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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칼럼] 이 난국에 다시 읽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인생의 길잡이 되는 국민필독서
  •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 승인 2016.12.0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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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국에 다시 읽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인생의 길잡이 되는 국민필독서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12월 17일(음력 11월 19일)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마지막 노량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순국한 날이다. 그동안 해마다 4월 28일 장군의 탄신일에는 떠들썩하게 기념행사를 치렀지만 정작 뜻 깊은 순국일은 그냥 지나쳐버린 듯해 아쉬운 점이 컸다. 올해 418주기를 맞아 장군의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깊은 뜻을 거듭 되새겨본다.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순신의 '난중일기'. <사진출처=문화재청, 퍼블릭도메인>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불타는 애국심

- 정유년 9월 15일 계묘.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하여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다짐을 받았다.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정유년은 선조 30년(1597)이고 음력 9월 15일은 명량해전 바로 전날이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 임인년 정월 초하루부터 공이 순국한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 무술년 11월 17일까지의 기록이다. <난중일기> 초고본은 모두 8책으로 국보 7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이따금 날짜를 건너뛴 부분도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기록된 전쟁일기로서,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은 물론, 인간 이순신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선의 하루하루,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왜적 함대와의 전투 등 전쟁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나라와 겨레의 참상을 걱정하는 불타는 애국심, 팔순 노모의 안위를 염려하는 지극한 효성심, 부하 장졸을 때로는 너그럽게 포용하고 때로는 엄하게 다스리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추호도 사심 없는 신상필벌의 자세 등 지도자가 갖춰야 할 탁월한 통솔력까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일생 고난 속 충효, 애국애민 정신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직도 <난중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국난극복의 생생한 교과서요 국민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난중일기>를 꼭 읽도록 권한다. 이순신의 뜨거운 나라와 겨레 사랑, 지극한 효심을 되새겨 본받고, 오늘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의지와 용기와 지혜를 얻자는 뜻에서다.
이순신은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았던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인의와 애국애민정신으로 일관한 우리 민족사의 대표적 위인이다. 전쟁에 임해서는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전술로 백전백승한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그는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고귀한 한 목숨을 바칠 때까지 지극한 충성심으로 헌신했고, 극진한 효심과 자애로움을 다했으며, 부하들은 너그럽게 감싸주고 창의력을 길러주며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해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이순신은 인종 1년(1545) 3월 8일(양력 4월 28일)에 서울 남산 기슭 건천동에서 가난한 선비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건천동은 지금 중구 인현동1가의 한가운데이고, 그 이웃은 오늘의 필동2가인데 그 동네에선 이순신보다 세 살 위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자라고 있었다.
이순신이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은 가세가 곤궁하여 현재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현충사 자리에 있던 처가로 낙향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8세부터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으니 아산은 그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형을 따라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으나 이순신의 꿈은 어려서부터 장수가 되는 것이었다. 20세 때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고, 선조 9년(1576)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니 그해에 32세였다. 훈련원의 미관말직부터 시작하여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근무하던 이순신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성품 때문에 시기와 모함도 많이 당했고 파면과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예나 이제나 재주라고는 남을 헐뜯고 시기하는 소인배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비로소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줄여서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선조 24년(1591) 2월. 임진왜란 14개월 전이었다.

철저한 준비로 제해권 장악 연전연승

그 이듬해 4월 14일,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마침내 조선침략을 시작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데다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쳐들어온 왜군은 20여 만 명, 700여 척의 전함과 1만여 명의 수군은 별도였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없이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했고, 5월 17일에 급보를 받은 조정은 당대의 명장이라는 이일과 신립을 보냈으나 대패했다. 선조와 조정은 급히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 6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13일에는 평양마저 점령당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만은 달랐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부터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화포와 화약, 군량을 비축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그 해 5월 7일부터 시작된 옥포해전, 5월 29일부터 시작된 당포해전, 7월 8일의 한산대첩, 9월 초의 부산포해전 등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하는 대승을 거두고 80% 이상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순신이 조선수군의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은 1593년 8월, 49세 때였다. 그러나 명나라까지 끼어든 강화회담으로 전황은 소강상태에 빠져 있다가, 4년 뒤인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직후 이순신은 왜군의 간계에 말려든 멍청한 조정에 의해 임금을 속이고 싸우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파직당하고 서울로 잡혀 올라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목숨만은 건져 의금부에서 풀려났지만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등병으로 강등당한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끌려 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순천에 피란 갔던 83세의 노모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왔다.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으나 조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떠났다.
그 사이, 후임 통제사 자리에 올랐던 원균(元均)이 7월 14일에 칠천량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이순신이 피땀 흘려 육성한 조선수군이 하루아침에 궤멸해버린 것이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불타고 부서지고 남은 배는 겨우 12척, 그리고 9명의 장교와 그보다 적은 6명의 병사뿐이었다. 겨우 120명의 군사와 무기를 수습했더니 조정은 바다를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했다.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를 담은 장계를 올렸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회진포에 도착하여 남은 12척의 배에 새로 1척을 보태 조선수군을 재건했다. 그리고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한 뒤 진도와 해남 사이의 물목인 울돌목(명량해협)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필승의 작전을 구상한다.
그해 음력 9월 16일 울돌목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무후무한 바다의 대 혈전이 벌어졌다. 왜적은 133척의 대함대인 반면 조선수군은 겨우 13척, 게다가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졸들의 사기도 엉망이었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들을 뚫고 손수 활을 쏘고 영기(令旗)를 휘두르며 독전했다. 죽음을 무릅쓴 이 같은 악전고투 끝에 적의 대장선을 비롯해 왜선 31척을 격침하자 남은 적함은 뱃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참으로 기적적인 대승이었다. 이로써 울돌목을 거쳐 서해로 북상, 서울을 포위하려던 왜군의 기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재기의 발판을 더욱 튼튼히 다져 임진왜란 승리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일시 고군산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격전의 피로가 쌓여 여러 날을 앓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산 본가에서 21세의 막내아들 면이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본가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비보를 받는다.
그는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양력 12월 16일,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적탄에 맞아 장렬히 순국했다. 뒷날 그가 일부러 갑옷을 입지 않아 자청하다시피 적탄을 맞았기에 자살설도 나왔지만 근거가 불분명하니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민족사가 시작된 이래 숱한 외침을 당했고, 구국의 영웅도 많았지만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그 많은 영웅호걸 충신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민족의 구세주였고, 참다운 인간의 길, 충효정신을 목숨을 바쳐가며 보여주고 간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기사입니다]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teuss@econotalki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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