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유교도시를 근대도시로…

[이코노미톡뉴스] 1896년 가을, 서울(한성)을 방문한 영국의 저명한 여행가 비숍은 당시 한성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서울은 개화되고 가로의 면모가 달라지고 있었으며 의욕적인 부윤 이채연이 관장하고 있었다. 방치된 쓰레기더미와 불결한 악취와 같은 지난날의 모습을 느낄 수 없었는데 이것은 이부윤의 치적이었다. ~ ~ 도로의 양편에 다듬은 돌로 도랑을 만들고 석판 교량으로 양쪽을 연결하였으며 넓고 평탄한 도로로 자전거가 질주하고 있었다. ~ ~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로 탈바꿈해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고 귀국한 이채연이 한성부윤으로 부임하여 도시의 환경을 혁신적으로 개조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채연이 외교활동을 하며 구입 실무를 맡았던 주미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단돈 5달러에 일본에 강제로 빼앗겼다가, 100여년만인 2012년 10월에 미국의 한국인교포들과 정부의 노력으로 문화재청이 350만 달러에 재매입하여 역사적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

대조선주차미국화성돈공사관(大朝鮮駐箚美國華盛頓公使館)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주재 조선공사관을 말한다. 1882년 서구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고종(고종19년)은 청·러시아·일본의 외교적 간섭과 압박에 맞서, 1987년 미국에 전권대사를 파견한다. 전권대사 박정양을 수행하여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를 선임하고 번역관으로 이채연을 임명하여 미국 워싱턴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편다. 상주 공관의 필요성이 있어 1891년 당시로는 거금인 2만 5000달러를 내탕금(왕실자금)으로 지불하고 지상3층 빅토리아양식의 건물을 구입해 주미공사관으로 사용했다. 이곳은 고종황제가 펼쳤던 자주외교의 상징으로서 16년간 대한제국의 공사관이었다.
이채연은 번역관으로 초대 주차미국전권대사 박정양을 수행하여 유창한 영어로 외교관의 역량을 발휘하며 이듬해 서기관으로 승진한다. 그에게는 재취부인 성주배씨가 동행했는데, 그녀는 미국 제23대 벤저민 대통령의 영부인을 비롯하여 각료들의 부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민간외교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당시의 뉴욕 데일리트리뷴이 보도한 기록이 있다. Mrs. Ye로 불렸던 이채연의 부인 성주배씨는 사교적 열망이 크고 총명한 신여성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도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유교적 덕목이 엄연히 강요되던 시절에 기존의 여성상을 뛰어넘어 신세계의 자유를 빨아들이고 놀라운 적응력으로 영어공부에 유별난 재능을 보이며 미국 외교계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이채연은 대한제국 주미 워싱턴공사관의 서리공사로 1893년까지 근무하고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귀국한다.

근대적 도시개념의 도입

▲ 1900년경의 주한 프랑스 영사관.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채연은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문물에 안목이 트였을 터이고, 그가 귀국한 이후에 박정양내각은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공포하였다. 한성부윤으로 기용된 이채연은 이 법령에 따라 수백 년간 형성되어 왔던 도시구조를 개조하기 시작하였고, 비숍이 다시 방문했을 때 한성부는 이미 부분적으로 도시개조의 성과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탁지부 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의 자문을 받으며 미국에서의 체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불결한 도시를 청결한 환경으로 탈바꿈시키고, 비좁은 골목을 넓혀 난잡하고 불량한 거리를 정돈해서 도시면모를 혁신하였다. 한성의 서부지역인 서대문과 남대문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가 점점 늘어 도시개조의 경연장이 되었다. 외국공관과 선교기관의 건물이 속속 세워지고 외국상점도 들어섰다. 특히 프랑스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은 그 위용을 다투고 있었고, 미국 감리교 선교회(정동교회)의 빨간 벽돌 예배당과 가톨릭 성당도 서로 질세라 첨탑을 과시하였다. 건축물의 소재도 목조 위주에서 벽돌과 석재 그리고 유리로 창문을 내는 등 건물의 형태미가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단층구조의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이어지던 스카이라인은 서양식 건물의 등장으로 파격적 높낮이를 연출하는 새로운 풍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원각사지 10층 석탑 일대 민가를 정비하여 근대도시의 상징인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 탑골(파고다)공원을 조성하였다.

역사도시에서 근대도시로 넘어가는 시대

500년 조선왕조가 기울어가는 국운으로 진통을 겪을 때, 이채연은 서울의 모습을 바꾸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40세라는 짧은 인생 동안 그는 외교관으로서 출중한 활동을 했고, 유교적 도시 이미지를 개선시켜 이 땅에 새로운 개념의 도시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이채연(李采淵)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字)는 명오(明五)이며 1861년 태어나 1900년에 운명했다. 선조 때 좌통례를 지낸 극견(克堅)의 1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긍운(亘運)이고, 아버지는 감역 이봉(以鳳)며 어머니는 파평 윤택훈의 딸이다. 배위는 인동장씨와 성주배씨이다. 맏아들 상필(相弼)은 시강원시강이며 둘째아들은 상범(相範)이고,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화리 호명산 아래에 있다.
미국주재공사관의 번역관과 서기관으로 활동한 후 귀국하여 선공감 별제를 제수 받았다. 단성현감·전우국방변을 겸직한 다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동부승지에 임명되고 하동부사를 거쳐 첨지중추원사가 된 후, 경기관찰사에 이어 농상협판으로 옮겼다가 서리대신사무가 되었다. 고종32년 한성부 관찰사에 임용되고 농상공부협판을 지낸 다음 교전소지사가 되었다. 궁내부 특진관, 양지아문부총재관을 지내고 시종원경과 귀족원경을 아홉 차례나 배명 받았으며 한성판윤을 여섯 차례 역임하였다. <자료협조 : 광주이씨대종회 문화유사 이석재, 좌통례공파종회 총무유사 이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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