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2대에 걸친 청백리 가문
숭례문을 건설한 최유경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14세기 말, 대륙의 형세변화가 출렁이면서 신흥강국 명(明)은 철령위(鐵嶺衛)를 내놓으라며 고려를 압박하였다. 이에 분격한 팔도도통사 최영장군이 요동 정벌을 감행할 때, 최유경은 서북도 안렴사 겸 운량사로 후방지원의 임무를 맡아 참전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다. 이 엄중한 사실을 성천 행재소에 있던 우왕(禑王)에게 고변하고 왕을 호종한 사람이 최유경이다. 당시 조정의 많은 무리들이 반군세력에 동조하거나 방관하였어도 최유경만 큼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군왕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지켰다. 결국 세상의 사세가 기울자 최유경은 ‘큰집이 무너질 때는 나무 하나로 지탱하기 어렵다고 하니 어찌 우리 왕조의 모습이 아닌가? 칠실지우(漆室之憂)처럼 답답할 뿐이다.’ 라고 탄식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면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은 이색에게 ‘천지가 번복하니 이 어찌된 세상인가요? ~ ~ 고려에서 죽지 못하고 조선건국을 보게 되었으니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며 괴로운 심경을 필담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 죽정 최유경 묘역(竹亭崔有慶墓域). 오른쪽에 신도비가 살짝 보인다. <사진=문화재청>

새 왕조의 부름을 받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적폐를 혁파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새로운 나라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여러 사업으로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두문동과 같이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이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비교적 온건하고 유능한 인재들은 회유하여 동참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인재를 영입하는 데는 지난날의 인연을 연결고리로 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쓰는 방도이다.
이성계는 양광·경상·전라도 삼도도원수로 왜적을 물리칠 때 최유경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그의 인품과 자질을 잘 알고 깊이 신임하는 사이였다. 위화도회군 때 우왕에게 고변하고 개성까지 호종한 일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태조는 우정승 김사형에게 ‘그 배반은 오직 그때의 임금을 위한 것일 따름이다’ 라며 그의 충의(忠義)를 변명해주면서 ‘또한 그는 포치(布置)의 재주가 있다’고 행정능력을 인정하는 말을 하였다. 이와 같이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태조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최유경은 새로운 수도 한양의 도읍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상정도감과 도성영축도감의 일을 맡아 1년간 임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태조는 낙향을 만류하는 간곡한 교서를 보내며 관직을 제수하니 결국 경상도 도관찰출척사에 부임하고 극구 사양했음에도 개국원종공신에 입록되어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았다.

숭례문 건설의 총책임자가 되다

1962년 숭례문을 해체 · 복원하는 공사를 할 때 상량문에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었다. ‘洪武 二十九年 丙子 十月初六日 判事 嘉靖大夫 中樞院使 崔有慶 副判事 前嘉善大夫 開城府尹 李之浩 …’ (서기1396년 10월 6일 판사 가정대부 중추원사 최유경 부판사 전가선대부 개성부윤 이지호 …) 라고 되어있어 최유경이 성문공사의 총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태조5년(1396년) 도성영축도감의 성문제조(城門提調)로서 숭례문 건설이라는 보다 큰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공부(工部)의 산랑(散郞)이란 관직을 맡았는데 국왕으로부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 받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토목과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 같다. 또 태안군에 운하를 건설할 후보지를 물색할 때도 파견되었으며, 개성의 수창궁이 수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을 때 전임자가 파면되고 개성유후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호남권의 대표적 행정관청 전라감영이 위치한 전주부성과 남문인 풍남문의 건설에 관한 기록이 1734년 전라감사 조현명의 수축 기문(記文) 첫머리에 ‘府城之設 在我太祖大王 擧義回軍之年 觀察使崔有慶實主之云 …’ 라고 나타나 있다.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 호남제일관문 풍남문을 최유경이 주관하여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오늘날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이러한 경험을 축적한 최유경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강명(剛明)한 관직생활

