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속 종북구호에 반발, 태극기 규모 커져

촛불 대응 태극기 집회
집단적 정의감 대충돌
촛불속 종북구호에 반발, 태극기 규모 커져

글/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인간이 더없이 냉혹하게 되어버린 것은, 일반적으로 명백한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타오르는 정의감에서 기인한다고 흔히 말하여 진다. 이것은 의회나 법정이라고 하는 그럴듯한 도덕적 권위를 모두 갖춘 법치국가에 대해서 한층 더 타당한 말이 아닐까?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개인의 파괴능력은 아주 작은 것이다. 반대로 국가의 파괴능력은, 아무리 선의의 국가에서도 무한하다고 말해도 좋다.”(폴 존슨, 세계현대사, 이희구·정승현 역)
“모든 시대의 모든 잔학성이 한 곳에 모여지고, 군대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 졌다”고 윈스턴 처칠이 회고한(위의 책)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폴 존슨은 그렇게 묘사·평가하고 있다.

▲ 박사모 등 단체들은 성탄 전야인 24일 청계광장 등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를 주장했다.

탄핵을 둘러싼 집단적 정의감의 충돌

국가 간의 전쟁은 사활적 이해의 충돌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지만 그 양상이 격렬해지고 냉혹해지고 잔혹해지는 것은 국가에 의해 부추겨지는 정의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전 양측 공히 ‘정의의 깃발’ 아래로 국민을 불러 모으고 이들을 ‘성전’에로 내몬다. 전쟁 수행 주체인 정부는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은 민주제도 의회 사법부 등의 지원에 힘입어 정의를 독점하게 된다. 누가 그들의 옮음을 의심할 수 있으랴.
이들은 적대세력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베풀지 않는다. 악에 대한 응징에 단호하지 못하다는 것은 악을 수용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수심은 불타오르고 전쟁은 격화된다. 이윽고 전쟁이 끝나면 전장에 남는 것은 죽은 이들의 무덤과 유족들의 통곡, 그리고 폐허뿐이다. 누구의 정의도 구현되지 않는다. 애초에 정의구현과는 상관도 없는 게 전쟁이다. 혹 승패가 확연히 가려질 수 있다면 그 땐 승자의 이익이 곧 정의가 된다.
국가 사이가 아니라 국내의 집단 간에도 거친 대결, 심하게는 전쟁까지 벌어진다. 이는 막연한 추측이나 우려가 아니라 인류의 오래고 지속적인 경험이다. 이 시간에도 정의의 이름으로 무장한 국가 내의 집단들이 서로를 향해 총탄과 포화를 퍼부어대는 곳이 있다. 악당은 제 자신의 잘못은 안다. 그렇지만 폭력적 ‘정의의 사도’는 오히려 사명감에 불탄다. 그래서 더 냉혹해지고 더 잔인해 질 수 있는 것이다.

JTBC의 ‘최순실 PC’ 폭로 이후

지금 우리사회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집단적 정의의 대충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국을 이 지경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는 JTBC의 이른바 ‘최순실 PC’ 폭로였다. 레임덕에다 미르·K재단 의혹까지 겹쳐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박 대통령은 작년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을 제시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개헌을 제시함으로써 정치권의 공세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온 JTBC의 보도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위기를 돌파하기는커녕 온갖 의혹의 올가미에 제대로 걸리고 마는 상황으로 내 몰린 것이다.
국민들은 극심한 배신감에 떨었다. 그렇게 고고한 양 하더니 기껏 초로의 한 여인에게 휘둘리며 국정을 농단케 했다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감수했다니! 그 여인이 하필이면 과거 박 대통령 자신과 사이에 불미스런 소문을 만들어 냈던 최태민의 딸이었는가? 여론은 들끓었고 언론들은 온갖 시나리오를 대하소설로 엮어냈다. 또 지상파TV·종합편성 채널 거의 대부분이 뉴스와 해설 논평 프로그램을 통해 일제히 박 대통령의 죄상(?)을 성토해댔다.
이에 호응해서 검찰은 최 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박 대통령을 과감히도 ‘공범’으로 규정했다. 국회는 국정조사와 함께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국회는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박 대통령에 대해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야 말았다.
아마 앞으로도 현직 대통령에 대해 거의 전 언론, 휘하의 정부기관, 야당에다 여당의 일부 의원들까지 일제히 공격자로 나서는 이런 사태는 결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조성됐는가? 물론 그 요인을 한두 가지로 설명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갈등→무리한 공천→이로 인한 여당의 참패→반성을 모르는 친박계의 질주→여당의 분열 등이 박 대통령을 정치적 무방비 상태로 밀어 넣었고, 이것이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다. 경제의 침체, 청년 실업의 확산을 비롯한 경제·사회적 불만의 팽창, 야당들의 국회 장악, 임기 말의 레임 덕 현상 등도 한몫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같이 조성된 화약고에 불을 당긴 것이 바로 집단적 정의감과 분노의 분출이 아니었을까?
국민들은 너무 분노해서 관용의 미덕을 잊어 버렸다. 오히려 박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떨었다. 그 때문에 거듭된 대국민 사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4월 퇴진 6월 대선’ 다짐도 거부했다. 광장의 촛불집회엔 수많은 국민들이 모여 박 대통령 퇴진 구속 탄핵을 외쳤다. 이런 저런 말 할 필요 없이 당장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언론들은 이를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론은 단지 보도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촛불집회 참가를 독려하는 역할까지 열정적으로 떠맡았다.

