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성·객관성·독립성'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법치주의 실현을 바란다

글/ 최대권(서울대 명예교수 헌법학)

1. 머리말

언론, 학자, 법률가 등 전문직(profession)은 중립성·객관성·독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이것을 잃으면 언론과 학문은 선전·선동의 매체가 되며 법률가는 독전대 혹은 마름이나 된다는 점은 상식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촛불시위, 이를 취급한 언론과 학자의 보고나 관찰, 이로 인하여 촉발된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 국면에서 언론과 학자와 기본적으로 법률가인 검사(특검 포함)가 보인 행태는 전문직 생명의 상실을 의심케 한다. 학부수준의 법학교육에서도 실체적 정의와 함께 절차적 정의(적법절차)를 배운다. 그래서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변호인선임권 ·사생활보호 등 적법절차상의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하에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학자나 법률가를 포함해 모든 국민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법에 충실해야 할 의무를 진다. 헌법학자의 전문적·객관적 시각에서 탄핵, 특히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의미, 절차와 과정 등 여러 국면을 분석해 보고 나아가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자.

2.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여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적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서도 우리가 자존심을 가지고 이만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 및 법치주의(the rule of law)를 불가분의 내용으로 하는 대한민국헌법의 구상에 따라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설립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그 구성 원리에 따라 지켜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법치주의가 제공하는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해서 번창해 왔다. 법치주의에 의해 담보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는 각인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고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체제이기 때문에(헌법전문) 시민이 누리는 자유와 풍요의 점에서 북한체제와의 경쟁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수많은 제3세계의 국가보다 우리가 앞설 수 있었다. 법치주의는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권력의 통제를 핵심요소로 한다. 법치주의의 핵심요소가 되는 권력의 통제는 무엇보다도 기본권 보장과 권력분립의 원리로서 표현되며 이를 통해 실현된다. 바로 이 권력통제의 핵심요소 때문에 법치주의는 독재국가에서도 강조하는 법치(rule by law)와 구별된다. 독재국가에서 법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의 독재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나치독일이나 현재의 중국이 그 대표적인 실례가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시민의 자유가 체제에 발목잡혀있음은 우리가 목격하는 바이다. 우리의 자유와 번영은 법치주의를 통해 증진·담보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목표나 내용을 실현하고 이에 도달하는 절차와 제도에 의해 정의된다. 링컨 대통령의 저 유명한 민주주의 공식의 핵심이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보다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정부라는 데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의” 공식이나 “국민을 위한”다는 내용은 군주국가나 독재국가에서도 표방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국민을 위한”다는 목표나 내용은 민주주의의 절차와 제도의 산물로 나와야 한다. 사실 국민의 행복이 되었든 경제민주화가 되었든 또는 부국강병이 되었든 이러한 국가적 목표나 내용은 (효율이 담보된)독재에 의해 더 빨리 혹은 더 잘 달성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목표나 내용을 달성·실현함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좋은 체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처칠이 적절히 천명한 바와 같이 인류가 발명한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미국이나 프랑스를 보면 다른 나라 국민들이 이민을 못가서 안달하는 그러한 부국강병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이룩함에 있어 그들의 민주주의정치체제 때문에 지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을뿐더러 바로 민주주의정치체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오히려 국민 각자의 역량을 최고도로 더 잘 이끌어내 이를 아우를 수 있게 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절차·제도는 법치주의에 의해 표현되며 담보되기 마련이다. 역대 대통령 임기 말에 표출된 비리에서처럼 최순실사태의 본질은 인맥현상에 의한 법치주의의 훼손에 있다. 그리고 인맥현상은 부정부패현상과 거의 중첩되어 전개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같이 거의 중첩적으로 전개되는 인맥현상과 부정부패현상은 법치주의가 주는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훼손하게 마련이다.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 훼손된 법치주의는 자유와 경제발전을 저해한다. 탄핵제도는 훼손된 법치주의를 치유하는 여러 절차와 제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새해의 화두는 법치주의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이 혼란기에 대한민국헌법의 기초인 법치주의는 보수·진보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상대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탄핵국면은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면 과연 법치주의의 대 전제인 공평한 게임이 전개되고 있는지, 혹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우선 뒤돌아보게 한다.
