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김일성 특수임무유공 활동 계속

[이코노미톡]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
살아있는 6.25 첩보인생
金仁鎬 아흔둘의 참전노병 눈물증언
반 김일성 특수임무유공 활동 계속

▲ 한미 공군 6006특수부대 대북 공작과장을 지낸 김인호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김인호(金仁鎬) 부회장은 올해 아흔둘이지만 철저한 체력관리와 정신력으로 아직도 청장년의 건강이다. 그는 6.25 대북 첩보전 용사로 여러 차례 사선(死線)을 넘어온 대한민국 특수임무 유공자로서 3대째 애국혈통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김 부회장은 죽은 “김일성이 아직도 북에 살아있다”면서 젊은 세대에게 두 번 다시 그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조부·부친 항일혈통, 김일성암살기도 연루

김 부회장은 1926년, 평북 영변 항일운동 가문에서 태어나 반공, 반소운동으로 자랐다가 6.25 첩보전 인생으로 아흔을 넘겼으니 김일성의 남침을 가장 실감나게 증언해 줄 피해자 중의 한 명이다. 그의 고향 영변이란 바로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의 산실이자 김정일, 김정은의 핵무기 개발 근거지다.
김인호의 조부 김용제(金用濟)는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여 평북 일대 각지로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 당했다. 이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유공자이다.
또 부친 김은교(金殷敎)는 항일전선에서 만주로 망명했다가 백범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부인을 시켜 평양에 이화여관을 운영하며 독립투사들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8.15 석 달 전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8.15 당시 김인호는 평양 체신전문학교 재학생으로 계모인 김원희 씨가 투숙객 가운데 숙식비도 안 받고 나중에는 여비까지 보태주는 경우를 목격했다. 알고 보니 모두가 백범의 밀명과 관련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8.15 직후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공산당이 새파란 김일성을 앞세워 항일 애국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1절 기념식을 겨냥, 서울의 반공단체인 백의사(白衣社)가 파견한 김일성 암살단이 김인호 모친이 경영하는 이화여관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사실은 미국의 대북 첩보단 도널드 니콜스 소령이 파견한 공작이었다.
당시 암살단장은 이성열 씨로 나중에 서북청년회 부장과 명동주먹으로 활약한 분이다. 이성열 씨 일행은 준비한대로 김일성의 연설이 끝날 무렵 단상으로 수류탄을 투척했지만 소련군 소위가 몸으로 막아 암살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김인호 등 반공 청년들은 반공, 반소 삐라를 살포하여 난장판을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인호 등 학생들은 무기정학 처벌을 받았다.

▲ 6006부대를 이끌었던 도널드 니콜스 미국 공군중령(오른쪽 끝).

조양단 사건으로 3년형 수형중 6.25

김일성 암살 실패 후 반공 청년들은 비밀조직으로 조양단(朝陽團)을 결성, 반공·반소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공산당에 적발되어 ‘결사 반동죄’로 체포되고 말았다. 공산당은 이 조양단을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특공대가 평양으로 침투하여 학생들을 선동, 조직화 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조양단의 단장, 부단장 등 간부들은 평양 교화소에서의 고문 등으로 옥사하고 3년형을 선고 받은 김인호 씨는 함흥 본궁 특별노무자 수용소로 이감되어 흥남비료공장에서 매일 18시간의 강제노역형을 살았다. 6.25전쟁 발발 소식도 이곳 수용소에서 처음 들었다.
1950년 10월 16일, 북진하던 국군이 함흥에 입성하자 김인호 씨도 석방되고 반공청년들이 치안활동을 맡아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반공청년단은 서둘러 ‘애국지사 시체 발굴위원회’를 구성, 곳곳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발굴, 수습했다. 함흥교화소를 비롯하여 우물, 산속 동굴, 광산, 방공호 등의 시체 1만5천여 구를 수습,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곧이어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을 방문하니 공산치하의 북녘땅이 해방됐다. 이때 함흥시청에서 열린 이 대통령 환영대회에 김인호 씨 등은 반공애국지사 자격으로 특별석에 앉아 이 대통령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무렵 국군은 압록강변까지 진격하여 곧 남북통일이 이룩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모택동의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이로써 반공청년들은 남녘으로 피난하든가 지하로 숨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인호 씨는 모친이 기다리고 있는 평양으로 귀환했다. 한때 국군이 수복했던 평양은 다시 공산당 세상이 되어 지하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인호 씨 등 동지 10여명이 이화여관 지하방공호 속에서 ‘대한민국통일촉진대’를 결성, 반공운동을 재개했다. 여기에 김인호와 외사촌 사이인 강창옥 김일성의대 1년생이 친구 최명신과 함께 가담했다. 알고 보니 강창옥은 미 공군 첩보대장 도널드 니콜스 중령의 비밀 조직원이었다. 미 공군은 1940년대부터 북한에 첩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 공군 첩보부대 공작과장 시절 전우들과 함께. 가운데가 김인호 님.

