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경란, 21명 천사들의 감동이야기
고통· 눈물의 타향살이, 지금은 추억

가족과 조국을 위해 떠난
나는 파독 간호사…
글 박경란, 21명 천사들의 감동이야기
고통· 눈물의 타향살이, 지금은 추억

▲ ▲‘나는 파독 간호사입니다’ -박경란 著

나라가 가난할 때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간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감동이며 잊을 수 없는 조국 근대화의 역사이다. 박경란 씨의 글로 21명의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역은 ‘나는 파독 간호사입니다’(2016.11, 도서출판 정한책방)가 그때 그 시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지금은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묘사하여 증언해 준다.

고향의 꿈 속… 9남매 시끌벅적 추억

1970년 7월, 여고 졸업생 이묵순(현 66세) 처녀는 주사기 한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돈 벌려고 파독 간호사를 지원했다. 낯선 타국 이역만리 베를린 노이퀄른 병원에서 서툰 독일어 스트레스 받아가며 청소도 하고 환자들 대소변도 처리해 가면서 천사처럼 일했다.
당시 이묵순은 갓 20세, 키 165cm의 아담한 동양계 처녀인 반면 그녀가 돌보는 독일인 환자들은 몸집이 코끼리만큼 육중하여 외과병동 20년 근속 중에 허리 디스크를 앓았다. 그러나 이묵순은 천성이 쾌활하여 현지에 적응하며 주말이면 춤 클럽 가서 근육긴장을 풀고 2년만에 파독 간호사 중 가장 먼저 승용차를 구입, 휴가 때면 로마와 스페인 여행도 다녀오곤 했다.
파독 5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니 모친이 막내 여동생을 출산하여 9남매가 시끌벅적하게 살고 있어 이미 서구적 삶에 익숙한 자신은 독일땅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하여 개인연금 수령액 9천 마르크를 부모님께 바치고 돌아갔다. 귀국하니 같은 병원서 근무하는 독일인 남자 간호사 J가 반겨 깊은 사랑에 빠졌다. 당시 J는 연예인처럼 어찌나 잘 생겼는지 이묵순이 홀딱 빠졌지만 같이 근무하던 한국 간호사들도 많이 울렸다.
그렇지만 이묵순이 모두를 따돌리고 그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 지금은 오래 살다 보니 배도 나오고 형편이 없지만… 때론 고향의 꿈속에 젖어 고향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그리워 눈물짓는다고 회상한다.

가족을 위해… 남동생 독일유학 초청

김금선(66) 씨는 대구간호전문 나와 울산 기독병원에서 근무하다 1976년 파독 간호사 모집 막차에 응모하여 합격했다. 독일 병원에서 40년간 근속하며 정년을 맞기까지 고국의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헌신했다. 김금선 씨는 선천성 소아마비인 남동생을 독일로 초청, 베를린 공대 천문학 박사로 길러냈다.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김용기 교수가 바로 그녀의 동생으로 연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독일로 유학했다.
김금선 씨는 지역신문에 “신랑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내어 부동산 업종에 종사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결혼계약서를 작성했다. 첫째, 남동생의 독일유학을 지원한다. 둘째, 월급을 한국에 송금한다. 셋째, 한국무용 보급에 적극 협조한다 등 3가지 조건을 명시했다.
무용에 취미와 특기를 지닌 김금선 씨는 1983년 베를린 간호협회의 가야무용단 초대 단장을 지내고 2012년에는 무용 30년 결산 ‘바람 속에 핀 꽃’ 발표회를 가졌다. 또 2013년에는 베를린간호협회 26대 회장으로 선출되고 극단 ‘빨간구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한때 갑상선암을 수술하고 항암치료도 받았지만 지금은 한국무용이 항암치료제라고 확신한다.
만화방집 큰 딸 김은숙(64) 씨도 파독 간호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남동생을 초청, 베를린 자유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미담을 남겼다.
김은숙 씨는 1970년 18세 처녀로 파독되어 매월 월급 가운데 50 마르크만 남기고 몽땅 부모님께 송금한 효녀였다. 그러나 늘 한국음식이 생각나 된장, 고추장, 마늘장아찌를 사먹다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어느날 안과수술실 의사가 마을장아찌 냄새에 코를 막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야단 쳐 기숙사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이 때문에 결국 병원을 옮겼지만 안과수술실에서만 40년을 근속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는 이의 조언으로 영화 엑스트라 출연으로 새로운 인생을 누리며 만족한다.