촛불속의 친북·종북에 분노한 태극기집회

그런데 이들의 박 대통령에 대한 압박, 망신주기, 조롱, 비아냥거리기가 도를 넘어서는 분위기를 보이자 보수성향의 국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촛불집회에서 공공연히 친북 종북적인 구호와 피켓이 등장한 게 이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명분이 주어지자 보수 쪽의 시위규모도 급격히 커졌다. 종전엔 일부 보수단체들만의 집회에 그쳤던 것이 이젠 대규모집회로 바뀌었다. 노인들만의 집회에 중년 청년들도 참여했다. 해외 동포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말 그대로 범보수집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규모면에서 촛불집회를 넘어섰다.
촛불집회 측은 자신들이 민심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태극기집회 측은 자신들이 바로 국민이라고 맞서고 있다. 서로가 정당성 정통성을 내세운다. 한쪽은 ‘박근혜퇴진 탄핵인용을, 다른 한쪽은 탄핵기각 특검해체 종북척결을 외친다.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이 헌재의 탄핵 여부 결정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추위가 풀리면 참가자 수가 많아질 것은 불문가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그 후에는 우리 사회가 평온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양측이 너무 격하게 맞섰기 때문에 이제 우리사회의 분열상은 회복불능의 상태로 악화되었다.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도 싸움을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엔 보수 측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기득권 세력, 부패 세력, 오만한 세력, 무책임한 세력, 이기적 세력 등 온갖 부정적 이미지로 덧칠되었기 때문에 과감히 목소리를 높이고 나설 보수 인사는 별로 없었다. 보수의 체면의식이 행동을 가로막기도 했다. 점잔 빼느라 집회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진보 측의 지나친 정의 주장이 보수 측의 반발을 불렀다. 이들은 “우리가 국민이다”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의는 촛불집회가 아닌 태극기집회에 있다는 확신을 스스로의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은 JTBC의 태블릿PC 보도가 조작된 것이라고 믿는다. 촛불 측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서두르는 이유가 야당의 집권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박 대통령의 안보강화 정책에 대한 좌파 혹은 친북세력의 위기감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보수정당의 재기 동력 될는지 관심

박 대통령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통진당 해산·이석기 구속을 이끌었으며, 사드배치를 결정했고,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었는가 하면, 국사교과서를 국정화 함으로써 친북 주의자들의 입지를 빼앗아 버린데 대한 보복이 촛불집회라는 것이다. 게다가 촛불집회 측, 그리고 야당이 우리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면서 미혼인 박 대통령에게 가해 온 갖가지 조롱 희롱 모욕 등이 보수 측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보수 측도 당당히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양측은 정의의 전쟁을 위한 진용을 각각 갖춘 셈이 됐다. 양보는 있을 수 없다. 그건 자신들을 불의의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정치권의 선악대결의식이 어느새 국민들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국민들은 크게 양분되어 이쪽은 선, 저쪽은 악이라는 구도를 만들고 그걸 진지삼아 결전을 벌이게 될 공산이 커졌다.
특히 보수 측의 경우 보수정당이 지리멸렬한 가운데서도 집회의 규모는 오히려 커져가고 있는 것이 이채로운 현상이다. 촛불집회의 대형화에는 야당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참여가 크게 기여한 게 사실이다. 그에 비해 태극기집회는 보수여당이 지리멸렬하고 여당 정치인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키웠다. 태극기집회의 기운이 좀처럼 약화되지 않으리라고 내다볼 수 있는 게 그 때문이다.
어쩌면 이 기운이 다시 보수정당의 재기를 이끌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우리사회를 안정시키는 첫 조건이 된다. 정당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입법 및 국정운영 과정에 충분히 반영시킬 수 있는 실력과 성실성 책임의식을 가졌다고 믿게 될 때에야 비로소 국민은 광장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로 다른 문양의 정의를 치켜든 양측이 도심에서 소리의 크기, 규모의 크기를 겨루는 험악한 기세와 양상이 너무 걱정스럽다. 비록 총이 아니라 말로서이긴 하지만 양진영이 광장에서, 거리에서 벌이는 냉혹무비의 대결은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다. 우리가 앞으로도 한 국가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들임을 인정한다면 이 대결을 종식시켜야 한다. 정의감으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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