박대통령 즉시 퇴임의 광화문 촛불 목소리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여론이거나 그 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조직·자금동원력을 가진 사람들의 여론일 수는 있어도,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려는 정치세력의 낭만적 신학일 수는 있어도,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도, 국민에 의한 주권행사의 표현도 아니다. 광장민주주의는 고대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하지 훨씬 많은 인구와 훨씬 넓은 영토를 아우르는 현대국가에서는 불가능하다. 대의민주주의의 나라의 수도 등 대도시 광장에 모인 인파의 박수·갈채와 함성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광장의 함성을 국민의 주권행사로 간주하는 인민재판식 민주주의일 수 있다. 광장에 동원된 군중의 함성이나 갈채(acclamation)는 전체주의체제가 즐겨 활용하는 민주적 전용물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광화문 촛불집회의 목소리를 국민주권의 직접적 표현으로 간주하는 야권세력의 주장이 오류임은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의 광화문 촛불집회의 그것과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도 규지(窺知)할 수 있다. 대통령을 향한 언론매체들의 집요한 조작·과장된 불공정 보도가 그것을 유발했고 조직된 다양한 진보 세력과 야당이 합류해서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 등을 보면 기시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검찰의 불공정한 수사와 발표가 가세했다. 광화문 촛불집회의 목소리가 신격화된 국민주권의 직접적 표현일 수 없다는 점은 서울 시청-대한문 앞 광장의 태극기집회의 목소리와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촛불집회의 목소리가 신격화된 직접민주주의적인 국민의 목소리이라면 태극기집회의 그것도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신격화한 광장 촛불 목소리에 놀라 국회가 그 뜻을 존중하고 빙자해서 이루어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의에 따라 현재 대통령의 권한행사는 정지되고 우리나라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체제에 들어가 있다. 대행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의 범위는 선례나 국가적·헌법적 필요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판단할 문제지 야당이 주장하는 무조건적인 ‘소극적’ 범위란 헌법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국가적으로 꼭 요청되는 사항이거나 헌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되는 필요한 사항이라면 소극적이다 혹은 적극적이다 라고 임의로 선을 긋는 것은 오히려 나라 일을 망치는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억지라고 해야 한다. 일선 지휘관의 유고시에는 부지휘관은 상황이 요구하는 과감한 조치 등 필요한 부대지휘를 감당해야지 후임 지휘관이 취임 때까지 소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상 있을 수 없다. 경제와 함께 나라의 안보가 위태로운 지금 대행체제에 놓인 정부의 상황이 지휘관이 유고가 된 일선 부대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3.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은 임명직 공직자에 대한 징계절차가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통해 우리가 성취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단련하여 우리를 한 걸음 더 성숙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정체케 만들 것이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이제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는 정정이 불안정한 몇 남미국가나 인도네시아의 드믄 사례를 따를 것인지 그런 사례가 없는 미국을 포함한 안정된 선진민주국의 예를 따를 것인지의 결론은 이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국회의 내각불신임결정이 탄핵을 대신한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탄핵제도를 발명한 영국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미국에서는 탄핵사유로 반역, 뇌물, 기타 크고 작은 범죄(other high crimes and misdemeanors)를 들고 있으며 하원이 소추하고 역시 정치기관인 상원이 심판하는데, 우리는 직무집행상의 헌법 내지 법률 위배를 사유로 해 국회가 소추하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심판하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유의미하게 작동해야 하며 또 작동하리라 생각된다.
탄핵심판은 형사재판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인용되든 아니든, 특히 인용되는 경우에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불이익(공직 마감 등), 더구나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몰고 오는 국정공백 등 국가의 명운을 가름하는 대내외적인 타격과 손실들을 감안하면 형사상의 형벌을 능가하는 중차대한 심판사항이 된다. 그래서 탄핵심판은 중대한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 못지않게 공정하게 적법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탄핵심판에서는 형사소송법 등 형사소송에 관한 법령을 준용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탄핵결정, 특히 인용결정은 실체적으로는 물론 민주적으로도 이를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결정을 임명직 공직자에 대한 파면 등 징계 판정하듯이 다룰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탄핵심판에서는 ① 탄핵범죄(직무집행상의 헌법 내지 법률 위배)를 구성한다고 주장(소추)된 요건사실들이 과연 존재하느냐, ② 증거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이 법리상 탄핵범죄가 되느냐, ③ 탄핵범죄가 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탄핵인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하냐의 세 가지 점이 다툼의 핵심 사항이 된다.