니콜스의 6006부대 공작과장으로 활약

김인호 씨 일행은 대한민국통일촉진대 운동 끝에 남하하여 니콜스가 지휘하는 6006부대 첩보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김인호 씨는 공군 심문학교 특수요원 양성코스를 거쳐 교동도의 이글부대에 배치됐다.
얼마 뒤 니콜스의 지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국군포로, 공작원, 북한기관원 출신 등 12명을 데리고 귀환하는 공작을 수행했다. 이때 북의 비행장 위치, 국군과 미군 포로수용소 위치와 내부구조, 철도와 도로 수송망 등 정보를 수립, 대북작전용으로 제공했다.
김인호 씨 등이 참여한 니콜스의 6006부대는 한국 공군 20특무전대, 5392부대 등과 한 울타리 안에 소속된 한미 공군의 특수부대로 김인호 씨는 대북 공작과장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소련 스탈린 사망 직후 정전회담에 서명한 후 대북 첩보대의 역할은 갑자기 위축되고 말았다.
정전 성립 후 김일성의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김인호 씨 모친은 15년형을 선고 받아 옥중에서 사망했다. 니콜스의 정보원으로 오랫동안 암약했던 강창옥, 최명신 씨 등은 공개 처형됐다. 김인호 씨 역시 결석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같은 숙청결과는 평양방송과 로동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전 후 남한사회에 정착한 김인호 씨는 ‘사선을 넘어서’, ‘서울로 오는 길’, ‘두고 온 산하’ 등 6.25 첩보원 인생을 기록한 수기를 발간했다. 영화 ‘서울로 가는 길’, 드라마 ‘대동강’ 속에도 그의 첩보인생이 기록되어 있다.
올해 아흔둘의 김인호 부회장은 실록소설 ‘릉라도여관’(2016.6, 경지출판사)을 통해 6.25 첩보인생을 증언하고도 150시간 분량의 녹음증언이 남아 있노라고 말한다. 김 부회장은 실록소설 마무리 대목에 계모인 김원희 씨를 회고했다. 김인호 씨는 생모가 일찍 돌아가 외조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만주로 망명한 부친의 항일투쟁을 뒷바라지하던 김원희 씨가 재혼하여 백범 김구의 밀명을 받은 평양 ‘릉라도여관’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

▲ 1987년 3월 공군 초청으로 방한한 도널드 니콜스. 맨 왼쪽이 공군 첩보부대 공작과장 김인호 님.

6.25 첩보대상 도널드 니콜스 대령

6.25 첩보대상으로 불린 미 공군 6006부대 도널드 니콜스 대령의 첩보전 이야기는 신화에 속할 만큼 드라마틱하다. 그는 세계 2차대전 때부터 첩보전에 참가, 활약했으며 한국에 부임한 후 6.25 전쟁과 정전협정까지 11년간 근속하며 한국인 첩보요원들을 선발, 훈련시켰다.
니콜스의 첩보전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교신 내용을 일일이 도청해 내고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구걸하는 전쟁외교도 모조리 탐독해 냈다. 그는 6.25 남침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국무부 및 백악관에 3차례나 전달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멸공과 북진통일론만 비난할 뿐이었다.
니콜스의 대북 첩보작전은 김일성과 스탈린 진영에서도 탐지하여 그의 목에 암살 현상금을 걸어 최소한 3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반면에 극비생활로 숨겼던 그의 한국인 부인과 아들은 끝내 암살되고 말았다.
그는 정전 이후 본국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아 의회 청문회와 전후 처리반의 반복 조사를 겪었다. 3년간의 각종 조사는 특수활동비와 공작내용에 관한 질타였지만 미 국익 관련 첩보활동에 관한 자료는 무덤까지 간다는 CIA 본연의 원칙으로 대응했다.
지루한 청문회가 끝난 뒤에야 모처럼 CIA 본부에서 초청, “선배님의 빛나는 공적을 찬양하며…”라며 금빛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푸짐한 만찬을 베풀었다. 니콜스는 이제 무거운 짐을 벗고 고향 플로리다로 돌아가 후대를 위해 첩보도서관을 세우고 박물관을 건립하고 회고록을 집필하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는 한국 재임 중 김일성 집무실에서 확보한 진귀한 자료, 중공과 소련 관련 도청자료, 한국의 골동품, 이승만 대통령의 서신 등 수많은 자료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CIA의 해외담당 책임자가 찾아와 “고향으로 귀환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다음 주에 저와 함께 멕시코로 여행하시게 됩니다”라고 통보했다. 그는 “니콜스 대령님의 공적은 미합중국이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잠시 세상과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기자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단 대령님만의 경우가 아니라 모든 CIA 가족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니콜스 씨 역시 이를 이해하고 동의했다.
멕시코에서의 은둔생활은 도널드 니콜스는 사라지고 ‘제임스 모이건’으로 재탄생하여 살았다. 출생지도 플로리다가 아닌 미주리로 바뀌고 계급은 대령 아닌 중령, 근무지는 한국 아닌 베를린으로 바뀌었다. 이는 바로 CIA의 길이었고 운명이었다.
제임스 모이건은 CIA 규칙대로 5년을 살다가 어느 날 프런트 전화를 받고 보니 “모이건 씨, 본명이 니콜스 씨죠”라는데 깜짝 놀랐다. 아차, CIA 규칙을 깜빡 잊고 실수를 했노라고 반성하며 니콜스가 아니라고 극구 변명했다. 그러나 “지난 6년간 끈질긴 추적 끝에 겨우 찾아냈다”면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회고록 집필과 첩보전 영화화에 협조해 달라고 간청하며 거액의 사례비를 제안했다. 영화감독과 실록작가였다.
물론 사절했다. CIA 복무자료는 무덤까지 함께 간다는 원칙을 지켜냈다. 그의 모든 자료는 CIA의 비밀금고 속에 영구 보존됐다.
니콜스 씨는 한국을 떠난지 30년만인 1987년 3월 모처럼 방한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첩보관계로 종종 경무대를 방문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보내준 영문 안부편지에 감사했다. 이 대통령이 망명한 사실은 멕시코 운둔생활 중에 들었다고 했다.
그는 1992년 10월 18일, 고향 플로리다 양로원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니콜스 씨의 첩보작전을 증언한 김인호 씨는 그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의회 청문회와 전후 처리반의 거듭된 조사 및 멕시코 유배 등은 일종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아닐까 싶다고 증언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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