최유경의 생애는 강명과단(剛明果斷)하고 호선질악(好善疾惡)하며 억강부약(抑强扶弱)하는 삶으로 일관되었다. 춘정 변계량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에서는 ‘… 잘잘못을 따라 사람을 올리고 내렸다. 강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개가 출중하여 용감하게 말하며, 흔들리거나 굴하지 않고 중외를 출입하여 기강을 떨쳤다. …’ 라고 설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관리가 되는 길이 과거를 보거나 음서(蔭敍)를 통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최유경은 아버지 최재가 종2품 밀직부사까지 오른 고위관료였기에 18세에 청백(淸白)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외국 사신을 맞는 선인관직을 시작으로 관료생활의 길에 들어섰다. 23세에 승봉랑의 품계를 받고 28세 이후 정6품의 공부(工部)와 민부(民部)의 산랑을 거쳐 판도좌랑으로 권세가들에게 점거당한 염분을 의염창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32세에 강원도 안렴부사가 되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공민왕 딸의 사채놀이를 조정에 고하지 않고 금지 시켰으며, 그해 12월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자 국왕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환관 윤충좌를 탄핵하여 유배시켰고, 다음 해 전법총랑으로 자리를 옮겨 이사충의 가노(家奴)가 저지른 범죄를 형장을 사용하지 않고 자백하도록 하였다. 34세에 군부총랑이 되었고, 이듬해 삼도도원수 이성계가 그의 충의와 강직함을 알고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삼남에 침투한 왜구를 섬멸하면서 군사들이 조금도 군율을 어기지 않도록 통솔하여 이성계는 최유경의 인품과 자질을 신임하여 죽을 때까지 그를 믿고 후원하였다. 이후, 중현대부에 올라 사재령 · 종부령·지전법사의 관직에 차례로 올랐으나, 이인임, 임견미 등 권신의 미움을 받아 낙향하기도 하였다.
다시, 40세에 공주목사가 되고 43세에 봉익대부 판서에 승진하였으며, 46세에 권신 임견미, 염흥방 등이 처벌되었을 때 양광도 안렴사가 되어 권간(權奸)들이 빼앗은 백성들의 토지를 모두 돌려주었다. 46세 때 위화도회군으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최유경의 충직함을 알고 있었기에 밀직부사 상호군에 발탁하였으며 쌓여온 폐단을 혁거(革去)하고자 왕의 교서와 부월을 주며 전라도 도관찰출척사에 임명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52세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54세에는 성문제조로 숭례문 건설을 맡았으며 이듬해 경기·충청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몰아냈다. 57세 때 경기우도 도관찰출척사로서 새로 왕위에 오른 정종에게 무일도(無逸圖)를 바치고, 59세에 참찬의정부사로서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당시 조카인 황제를 죽이고 숙부가 정권을 탈취하는 정변(靖難의 役)에서 그는 사태 흐름을 꿰뚫어 파악하는 혜안으로 연왕(燕王:영락제)이 승리할 것을 예측하여 명과의 순탄한 외교관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61세 때 참판사평부사가 되고 이어 판한성부사에 임명된 후 대사헌이 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내려 했으나 삼사(三司)와 육조(六曹)로부터 노성인(老成人) 으로 예우를 받으며 다시 참찬의정부사에 제수되어 작고할 때까지 나랏일을 도왔다.

부자(父子) 2대의 청백리 가문

최유경의 본관은 전주, 자(字)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할아버지는 선부전서 상호군 득평(得枰)이고 아버지는 전리판서 재(宰)이며 어머니는 무안 박윤구의 딸이다. 그는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판한성부사, 차남 사의(士儀)는 판돈녕부사, 3남 사규(士規)는 사헌부 지평, 4남 사강(士康)은 의정부 우찬성, 5남 사용(士庸)은 중추부사, 6남 사흥(士興)은 현감으로 이들 모두가 현달하였다.
최유경은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맏아들 사위도 판한성부사를 지낸 다음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자 2대에 걸쳐 청백리를 내었기에 가문을 빛냈으며, 또한 효행으로 이름이 나 세종 때 효자정려를 받았다. (자료제공 : 전주최씨 평도공종중)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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