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제재형 전 대한언론인회장

[이코노미톡]

대학, 언론계 큰 선배
김준하님을 그리는 마음
추모의 글, 제재형 전 대한언론인회장


글 / 제재형 한국일보 社友會 회장·전 대한언론인회장

▲ 고 김준하 전 동아일보 기자

원로 언론인 김준하(金準河) 선배가 지난 1월 16일 밤 9시 40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나의 대학 선배이자 언론계도 선배이시다. 1930년 3월 6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김 선배는 정확히 31,748일 동안 파란곡절의 이승을 살다가 질병과 고통과 사망이 없는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인 이재덕(84) 권사님, 아들 김명환(58) 재미 사업가, 딸 김소현(57) MBC 부국장 등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속기사’ 수준의 속필로 기사작성

김 선배는 동아일보 정치부 민완기자였다. 그 시절 백광하(白光河) 선배가 고사성어 춤추는 ‘단상단하’ 가십을 쓰고 김 선배는 국회, 정당 움직임을 취재했으며 필자는 1957년부터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했다.
한국일보는 이형(李馨) 선배가 ‘시시비비’ ‘정국왕래’ 등 조석간 가십을 쓰며 정치기사 테스크를 맡고 필자는 이원홍(李元洪) 선배 따라 국회, 정당을 취재했다.
이 무렵 동아일보 김 선배와는 회사가 달랐지만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 일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2층 방청석 양쪽 끝 앞자리에 기자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기자가 나란히 앉아 취재하고 기사를 쓴 것이다.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곁눈질로 보면 김 선배는 ‘속기사’라 할 만큼 빨리 기사를 작성했다. 두 번 다시 읽어볼 새도 없이 원고지에 기사를 쓰는 대로 후배기자가 이를 갖고 길 건너 동아일보로 뛰어갔다.
이때 필자는 김 선배에게서 기사를 빨리 쓰는 속필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한국일보사 고민은 따로 있었다. 이른 바 ‘다찌끼리’(내리다지로 긴 해설기사)는 전화통에 대고 부를 수도 없고 자동차 편도 구할 수 없어 종종 중학동 14번지 한국일보 사옥까지 2km를 헐레벌떡 뛰어 마감시감에 맞춰야 하는 고통이었다.

‘24파동’ 취재 오찬멤버 추억

195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국회의사당은 의장의 경호권 발동에 따라 무술경위 300명의 포위 아래 야당의원들이 밖으로 끌려 나간 사이에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새해 예산안이 자유당의원 만으로 통과됐다. 이를 일컬어 ‘24파동’이라 했다.
당시 국회에 불려 나온 김일환 내무부 장관에게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가 입을 꽉 다물고 두 눈으로 쏘아보는 눈총사격 장면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역사의 현장에서 취재했던 기자들이 매달 24일 12시에 모여 밥 먹고 회고담 나누기를 60년 가까이 계속해 왔다.
‘24회 오찬’은 처음 20여명이 모였으나 세월 따라 하나둘씩 줄어들더니 최근엔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이형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준하 선배 등 겨우 네 사람이 모여 추억담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었다. 자유당 정권 12년의 그림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정권 연장의 망상에서 3.15 부정선거를 교사했던 박마리아(만송 이기붕 자유당 부총재 부인)의 치맛바람을 증언할 증인들이 거의 눈을 감고 입을 다무니 인생무상이로다.
홍안 청년 기자가 망구(望九)의 노옹이 되어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고장 없는 유수세월을 곱씹게 되니 만감이 교차한다.

4.19 후 윤보선 대통령 공보비서관

4.19 학생혁명 후 김준하 선배는 민주당 구파인 해위 윤보선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비서관으로 옮겼다. 이 무렵 하루 450건씩 일어나는 데모만능 세태 속에서 신구파로 나눠 정쟁만 일삼다가 5.16 군사 쿠데타를 맞아 내각책임제인 장면(張勉) 정권은 9개월 만에 붕괴되고 만다.
이 같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김 선배는 무척이나 바빴다.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군사정변의 선후책을 논의한 스토리, 성북동 수녀원에 잠적한 장면 총리와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청와대를 방문한 박정희 소장과 현석호 국방장관과의 3자 회담, 비상계엄령 선포를 재가해 달라는 쿠데타군 측의 강요에 대처하는 윤 대통령의 결단, “올 것이 왔다”라고 말했다는 말의 진위 등등 역사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스토리는 침을 튀기며 밤새껏 털어놔도 끝날 줄을 몰랐다.
그 뒤 김 선배는 지역적 연고로 동부그룹 계열사 대표직을 여러 해 맡았다. 마침내 1993년에는 춘천에서 발행되는 강원일보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앉아 지역신문의 특성을 살리며 강원도 대변지로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 무렵 필자가 “김 선배님, 고대 졸업장을 받으셔야죠”라고 청했더니 “그럴까”라고 응답했다.
김 선배는 고대 정외과 50학번 4학년 1학기에 동아일보 기자가 되고 6.25 전쟁 통에 기자로 뛰느라고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소정의 절차를 거쳐 고대총장으로부터 때늦은 명예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필자가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김 선배를 원로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때 언론재단이 마련한 명화감상이나 문화탐방에도 부부동반으로 참여했다. 온누리교회 명예권사인 부인 이재덕 여사와 명예집사인 김 선배는 만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실버 아카데미 세미나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최근엔 박종렬 목사가 한남동 유엔 빌리지 언저리에 개척한 ‘조이어스교회’를 섬기며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지난 연말 언론인 송년회 때는 “장로님, 잘 지도해 주세요”하시길래 “김 집사님, 천국으로 가실 겁니다”라고 마지막 대화를 했었다.
고인은 자다가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뇌출혈 증상을 보여 119 구급대 편으로 입원했으나 “연명치료 하지 말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입원 18시간 만에 가족들의 찬송가를 들으며 하늘나라 하나님 품에 안겨 가셨다고 한다.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0호 (201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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