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또 한해를 보내며

글 / 최수권(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날과 달과 해도 거의 다 기울어 가고 있다.
저물고 기우는 한켠에, 긴 그림자를 끌고 비켜서 있다. 세상의 소란스런 소리에도 흥분하거나 기울지 않고 내 일상의 안일함을 나는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내 이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 또한 오만이다.

과연 노년의 점수가 몇 점일까

치열하게 살아온 젊은 날, 온전히 나의 삶을 위해 한 길만을, 스스로를 닦달하고 때론 채근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기도 했고, 이렇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이라고 위안하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사실 삶이란 자신의 발 앞에 현존하며, 그것을 밟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의식만 갖고 첫 걸음을 옮기면 다음 걸음은 이미 삶속으로 향한다.
누구나 안정되고 안전한 삶을 꿈꾼다. 그것이 삶에 목표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은 모험이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장식품이 아니다. 미지의 세계나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한다. 때론 파도와 물살을 뚫고나가 거센 풍랑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인생의 폭을 터득하고, 모험을 감행하기도 해야 한다. 그래 인생의 깊이를 알고 살아가는 참 맛을 아는 노년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유쾌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저마다 지니는 노년의 점수가 몇 점정도 일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나는 가끔씩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뒤돌아보니, 나의 실존은 안간힘을 다해 살아온 과정이었고, 일상으로 나를 표백해내는 성찰과, 그것을 늘 도입하려는 나름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감사할 일 많고 불성실한 일도 있어

이 한해, 또 내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고마운 일 뿐이었지 않나 쉽다. 이날까지 내가 누리고 지탱해온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그렇고..., 하느님으로부터 가족, 친지 나와 교류했던 내 이웃들, 그리고 나라, 바람과 햇볕, 달과 별빛, 빗소리, 눈 내리는 서정이, 그 모두가 나로서는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 무량한 축복 속에서도, 가끔은 별로 솔직하거나 겸양하지 못했고 성실하거나 덕스럽지 못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성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보통사람들이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때론 실수도 하고 크고 작은 죄들을 짓게 된다. 그리고 각기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용서받고 용서하며 어울리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인 것이고, 삶의 현장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 말이다.
용서에 인색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용서 받아야할 대상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나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사랑은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근간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아내가 어떤 연유로 송사의 참고인으로 나서게 됐다. 평생 파출소앞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동향의 오랜 친구가 강남지역 아파트 건립예정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그 땅은 투기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는 지인이 그런 땅을 매입한다며 소개를 부탁했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매매가 성사되었고, 시세에 비해 싸게 매입한 매입자는 흡족했다고 한다.
문제는 8년이 지난 후에 매입자가 소송을 해온 것이다. 매입이전에 이미 경매 개시 결정이 났었고, 그 땅이 경매로 넘어갔고, 등기상의 권리가 박탈된 것이다. 민·형사상 문제가 있는 땅을 사기로 매매하였으니, 환불은 물론 이자까지를 청구한 법정다툼이었다.
투기지역의 토지는 소유자가 많고 리스크가 많은 것은 상식이다. 매수자는 등기상의 문제점을 구두로 알렸고, 매입자가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매입결정을 했는데, 오랜 시일이 경과하고 나서, 시비를 걸어온 것은 복권을 사고 당첨이 안 되니 복권 매입처에 환불해 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 매수자의 이론이었다.

웬 소송… 합의로 끝냈으니 세상 한수배워

아내는 기억을 더듬어, 변호사에 보낼 진술서를 쓰고 있었다. 몹시 황당해 하면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아내는 세속의 번잡함을 모른다. 시비가 있는 곳에는 곁눈질도 하지 않는 성격이다. 아내는 원만한 해결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의 응답은 “진실만을 증언한다.”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연말에야 쌍방간에 합의로 끝났다.
아내는 이 나이에 세상을 한수 배웠다고 한숨을 토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마무리 되어 참 잘됐다고 나는 아내를 위로했다.
어울려 사는 세상은 일상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사를 단출하게 만드는 것이 노년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한다. 모든 시비는 돈과 연관 지어지면 복잡해진다. 사건의 빌미를 없애는 것이 편하게 사는 방법이다.
한 해가 저문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웃에게 감사와 축복을 전한다.
연말의 어수선한 세태에 떠오른 이야기 한 토막.
“어떤 나귀가 임금님을 모시고 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 했다. 나귀는 자기를 환영하는 줄로 착각했다. 군중의 환호에 답한답시고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그만 임금님을 땅에 떨어뜨렸다. 임금은 망신창이 되었다. 그 나귀는 호위무사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8호 (2016년 12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