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 존스, 몽고메리 클리프트, 딕 베이머

[DVD로 만나는 명작 영화(25)]


종착역(StagioneTermini)
1953년 이탈리아 작품,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
제니퍼 존스, 몽고메리 클리프트, 딕 베이머


글/ 박윤행 전KBS PD, 파리특파원, 경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역임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달려 들어오고 멈추면, 구슬프고도 무거운 알레산드로 치코니니의 음악이 타이틀백으로 흘러나온다. 사랑의 종말을 위한 만가처럼 들린다.
성당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어스름 저녁이 내려앉기 시작한 로마. 한 여인이 아파트의 불 켜진 방을 올려다보고 미소 짓고 계단을 올라와 조반니 도리아라는 문패아래 초인종을 누르려다 포기하고 바삐 터미널 역으로 간다.
7시 20분 전. 여인은 도망치듯 밀라노 행 7시 기차를 타기로 하고, 조카 폴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가방을 역으로 급히 가져다 달라고 부탁 한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내 양심, 내 가족을 잊을 수 있겠어요?’ 라고 쓴 전보를 치지도 못하고 기차에 승차 한다.
차창 밖으로 조바심을 내며 폴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오고(몬티는 15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등장한다) 그녀는 기차에서 내린다.
“왜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려 했소?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도 없는 거요?” 그는 따지듯 묻는다. 이때 조카 폴이 여인의 가방을 들고 등장한다.
남자는 “잘 가요. 정말 즐거웠소.” 여자의 이름은 메리다.
메리가 그대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면, 이 영화는 20분 만에 평화롭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헤어질 순 없어요” 하며 메리는 기차를 그냥 떠나보낸다.
조반니는 메리가 떠나지 않으려는 줄 알았지만, 메리는 8시 반 기차를 타겠다며 그동안 얘기나 하자고 한다.
둘은 한 달 전 스페인 광장에서 만났다. 조반니는 그녀에게 이상형의 남자였고, 남편과 딸 하나를 둔 유복한 미국인 주부는 ‘대수롭지 않은 모험 일거라’ 생각한 만남에 깊숙이 빠져든다. 그러나 연하의 연인과의 불꽃같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안나 카레니나와 달리, 문득 조반니(그녀보다 한 살 연하)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딸과 가정 모두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메리는 서둘러 로마를 떠나려했고, 그런 그녀에게 조반니는 그녀와 그녀의 딸 셋이서 함께 살자며 집요하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고집 한다.
“거기에 가면 눌러앉게 될 거에요. 잘 가요”
화가 치민 조반니는 메리의 뺨을 때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만, 곧 다시 돌아와 그녀를 찾아 헤맨다.

▲ “내 이상형이었어요” ▲ 뺨을 때린다.

플랫폼에서, 대합실에서, 터미널을 오가는 수많은 군상들- 신부, 수녀, 군인, 경찰, 농아학교 학생들, 미인, 뚱보, 정당원들, 한량, 가난한 이민가족 등-이 그 둘을 지켜보거나 지나치거나 하면서 작은 세상의 편린을 보여준다.
선로 건너편에 서있는 메리를 발견한 조반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들어오는 기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그녀에게 뛰어간다. 메리는 그를 보고 자리를 피하려했지만, 사람들의 경악 속에 자칫 조반니가 기차에 치일 뻔한 광경을 본 메리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기의 뺨을 때렸던 그의 손등에 키스 한다.(이 장면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연상시킨다)
“나를 용서해 주겠소?” “용서받아야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다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텅 빈 기차 칸을 찾아 든다.
이제까지 공적인 거리, 사회적 거리로 롱숏과 풀숏으로 처리되던 두 사람이 비로소 친밀한 거리(10센티미터 이내) 안으로 들어와 클로즈업으로 밀착된다.
풀려버린 메리의 눈동자. “오늘 동트는 새벽. 잠을 깨니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고,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었어요.
이슬비 내리는 거리를 몽유병자처럼 걸었어요. 그 이슬비에 당신을 이토록 원하는 내 마음이 씻겨지길 바라면서요”
미국 작가 트루먼 캐포티가 붙인 명대사다.
누구인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새벽잠을 설쳤던 사람들은 그 대사의 절절함이 가슴속 깊이 메아리 질 것이다.
역무원의 신고로 범죄자처럼 경찰서에 끌려갔던 두 사람은 겨우 8시 20분에야 서장의 아량으로 풀려나고 8시 반 기차를 타러간다. 이제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기차객실 복도까지 따라온 조반니. “이젠 내려야겠소”
“아직 안돼요. 곧 궁금해질 거예요. 평생 궁금해 할 거예요. 그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금 무얼 보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까? 그 여자는 예쁠까?”
“그는 사랑에 빠졌소. 그 여자는 아름답소. 나는 결코 결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떠나는 그를 안 보려고 메리는 고개를 돌리고 흐느낀다.
이미 출발한 기차에서 내리다가 조반니는 땅에 고꾸라진다.
기차는 달려가고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터덜터덜 힘없이 플랫폼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카메라가 옆에서 끝까지 따라가 준다.
그들의 사랑은 더 갈 곳이 없다.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한사람은 떠나고 한사람은 남지만, 그 여자는 그 여자의 마음을 로마 종착역에 두고 떠났다.

▲ 간신히 사고를 면하고 ▲ “평생 궁금할 거에요”

누구나 사랑을 해봤을 것이고, 이 이야기처럼 종착역에 가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런 멜로드라마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것은 한 여자의 한 남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영화 전편에 처음부터 끝까지 촉촉이 젖어들어 있기 때문 일 것이고, -저 여자는 정말 그 남자를 사랑 하는구나- 그것이 과거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나게 해서 일 것이다.

아내를 홀로 여행가게 하지마라. 특히 로마에 가게 하지마라.
사실 이탈리아의 여름은 일조량이 적은 북 구라파, 독일 등지에서 바캉스 기간 동안 -오 솔레미오- 태양을 만끽하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이 찾아와 북적대는데, 노골적으로 여자에게 관심을 표하며(영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잘 생긴 이태리 남성들에게 쉽게 사랑의 포로가 되곤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토리오 데시카는 잘 생긴 용모로 처음엔 배우로 시작해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체자레 자바티니와 콤비를 이루어 <자전거 도둑>을 비롯하여 소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작품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도 즐겨 만들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7호 (201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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