동독출신 남편만나 군사형무소 5년

1970년에 파독된 장현자(65) 씨는 동독 출신과 결혼하여 동독 형무소에서 5년이나 수감된 특이한 악몽을 겪었다. 순천간호학교를 나와 고대병원에서 근무하다 파독 지원한 장현자 씨는 베를린 시청에 갔다가 동독 출신 공무원을 만나 1973년 4월 결혼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뒤 동독으로 시어머니께 인사 갔다가 체포되어 군사형무소에 수감됐다. 알고 보니 남편이 프랑스와 서독정부를 위해 정치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씨 부부가 간첩혐의로 수감됐지만 한국정부는 동독과 미수교로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5년이 지나서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여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드러나 장씨 부부와 교환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서독정부는 장씨 부부를 영웅처럼 환영했다. 병원 복직은 물론 5년간의 손해배상금도 지급하고 6개월의 보상휴가로 세계일주 여행도 다녀왔다. 지금은 은퇴 후 고교 교사인 딸과 대학교수인 사위와 함께 손자 손녀들을 돌보며 가족사랑으로 노후를 보낸다.
박화자(71) 씨는 간호장교로 진해 해군병원, 미군병원 등을 거쳐 전역한 후 파독 간호사로 지원한 경우이다. 파독 직전 고향 충북 제천에서 한국무용과 부채춤을 익혀 한류문화의 전파를 준비했다. 파독 첫해 근무하던 병동 크리스마스 파티 때 부채춤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주말이면 춤 클럽을 찾아다니다가 독일 남성 형제로부터 열렬한 프러포즈를 받아 그 중 한명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화목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후유증을 호소하며 이혼을 요구하여 결혼 16년만에 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무용과 부채춤으로 노후의 건강 삶을 누리고 있다.
대구 동산간호학교 출신인 박말숙(64) 씨도 한국무용과 우리가곡을 사랑하고 전파하는 노후 삶을 즐긴다. 박말숙 씨는 파티서 만난 독일인 남편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룩하여 나이 50이 넘어 야간고를 거쳐 베를린 자유대학에 진학하여 중국어를 배우고 한국무용단에 가입, 열심히 춤추고 한국합창단에서 우리가곡을 마음껏 부른다.

도전과 성취후 지금은 고향 그리움

노미자(73) 간호사는 기혼녀로 남편 몰래 파독 지원하여 1969년부터 2004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정년을 맞았다. 노미자 씨는 간호학교를 나와 거문도 면사무소를 거쳐 여수 돌산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0대 1의 경쟁률을 보인 파독 간호사 모집에 응모하여 합격했다.
그러나 남편이 반대하여 독일로 온 후 합의이혼하고 딸을 초청, 진학시켜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후 프랑스 남성과 결혼, 딸 둘을 낳고 살고 있다. 그 사이 노미자 씨도 독일 남성을 만나 재혼한 후 재독 한인간호협회 회장을 지내고 2016년에는 파독간호사 5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맡았다.
박애자(71) 씨는 1966년 파도 간호사 제1호로 파독되어 외과 중환자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면서 허리 디스크로 지난 2000년에 조기 퇴직했지만 요즘도 병원 가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고 호소하면서도 나이 들고 보니 생각나는 것은 고향뿐이라고 한다.
박덕순(65) 씨는 파독 3년만에 베를린 국립음악대에 합격하여 음악공부와 간호사 일을 다 했으며 합창단에서 남편을 만나 소프라노 박덕순 독창회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안영임(77) 씨의 경우 미국 가고 싶어 간호사가 되어 1966년 파독되어 신생아실, 내과병동 근무 중 파독광부 출신의 남편을 만나 정치학 박사로 성공시키고 1988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남편이 고향을 그리워해 2년마다 한국을 방문한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민자(70) 씨는 8.15 후 부모님 고향 경북 성주로 귀국하여 경북대 간호학과 졸업 후 파독되어 이비인후과 의사가 된 경우이다. 이민자 씨는 파독 직후 병원당국의 배려로 독일어를 공부하고 이비인후과 박사로 의사의 꿈을 실현하여 베를린 종합병원을 거쳐 1985년 개인병원을 개업, 2011년 정년까지 활동했다.

향수 달래며 사랑하며 가정이룩

스튜어디스가 꿈이던 정유선(70) 씨는 간호보조사로 파독되어 열심히 일하면서 문학지망생인 한국유학생과 사랑에 빠졌지만 남자가 귀국하고 딸 하나만 남겼다. 정유선 씨는 그로부터 30년간 독신으로 지냈지만 딸이 성장하여 독일 항공사에 취업하여 자신의 꿈을 대신 성취했노라고 자위한다.
1970년 20세 처녀로 파독된 윤승희(66) 씨는 베를린 공대 IT 박사 남편을 만나 1977년 아들 낳고 전업주부로 살아온 특별한 경우이다. 1974년 파독 이영숙(69) 씨는 파독광부 출신 박씨와 결혼, 임신 9개월일 때 33세 남편이 암으로 사망하는 불행을 겪고 그 뒤 재혼하여 신앙생활로 노후를 보낸다.
한도순(67) 씨는 22세에 파독되어 내과, 정신병동 등에서 근무조건 가리지 않고 야간근무도 기피하지 않고 일하다가 1978년 지멘스사에 근무하는 남편을 만나 정년을 거쳐 화목과 해로를 누리고 있다.
안덕래(66) 씨는 1971년 하노버 인근 마을병원 응급실에서부터 시작하여 파독광부 출신 남편 만나 1984년 귀국했다가 사업실패로 다시 독일로 가 양로원 등 1인 3역하며 중풍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살피고 있다.
정광수(65) 씨는 산부인과 수술실, 내시경 관리실, 심장내과 등을 거쳐 정년을 맞았다. 남편은 베를린 공대생이던 우간다 청년을 지하철에서 만나 아들을 낳았지만 1986년 부부가 우간다 에이즈 퇴치운동 벌이다가 남편이 심장마비로 이별했다.
‘나는 파독 간호사…’ 지은이 박경란 씨는 독일에서 이민사회 롤 모델인 한국인, 그 중 파독 간호사였던 한국여성들의 삶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여성사에서도 기록할 가치가 크다고 말한다. 한 시대 여성들의 가치관은 당시 민초들의 삶의 기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당시 독일에 온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사회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았지만 근간은 고국을 향하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언제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그들의 내면에서 꿈틀거려 독일사회를 견뎌내는 모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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