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3편을 통달하고... 몸에 병이 있어 차를 얻고자하는 뜻을 전하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는 데는 보시(布施)를 가장 중히 여긴다는데 명산의 진액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는 차가 으뜸이 아니겠는가.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 같은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라네.’
뒷날 초의와 만난 추사도 차에 대한 욕심은 결코 선배인 다산에게 뒤지지 않았다. 초의에게 다산이 승속·유불을 초월한 스승이라면 추사는 승속·유불을 떠난 친구였다. 둘은 30세에 처음 만나 우정을 쌓아갔으며, 이런 끈끈한 유대와 교유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추사 또한 다산이 혜장에게 했듯이 초의에게 애걸반 협박반의 ‘차 구걸’하는 편지를 쉴 새 없이 보냈다.

초의는 뒷날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

당해 10년간 귀양살이 할 때 험한 뱃길을 무릅쓰고 건너가 따뜻이 위로해주고 반년이나 함께 지내며 차나무를 심고 참선도 하며 지냈으며, 자신의 제자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보내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게 했다. 추사가 만년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재미있는 대목도 있다.
‘... 다만 차에 관한 인연만은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네. 그러므로 차만 보내주면 되고 답장도 필요 없네. 이제 지난 2년간 못 받은 세금처럼 밀린 차를 보내되 다시는 미루는 일이 없어야만 하네. 그렇지 않으면 백천 겁이 지나도록 마조(馬祖)의 할(喝)이나 덕산(德山)의 방(榜)을 피할 수 없을 것이야!’
‘이제 며칠 뒤면 내 나이 70, 초의도 70이거늘 차 보내는 일은 어찌하고 이리 누워만 있는고!’
이런 기록들을 읽다 보면 다산이나 추사나 만세의 사표로 우뚝 선 민족사의 거인들이지만 인간미 물씬 풍기는 풍류 한마당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해마다 곡우를 눈앞에 두고 지리산 남쪽 기슭 하동 화개 차밭에 전화를 걸어 햇차가 언제 나오느냐, 나오는 대로 빨리 보내달라고 어린아이 젖 보채듯 재촉해왔는데 올해는 마시던 차가 떨어져 지난해 차라도 한 통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엊그제 지난해에 만든 ‘천하춘(天下春)’ 한 통을 받았다. 천하춘은 옛날 초의선사가 다산에게 만들어 보내던 제다법을 재현해 만든 우전차 중에서도 상등품이라고 한다.

▲ 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배고픈 어린아이가 젖을 빨듯 당장 차를 달여 마셨다. 아니, 마시는 게 아니라 한 모금씩 입안에 물고 굴려보기도 하고 씹어보기도 했다. 금세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이 은은한 차향.. 그 어떤 미식(美食)과 미주(美酒)에 견주랴.
내 비록 지금은 칠십 병객(病客)으로 변방초야에 묻혀 있지만 아직도 고인들의 멋과 슬기 넘치는 풍류정신을 잇고자 하는 뜻은 여전하다. 그런 까닭에 해마다 봄이 되면 손꼽아 햇차를 기다리고, 그 은은한 다향을 더불어 음미할 종생(終生)의 지기(知己)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해 속에서 한 삶의 황혼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죽기 전까지는 향긋한 우전차를 마실 수 있으니 이 또한 자족(自足)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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