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짓밟아도 피어난 민들레였다

친일 반역의 아들에서
조국에 신화를 바친 삶
글 이영래. 우장춘박사의 기구한 일생
그는 짓밟아도 피어난 민들레였다

▲ 우장춘(禹長春) 박사. <사진=위키피디아>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진 우장춘(禹長春) 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뒤늦게 읽었다. (이영래 글, 2013.4 HNCOM) ‘한·일사에 숨겨진 금단의 미스터리’라는 부제에 ‘우장춘의 마코토’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마코토는 성(誠)이란 뜻으로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게 자기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로 퇴계 이황의 사상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저자가 설명해 준다.

반역의 아들이라 조국을 ‘부국’이라 불러

우장춘 박사는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무인(武人) 우범선의 장남이니 조선조 말 친일 역적의 아들이다. 그는 일본인을 어머니로 태어나 평생 한국어를 모르고 살았으며 대한민국을 조국(祖國)이라고 부르지 못해 아버지의 나라 부국(父國)으로만 불렀다.
우 박사의 이 같은 출생의 사연 때문에 농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잊혀진 역사적인 인물로 취급되다가 우범선, 우장춘 부자에 관한 연구자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났을 것이다.
우 박사가 친일 반역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반일, 반공의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환국하여 극진한 대우를 받다가 종자개량 연구 도중에 별세하면서 임종 직전에 대한민국을 조국이라 부른 후 수원 농촌진흥청 묘역에 잠들었다.
우 박사는 6.25 직전,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의 열렬한 환영 속에 부산항에 도착하여 동래 원예고에 마련된 시민환영대회에 한복을 입고 참석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축전 낭독과 축사를 들었다.
그로부터 9년간 많은 연구실적을 남기고 식량증산을 위해 1년에 2모작 할 수 있는 ‘1식 2수’(一植二收) 벼품종 개발 연구 도중에 지병으로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영결식은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사회장으로 농촌진흥청에서 불교식으로 엄수됐으며 초대 서울대 농대학장 조백현 박사가 추모사를 했다. 고인의 비문은 “흙에서 살던 일생, 흙으로 돌아가매…”라고 이은상 시인이 작성했다.

문화포장 받고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우 박사는 환국 8년, 1958년 4월 8일 환갑을 맞아 서울 국제호텔에서 잔칫상 받고 잠시 일본으로 가서 셋째 딸 맞선에 참석하고 이듬해 국립 메디컬센터에 입원 3차례나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국내 최고 의료기관인 메디컬센터 입원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무료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회복불능으로 위독지경에 이르자 정부가 서둘러 문화포장을 수여키로 결정하여 1959년 8월 7일 이근식 농림부 장관이 병실을 방문하여 환자복 차림의 우 박사 가슴에 달아주었다. 이때 우 박사가 “고맙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는 말로 모처럼 조국이라 부른 후 3일 뒤에 절명했다.
당초 우 박사가 환국할 때 일본에는 70 노모와 막내아들 7살짜리 등 2남4녀를 두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여 단신 홀몸으로 부임했다. 이 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우 박사의 내조를 위해 그의 친지가 S여인을 소개하여 현지처 역할을 하다가 마지막 병수발에도 지극정성을 쏟고 있었다.
우 박사가 위독하여 일본에 있는 부인 고하루에게 급전을 쳤지만 한일 국교가 단절한 시절이라 방한이 늦어졌다가 막바지에 돌아와 임종을 지켜보고 S여인을 만나 남편의 병수발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한복차림으로 귀국했다. S여인은 일본서 공부하여 일본어에 능통한 10년 연하의 이혼녀로 우 박사가 묻힌 수원으로 옮겨 살다가 1968년에 사망했다.