첫째로 탄핵범죄의 요건사실들은, 예컨대 제삼자뇌물수수죄나 직권남용죄 등 구성요건 충족 여부, 특히 고의가 과연 있었느냐 하는 점들은, 엄밀히 검증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까지 나타난 것으로는 그 검증이 합리적 의심을 잠재우기에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둘째로 법리상의 문제야말로 엄격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탄핵심판이 정당화될 수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민사사건인 세월호사건에 관련된 선박회사관계자 등 수 많은 민간업자들·한국선급 및 직접적·구체적인 인허가권·지휘감독권·구조의무 등을 지닌 공무원들(해수부장관·항만청장 등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계선상의 공무원들을 포함)을 뛰어넘어 대통령의 탄핵범죄가 되는지 엄밀히 법리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우선 민간인에 의한 불법행위에 대하여 사용자 책임을 포함해 고의나 과실이 있는 민간인의 책임을 뛰어넘어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도 귀책시킬 수 있는 어떠한 법리가 있는지 대답하여야 한다. 또 공법상 항만청이나 해경 등 일선 공무원들의 책임이 어떻게, 어떠한 때 대통령의 책임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말단 공직자의 법위반행위는 모두 대통령의 탄핵사유인 (헌)법위반행위가 되는 것인지, 법리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대통령의 도덕적 책임(부덕의 탓 등)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탄핵소추에서 거론된 헌법조항들은 곧 바로 특정인에게 적용하여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self-executing)조항이 아닌, 추상적·개방적인 원리·원칙 조항일 뿐이다. 이들 추상적·개방적 헌법조항들은 법률, 판례, 학설·이론을 통해 그 의미가 구체화되어 비로소 사람에게 적용된다. 국민주권 조항은, 인민주권이나 군주주권의 원리와 대척관계에 서서 인민이나 군주가 아니라 국민을 주권의 담당자로 하는 국가 조직의 원리·원칙조항이다. 국민주권의 원리·원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제정하는 국적법,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정부조직법, 국가보안법, 집시법(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등의 제정법 조항들을 통하여 구체적·현실적 의미를 지니며 구체적 사실이나 사람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체화 입법을 떠나 국민주권조항이 어떻게 대통령 한 사람에게 탄핵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법리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국민주권조항이 구체적인 개인에게 적용되며 이에 타당하는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국민주권조항은 대한민국국민 모두, 그리고 대한민국 공직자 모두에게도 적용되며 효력을 미치는 조항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법단계상 하위단계의 형법이나 규제입법에서 요구되는 (죄형법정주의 등) 명확성의 원칙이나 법리가 국회의 탄핵소추안에서 대통령에게 적용한, 법단계상 상위법단계의 추상적인 헌법조항에서는 왜 적용되지 않는지도 설명되어야 한다.
법단계상 상위법인 헌법조항들은 법률 등 하위 법규범에 대한 위헌심사의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헌법 제37조제2항 참조). 사실 탄핵소추안에서 세월호사건과 관련시킨 생명권존중의 의무를 거론하려면 헌법적 가치체계상 좀 더 상위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 보장 조항(헌법 제10조)을 거론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생명권존중의 의무는 더 시원적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서 파생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이든 생명권 존중의 의무이든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국가를 향한 것이다. 그러한 만큼 국가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나 생명권을 존중할 의무를 진다. 그렇다면 국가의 이 생명권 존중의무는 국가를 대변하는(국가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국가기관이 진다. 그러므로 대통령 못지않게 국회도, 국회의원도, 판사도 검사도, 일반 공직자도 자기의 직무를 통하여 생명권을 존중·증진시켜야 하는 의무를 진다. 다만 이 생명권 존중의 의무가 구체적으로 어느 특정 공직자의 책임의 구체적 근거로 작용하려면 생명권 존중의 의무를 구체화한 구체화입법(각종 공무원관련입법)을 통해서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구체화입법을 떠나서 생명권 존중의 의무는 공직자 누구나 지는 추상적 의무로서의 효력을 지닌다. 이러한 법리상의 문제점들은 헌법의 국민주권조항 뿐만 아니라 민주공화국, 법치주의, 생명권존중의무 등 탄핵소추안에서 거론한 헌법조항들 모두에 꼭 같이 존재한다. 추상적 (헌)법조항을 구체적인 법적책임의 근거로 활용하는 일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법치주의는 국회의 입법권력에 대한 사법통제, 그리고 이를 위한 사법권 독립을 오히려 그 중심에 두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탄핵결정은 당리당략이 지배하는 정치기관인 국회의 소추에 근거해서 역시 정치기관인 상원이 아니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행하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헌법 또는 법률 위배에 대하여 임명직 법관으로 구성된 사법부가 행하는 그 탄핵결정은 이를 특히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사안이 중대하냐의 판단을 해야 한다. 우선 대통령에 대한 탄핵결정은 민주주의의 좌절을 정당화할 만큼 그에 대한 탄핵소추안건 사항이 중대하냐의 판단을 해야 한다. 