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닐, 앤 새비지

[DVD로 만나는 명작 영화(26)]


우회(Detour)
1945년 미국 작품, 에드가 G 울머 감독
톰 닐, 앤 새비지


글/ 박윤행 전KBS PD, 파리특파원, 경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역임

1940년대 미국에서는 급격하게 줄어든 영화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한번 영화관에 입장하면 두 편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동시상영이란 제도를 도입하여, 많은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 한편과 저렴한 제작비를 들인 영화, 속칭 B급 영화 한편을 동시에 상영하였다.

▲ 영화 '우회' 포스터.

이 B급영화들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B급 배우들을 써서 짧은 시간 안에 제작을 완료하여야 했는데, 그 주된 장르는 서부극, 범죄물, 가정극 이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대부분 무명의 신출내기 감독을 기용하였는데, 이 B급영화 중에 후일 걸작으로 인정되어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된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우회>이다.
톰 닐이나 앤 새비지는 그 후 어떤 영화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못한 B급 배우였지만, 독일의 명감독 프리츠 랑 의 조감독이었던 에드거 G 울머는 탁월했다.

어두운 밤. 히치 하이커였던 한 남자가 도로변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다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자 “제발 꺼져줘.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하지 말랬어”
퉁명스레 대꾸하는 그의 눈에 조명이 맞춰지고, 배경이 어두워지면서 그는 회상으로 빠져든다. 영화는 그의 나레이션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뭔가 잊고 싶은 적 없소? 당신 기억의 일부를 잘라내고 싶은 적 없소? 아무리 발버둥 처도 잊고 살 수가 없지. 잊고 살다가도 그 추억의 냄새가 살짝 나기만 하면, 다시 기억이 나고 말지”
잊고 싶은 과거를 갖고 있는 그는, ‘앨 로버츠’는 뉴욕 변두리의 작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피아니스트로 가수 ‘수’와는 연인 사이였다. 나름 피아노연주에 재능도 있었다.
“당신은 언젠가 성공해서 카네기 홀을 제집처럼 드나 들 거에요”라는 수의 말에 “잡역부로?” 하고 대꾸할 정도로 그는 매사에 냉소적이다.
성공을 위해 수는 할리우드로 떠나고, 손님에게서 10달러의 팁을 받은 그는 “이게 뭔가? 세균으로 득실대는 종이조각 아닌가”하며 갑자기 수를 찾아 L.A로 떠난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몇 번 남의 차를 얻어 탄 끝에, 애리조나에서 고급 컨버러블을 운전하는 한 남자가 그를 태운다.
이따금씩 약을 꺼내 먹는 그의 손등엔 세 갈래 할퀸 상처가 나있다. “어떤 년이 갈퀴를 갖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내리라고 했지요”