친일 무골 우범선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 박사의 부친 우범선은 1857년 황해도 중인(中人)계급 무반(武班) 집안에서 태어나 19세이던 1876년 무과 급제하여 조선정부 최초의 근대적 군대인 별기군 참령에 임명됐다. 그는 야심에 찬 무골로 임오군란 무렵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귀국하여 청 별기군 초관에 임명됐다가 1884년에는 황해도 청단의 찰방으로 좌천되어 낙망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 갑신정변의 김옥균 3일천하가 실패로 끝나고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가 일본으로 망명한 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우범선이 일본의 선발대에 참여했다. 이어 1895년 을미사변에 주동자로 참여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고종이 아관파천 할 때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망명생활 중에 도쿄의 어느 귀족집에 고용되어 있던 5세 연하의 사카이 니카에게 청혼하여 어렵게 재혼했다. 한국에도 본처와 자녀를 두고 있었다. 우범선은 일본 부인과의 첫 아들 우장춘을 낳고 조선 땅으로 잠입하여 고종의 개화파 탄압에 맞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 일본으로 돌아가 1903년 자객 고영근의 칼을 맞고 암살됐다.
둘째 아들 우홍춘은 그가 암살된 후 유복자로 출생했다. 우범선이 암살되자 우장춘은 고아 신세로 절간에 맡겨져 역적의 아들로 자랐지만 나중에는 ‘조선의 영웅’이자 국보급 인물로 환국했던 것이다.

반일정책 이승만정부 시절 환국보국

우장춘이 13세일 때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으로 망국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뒤늦게 우범선 유족에게 위로금으로 거액 5,000원을 지급하여 자녀교육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또한 우장춘은 조선 국적을 보유하고 있어 총독부의 관비유학생 혜택을 받아 도쿄제국대 부속 전문대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직장이 안정된 후 1923년 고하루와 결혼, 2남4녀를 두고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아 교토에 있는 종묘회사인 다카이 농장으로 옮겨 1945년까지 근속했다.
8.15 후 그의 환국은 동래지역 중인들의 조직인 ‘기영회’로부터 추진됐다. 한·일간 국교 단절로 일본으로부터 각종 종자수입의 길이 막히자 밀수입이 성행하자 동래사람들이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를 구성하고 모금활동을 벌였다. 환국추진위에는 초대 민선 경남도지사 김병규, 동래 원예고 김흥수 교장 등이 참여했지만 우장춘 박사가 조선총독부에게 종자개발 연구인물로 추천했던 경남도 농무부장 김용씨의 아이디어였다.
김용씨가 종자 밀수입을 막기 위해 “우 박사를 모셔오자”고 발기하여 그의 추진위가 결성되고 거금 100만원을 모금한 후 일인들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바탕으로 부산 금정산 기슭에 시험농장도 확보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국회 농림위원회 이주형 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국가기관 사업으로 추진하여 우 박사가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취임하여 오늘의 농진청 산하 국립 원예특작과학원의 모태를 육성함으로써 한국원예농업의 창시자 공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우 박사는 환국성금 100만원을 몽땅 각종 실험기구와 전문서적 및 종자구입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짓밟히며 핀 길가의 민들레꽃’

우 박사 환국을 보도한 1950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가 그를 ‘짓밟히면서도 피는 길가의 민들레꽃’으로 표현했다.
‘망명객의 유아’, 기구한 운명 속에 왜인 어머니의 몸을 빌려 단기 4231년(서기 1898년) 4월 15일, 세기의 과학자가 탄생했다. 그는 6세 때 부친이 암살되어 도쿄 고미시가와구 절에 ‘망국의 고아’로 버려졌었지만 도쿄제대에서 농학을 전공, 22세에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들어가 ‘짓밟히면서도 피는 길가의 민들레꽃’이었다.
그는 육종과 꽃 품종개량의 대가로 세계의 육종계에 미국에 루더 버뱅크, 소련에 이반 미출린이 있다면 동양에는 우장춘 박사로 꼽혔다. 우 박사가 단기 4269년(서기 1936년)에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종의 합성’은 유전 육종학계의 신영역이자 신학설로 예찬됐다. 우 박사는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18년, 교토 다카이 농업연구소장 10년 끝에 환국했다.
우 박사는 환국추진위원회의 교섭을 받고 승낙한 후 친지에게 “시집가는 새색시의 결혼 전야 기쁨과 초조의 심정”이라고 밝혔다.