즉 탄핵결정은 우리 헌법상 단순한 삼권분립 원리상의 견제와 균형의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국회는 탄핵 이외에도 입법권, 예산권, 국정감사권, 국무위원해임건의권, 동의권·승인권 등 대통령을 견제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다양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만큼 대통령의 법률 또는 헌법 위배가 굳이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탄핵인용을 결정하는 방안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의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헌법의 탄핵구조는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국회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라는 권력행사에 대해서 사법부가 행하는 사법적 통제장치의 모습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정치적인 자의적 권력행사나 권한남용은 아닌지 혹은 민주주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직무집행 상의 헌법 혹은 법률 위반이 워낙 중대해서 국회의 대통령에 대한 권력행사가 헌법상 정당화될 수밖에 없을만한지의 여부를 헌법재판소는 판정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판단에 따라 탄핵결정을 행하여야 한다. 법치주의의 중심에 국회의 권력행사에 대한 사법통제에 있다함은 이미 지적한 바이다. 비교법적으로 상원을 탄핵심판기관으로 하는 미국의 예뿐만 아니라 우리의 헌정사상으로도 사법기관으로부터 독립된 독자의 탄핵심판기구의 설치를 규정했던 때(1948년 및 1962년 헌법)가 있었던 점에 비추어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를 탄핵심판기관으로 결단한 현행헌법의 뜻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탄핵결정은 절차적으로나 실체적으로 공정하고 신중하게 법적 지혜와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현명하게 행해져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단언할 수 있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2017년에는 어차피 대통령선거를 시행하도록 되어있다는 점이다. 지금 대통령 탄핵심판절차를 빨리 진행해서 어느 시점(예컨대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시점)까지는 결론을 내야한다 또는 시점을 정해 놓고 결론을 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판절차의 공정성을 해하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부당한 압력이라는 논의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기각이든 인용이든 공정한 탄핵절차라면 당장 내일 또는 모래 내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서둘러 인용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길어야 원래의 대선으로부터 겨우 몇 달 앞서서 대선을 치르도록 만들게 된다. 그래서 어차피 치르게 될 대선을 겨우 몇 달 앞서서 치르게 만들 뿐인 인용결정을 꼭 단행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할 만큼 소추사안이 중대하고 심각한지의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인용이든 기각이든 어차피 치르게 예정돼 있는 대선일자는 탄핵결정의 시점을 정함에 있어 하나의 변수일 수밖에 없다.
탄핵 결정을 공정하고 신중하게 결단해야 할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세계 속에서 고난을 이겨가며 우리가 이룩한 자유민주주의와 산업화 성취의 빛나는 역사를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써나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에서도 나온다고 생각한다. 놀라움과 우려 속에서 우리는 2004년에 이미 한 번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사법통제라는 민주주의의 시련을 경험한 바 있다.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정당들의 정파적 이해 때문에 국회에서 가결되었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뒤 심각한 안보위기와 경제침체에 처한 지금 우리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또 한 번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닥친 혹독한 시험을 세계의 여러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치루고 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 후대를 위해 그리고 세계를 향해 지금 우리는 근시안적 또는 당리당략적 이해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부끄러운 퇴행적 역사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우나 민주적 공동체로 한 단계 전진하는 성장통의 기록을 하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북쪽 전체주의체제의 적화통일의 꿈을 저지하면서도 세계 여러 분쟁지역에 UN군을 파견하는 등 세계평화를 지키며 인류공영을 위해 민주적·경제적 성장의 노우하우를 여러 나라에 전파하는 역할까지도 기꺼이 또 자랑스럽게 수행해 왔다. 탄핵결정문을 포함해 탄핵국면의 하나하나는 모두 공개되어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바로 그래서 탄핵결정이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해서도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능히 이를 정당화할 수 있게 이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외신에서 “corruption scandal” 로 한국의 여성대통령이 의회의 탄핵소추를 받았다는 보도를 들으면서 부끄러웠다. 과연 우리나라 대통령이 합리적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해내지도 못한 뇌물죄 등으로 웃음꺼리로 전락하고 말게 될 것인가? 그리고 중남미 여러 국가 같은 정정이 불안한 국가로 기록될 것인가? 그러면서 우리의 민주적 및 경제적 성취를 뽐내며 남들보고 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는말

법 원리·원칙과 고뇌에 찬 결단에 바탕을 둔 탄핵결정을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가 금년에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정으로 기대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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