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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핵개발 정책] 극비 친정사업 강력도전문서, 지시서명 없지만 체계적 추진
자주국방신념, 세계 원전강국 기반
  •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 승인 2016.12.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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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핵개발 정책
극비 친정사업 강력도전
문서, 지시서명 없지만 체계적 추진
자주국방신념, 세계 원전강국 기반

 

글/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 1978년 7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해 시찰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월간 조선과 박정희기념재단 주최 시민강좌를 참관하면서 1970년대 청와대서 핵개발 정책에 실무자로 참여한 감상이 떠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정책은 손수 추진해온 ‘친정사업’의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청와대 경제 2비서실에서 담당했다. 당시 오원철 수석비서관은 8년 6개월간 박 대통령의 야전 사령관으로 지휘 감독했다면 필자는 담당비서관으로 문서기안에서 보고서 작성까지 실무를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원칙

박정희 대통령의 친정사업 중 핵개발 계획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취급한 최대의 비밀사업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이 빈번해지자 단편적으로 박정희의 핵개발 계획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수석으로 핵개발 책임자인 오원철 수석이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원칙을 공개한바 있다.
1972년 9월에 작성된 보고서로서 필자가 기안하였으며 오원철 수석이 보고관으로 되어 있고 대통령의 서명란에 오수석이 보고필(9월 8일)로 되어 있는 2급 비밀 문서였다. 
보고서를 만들 때 원자력 연구소(KAERI) 부소장이었던 현경호 박사가 작성하여 온 문건을 참고하였으며 대통령 비서실 용지에 보고서 양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현 박사가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 때 까지 청와대(오수석)에 서너번 왔다갔다 했으며 현박사의 문서는 필자가 보고서를 작성한 후 파기했으며 도면 한 장이 있었는데 보고서의 보조 문서로 보충설명자료로 만든 것인데 필자가 보관하여 오다가 분실했다.
이것은 평범한 원자력 발전과 핵개발을 설명하는 공정도였다. 이 핵개발 보고서는 지금은 비밀 문서도 아니고 일반에게 단편적으로 공개된 사항이므로 그 요지만을 적어본다.

제목 : 원자력 핵연료 개발계획
원자핵 연료사업은 별첨 보고서류의 결론에 의거 추진할 것을 건의 드립니다.

<결론>
1. 우리나라 기술 수준 및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 탄을 개발한다.
2. 1973년 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 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핵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철저한 기초작업을 수행한다.
1974년 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3. 원자력 연구소는 상기 목적에 맞도록 개편 보강한다.
  가. 해외 거주 원자력 한국인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함
  나. 기술자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되 반드시 전문훈련을 받도록 함
  다. 현재의 실험 원자로 및 기타 시설은 원자력 전공 대학생의 교육훈련용으로 50%이상을 할애함
  라. 원자력을 전공코자 하는 대학생 전원에 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며 원자력 연구소에서 실기교육을 받고 졸업후 핵연료사업에 종사토록 함
상기 핵연료 개발 계획이 내각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공문으로 발송되지 않았다.
오원철 수석이 과기처장관(최형섭)에게 알리고 원자력 연구소장(윤용구)을 불러서 개발계획의 내용을 알렸다. 문서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원자력 연구소가 맡아서 추진토록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연료 개발계획은 43년이 지난 지금 핵개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이나 핵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등의 내용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둔다.
(오원철 수석 인터뷰기록에 의하면 이 보고서 원본은 행방불명이라고 함)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기술 획득 교섭