을미사변 가담 구연수와 우범선의 다른 삶

이 책 속에 ‘또 하나의 비밀’이란 소제목 하에 우범선과 함께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구연수의 삶을 소개했다. 구연수는 동래 중인계급 무인집안 출생으로 우범선과 같은 배경에서 태어나 친일거두 송병준의 딸과 혼인했지만 자녀를 출생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망명생활 중에 우범선의 처 사카이 나카의 동생, 사카이 와키와 결혼했으니 같은 반역계열에다 혼맥도 같이 했다.
그러나 우범선은 암살됐지만 구연수는 귀국하여 총독부의 경무관 벼슬로 큰소리치며 살았다. 구연수가 일본부인과 낳은 첫 아들이 구용서(具鎔書)로 우장춘과는 이종 4촌간이며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로 출세했다.
구용서는 동래 보통학교, 서울 경성중학을 나와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근무하다가 8.15 후 한국은행설립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우장춘 박사가 환국한 1950년 6월 초대 한은 총재에 이어 석탄공사 총재, 산은 총재 등으로 금융계를 지배했었다.
이 같은 깊은 인연으로 우장춘 박사의 환국에는 구용서씨의 숨은 역할이 컸다는 설이 있다.

우박사가 남긴 종자개량연구 발자취

▲ 이영래의‘ 우장춘의 마코토’

우 박사가 1950년 5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에 취임할 때 2만여 평 농장에 직원은 12명이었다. 부소장은 경남도 농무부장이던 김용씨가 맡아 우 박사와 콤비를 이뤘다. 연구소장 두 달 만에 6.25가 발발하여 동래 일대가 피난민들로 북적거렸다. 돈 있는 자들은 일본으로 밀항을 모의하고 젊은이들은 병역기피를 위해 숨어 다녔다.
연구소 직원마저 소집영장이 떨어졌다. 우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 중이라도 연구는 계속 해야 한다고 진정하여 징집연기를 받아냈다. 이때 우 박사의 이복누이인 우희명이 아들에게 소집영장이 떨어졌다면서 하소연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돼야 한다면서 끝내 우 박사가 들어주지 않았다.
6.25 전세가 역전되어 9.28 수복 후 우 박사는 배추, 무 등 채소류 종자개발에 착수했다. 제주도에 종자단지를 조성코자 방문하니 연대교수 출신의 최승만 도지사가 고교 밴드를 동원하여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제주 일대를 돌아봐도 채소 종자단지 적지가 찾아지지 않았다. 그 대신 해안가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온주밀감을 재배하면 좋겠다고 정부에 건의하여 호응을 받았다.
제주도의 귤 재배는 고려 때부터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1907년 박영효가 3년 귀향생활 중에 일본서 온주밀감을 들여와 시식했다든가 1911년 프랑스 선교사가 심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오늘의 제주 감귤에는 우 박사의 조언이 살아 있노라고 한다.
우 박사는 다시 1952년 10월 진도를 채소류 원종 채종지역으로 선정하고 동래 농장 구석에 ‘씨 없는 수박’을 심어 시식회를 갖고 배추와 무 종자를 대량 생산으로 보급했다. 이 때문에 ‘김치의 은인’으로 꼽힌 것이다.
수경(水耕)재배의 원조가 바로 우 박사라는 일화도 책 속에 나온다. 1954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초청으로 방문하니 맥아더 장군이 보낸 딸기를 내 보이며 수경재배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당시 우 박사는 수경재배가 우리나라 실정에 시기상조라고 보면서도 대통령의 뜻을 따라 수원에 수경재배 시설을 도입, 야채를 생산하여 미군납으로 공급했다.
1957년에는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연구로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를 ‘무병 씨감자’ 재배지로 선정, 연구를 끝내지 못한 채 별세했다. 무병 씨감자는 그의 제자 최정일 연구원에 의해 완성, 보급되었다.
반역의 아들 우장춘 박사의 마지막은 조국 대한민국 사랑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소박한 ‘고무신 할아버지’로 농장에서 살다가 떠났다. 민주당 대선후보 해공 신익희(申翼熙)가 우 박사 농장을 방문하여 “한국말이 늘어났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에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저까지 입을 열면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다”는 말로 응대했다고 한다.
또 함태영(咸台永) 부통령이 방문,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으로 취임토록 요청했다”고 전해주었지만 “한국말도 못해 1주일도 안 돼 사표 쓰게 될 것”이라며 끝내 사양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8호 (2016년 12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