▲ 알 로버츠 역의 톰닐(오른쪽)과 베라 역의 앤 세비지(좌측). <사진=필자 캡쳐>

그는 도로변 식당에서 앨에게 저녁을 산다. “나는 마권업자 ‘해스켈’이요. 15년 전에 사고를 치고 집을 나왔지요”
이제 L.A는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수’를 만날 것이다.
잠든 해스켈을 대신하여 운전하고 가면서, 앨은 성공한 수를 상상하며 흐뭇해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차 지붕을 씌우려고 차를 멈추고 해스켈을 깨우니 그는 이미 죽어있다.
당황한 앨은 경찰이 돈 때문에 자신이 해스켈을 살해했다고 생각할거라고 속단 한다. “웃기지 말라고 하겠지 그들이 내말을 믿겠어?” 그는 L.A에 가기 위해 차가 필요했고, 기름을 넣기 위한 돈이 필요했고, 차의 등록증과 증명서가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그의 옷까지 빌려 입어야 했다.
앨은 이제 해스켈의 행세를 한다. “앞 유리를 따라 흐르는 비는 눈물 같았어. 지금까지는 순조로웠지만, 그때부터 다른 게 끼어들어 당초 가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나를 이끄는 거야” 모텔에서 잠을 자면서 그는 악몽에 시달린다.
“해스켈 죽지마”
주유소에서 앨은 히치하이크를 하려는 한 여자를 태운다.
“너무 생생해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자연미인”
잠들었던 여인이 갑자기 눈을 뜨고 정색을 하며 그를 노려본다. “그 사람 시체는 어디다 버렸지? 이차 주인은 어딨어?”
영화를 보던 나도 놀랐으니 앨은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 심장이 멎는 듯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거다.
“이차는 해스켈이란 사람 차야. 그리고 당신은 해스켈이 아니야. 나는 루이지애나부터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왔었어”
앨은 이 여자가 갈퀴를 가진 여자, 즉 헤스켈의 차를 탔다가 그의 손등을 할퀸 여자임을 깨닫는다. 그가 모텔에서 잠든 사이 그녀가 그를 지나쳤던 것이다.
“세상엔 여자들도 많은데. 루스. 엘렌. 메어리. 이블린 일수도 있는데.. 그런데 하필 그녀를 만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야 인생이 그렇더군”
앨은 자초지종을 얘기하지만, 그 여자 ‘베라’는 코웃음을 친다. “내 생전 그렇게 황당한 거짓말은 처음 듣겠네. 그자가 저절로 죽었다고?”
앨은 꼼짝없이 베라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호텔방에서 베라가 심하게 기침을 하자 “춘희도 그렇게 기침을 했는데” “춘희가 누구죠?” “몰라도 돼”
“폐결핵으로 죽은 여자? 내가 죽으면 안심이 되겠죠?”
“난 당신이 죽는 걸 원치 않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아. 단지 언제인가가 문제지”

▲ “당신은 누구죠” (사진 우측) ▲여인의 죽음.

베라는 앨에게 계속 해스켈 행세를 하라고 강요하지만 앨이 반대하자, 베라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윽박지르고 심하게 다툰다.
침실로 가서 문을 잠근 베라- 문을 부수고 들어간 앨은 뜻밖에 침대위에 베라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는 베라의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앨은 호텔을 떠난다. “운명. 그 불가사의한 힘은 당신이나 날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 도 있는데 거기엔 타당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
과거의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앨은 식당을 나선다.
“언젠간 손을 들지 않아도 날 태우려 차가 멈춘다는 걸 안다”
경찰차가 다가와 멈추고 그를 태우고 떠난다.

이 영화는 겨우 일주일 만에 촬영을 끝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앨이 차를 얻어 탈 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가하면 차가 우측통행을 하는 기현상도 보이고, 뉴욕이나 L.A의 거리는 아예 보여 주지도 않는다.
그보다 헤스켈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어 베라까지 돌연 급사 한다는 황당한 내러티브를 당당하게 끌고 간다 -비록 해스켈이 차안에서 약을 자주 먹고, 베라가 심하게 기침을 하는 등 나름 당위성을 제공하긴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는 앨의 나레이션 즉 그의 관점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우연히 돌연사 했을 뿐, 그는 그들의 죽음과는 무관하고, 운명이 그에게 딴지를 걸어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고, 마치 법정에서 그의 무죄를 진술하듯 강변한다.
과연 사실이 그랬을까?
그는 관객에게 그렇게 된 얘기니 믿으라고 요구하지만, 앨 스스로도 그렇게 황당한 얘기를 어느 누가 믿겠는가 라며 부정적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그럴싸한 허구를 꾸며내어 사실인양 위장하여 관객에게 제공하고 관객은 기꺼이 허구의 세계에 빠져 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에게 그 허구의 세계를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영화가 하는 얘기가 사실은 꾸며낸 이야기고 얼마든지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수 있음을 은근히 깨우쳐 준다.
영화가 세상에 나온 후 이제까지 이 영화처럼 영화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허구성을 적시한 영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이란 한국영화는 허구의 세계를 멋지게 포장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용구는 무죄이며, 용구의 딸 예승이가 정말 감옥에서 지내기도 하고, 함께 기구를 타고 탈출하려했다고 믿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대표적 예일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8호 (2016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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