▲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식 행사에서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원자핵개발 노력은 73년 9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핵개발원칙 수립을 보고한 이후에 KAERI가 자체 사업으로 추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원자핵 개발을 위한 방향은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에 의한 플루토늄 추출에 있으므로 연구소는 필사적으로 교섭하였다. 일부에서는 72년 부터 시작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이것은 과기처장관(최형섭)이 구라파 각 국과의 연구개발 협조를 위하여 프랑스를 순방하여 상고방(Saint Gobain)사를 만나 재처리 기술이 있음을 알고 KIST(양재현 부소장)에게 재처리 기술 도입을 검토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KIST에서는 팀(윤창구박사)을 만들었으나 재처리를 운운할 때가 아니었으므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KAERI는 접촉이 쉬웠던 미국의 재처리 기술보유회사 중 Nuclear Service와 Getty Oil사와 교섭하였다. 73년 말에 게티사와는 계약단계까지 들어갔는데 73년 말 미국의 상하원에서 통과된 원자력 협정에 따라 미국에서의 미국의 재처리 기술은 얻을 수 없게 되어 게티오일 사와의 협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병휘, 임동규 회고록)
74년 5월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으로 미국은 원자력의 핵확산에 대하여 강경 자세로 돌변하였다.
그래서 오로지 가능한 곳은 프랑스의 상고방(SGN)사였다.
KAERI는 주재양 부소장이 중심이 되어 교섭하여 1975년 1월에 프랑스의 CERCA사와 핵연료시설공급계약을, SGN사와는 핵연료재처리 건설 용역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교섭에는 한국이 건설하는 원전에 프랑스의 프라마톰사를 특별 고려한다는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교섭은 극비로 진행하였지만 국제간 계약이기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측에서 IAEA에 보고하고 IAEA가 미국에 이 사실을 알려줬다.
미국 정부(포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한 이래 핵확산 금지에 대하여는 강경하였다.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국 대사인 스나이더 대사를 통하여 반대하여 오다가 75년 한국의 프랑스 핵연료 처리계획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란 공문으로 공식 항의하였다. 국무총리, 과기처장관 비서실장 모두를 방문하여 미국정부의 방침은 한국이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약 2억 불 상당의 고리 2호기 건설 차관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 기타 경제개발 사업도 재검토하ㅤㄱㅖ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 보다는 경제건설을 택했다. 이로서 프랑스와의 재처리 기술은 75년 하반기부터 공백상태에 들어갔으며 76년 1월 23일 정식으로 계약 파기했다. 미국의 Washington Post지에서도 1월 30일 "한국은 핵개발을 포기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어느 정권도 핵개발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상업용 목적으로의 재처리를 위하여 미국과 교섭하여 왔으나 핵폭탄을 만들 우려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되어 지금까지 왔다. 현재 4개의 원전지역에는 사용후 핵연료를 저장할 수 없을 정도로 까지 왔다.
KAERI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플루토늄 추출을 할 수 없는 Pyroprocessing(열처리)을 미국과 합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핵원료로서의 우라늄 획득노력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우라늄은 전량 수입하고 있으며 통제되고 있다.
따라서 수입되는 우라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용이하지 않다. 이리하여 한국지질광물연구소로 하여금 국내에서의 우라늄매장 가능성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는 충북 괴산에 순도 0.07%의 우라늄이 고작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76(?)년대 중반에 KIST(윤창구박사)가 비료생산용으로 수입하는 인광석에 우라늄이 포함되고 있음을 알고  우라늄 농축 기초단계로서 불소화합물인 Yellow  Cake를 만들었다. 박 대통령께도 실물을 보여드렸다.  윤 박사는 거룩한 업적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 했는데  그 때의 과로와 방사선이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도 있다.   월성의 원전을 중수로로 택한 이유중의 하나가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므로 원료면에서 천연우라늄 획득이 쉬울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 1962년 박정희 의장이 원자력원 상황보고를 청취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월성 원전 중수로로 결정

사용 후 핵원료를 재처리하여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추출함에 있어서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는 중수로에서 고순위의 플루토늄이 생산 가능하다는 보고서가 있었다. 일본 등 기타 국가에서도 중수로에서 나오는 핵연료를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고리2호기 다음에 짓는 월성 원전을 KAERI와 한전의 합의하에 캐나다형 중수로인 CANDU로 하였다. 그런데 미국 정부 당국에서 반대했으나 한전은 원전기술의 다변화, 원료획득의 용이성을 고려 CANDU로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미국측에 양해를 구하고 우리의 계획을 관철시켰다. 결정될 때까지 KEARI와 한전의 기술진이 캐나다에 출장 조사도 했다.
확신에 확신을 위하여 오원철 수석과 필자는 중수로와는 별도로 원유생산(Oil Sand)과 동광석생산 조사라는 명목하에 캐나다에 출장하여 중수로의 운전상황을 확인한 바도 있다. 현재 월성에는 초기에 핵개발을 목적으로 건설된 중수로 원전이 4개 있다.
이를 제외한 한국의 모든 원전은 가압 경수로형이다. 이유는 농축하지 않은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다보니 사용 후 핵연료가 많이 나오는데 있다.

조직체로서 핵연료공단 설립

핵개발 계획은 KAERI를 중심으로 하여 극비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KAERI는  자체 고유 업무 등이 있어 비밀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더 큰 이유는 핵개발의 조직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원전에 사용되는 핵연료를 국내에서 만들어 원전에서 사용토록 하는 핵연료 공단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여기에 부수적으로 핵개발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KAERI가 하던 핵개발계획을 이 공단이 인수하였다. KAERI에서 핵개발을 담당하던 부소장이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핵연료 재처리도 여기서 담당하였다. 그때의 설립목적인 핵연료봉 생산은 아직도 이 공단에서 하고 있으나 핵개발업무는 프랑스와의 계약이 파기되고 박대통령의 서거로 전두환 정권의 횡포에 의해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대통령의 핵개발 추진의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에 관한 문건에 서명한 적도 없고 지시한 적도 없지만 진행상황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오원철수석이 기회 있을 때마다 보고 드렸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철칙과 다름없는 핵개발 원칙을 수립하고 관계기관은 여기에 따라 움직였다. 기술획득, 원료조달, 조직체 그리고 인력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했다. 전두환 정권의 몰이해로 미국이 반대했던 방위산업, 미사일개발 그리고 핵개발 연구기관 등 조직체를 해체시키고 기술인력을 퇴출시켰고 핵개발을 담당하던 핵연료공단은 없어지고 원자력연구소와 합쳐 에너지연구소가 되었다.

▲ 필자 김광모(전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방위산업을 담당하던 국방과학연구소는 약 800명의 인원이 퇴출되고 미사일 연구기관인 대전기계창은 이슬로 사라졌다. 만약 이런 핵개발 학살조치가 없었더라면 기술인력과 기구 그리고 프랑스로 받은 기술자료 등을 보유하고 있었을 테니까 일부 평론가들이 예측하는 대로 6개월 내지 1년내 에 핵을 생산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반대로 핵개발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힘을 기울인 원자력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제 5위의 원자력 강국이 되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기사입니다]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econotalk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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