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기자 마이클 슈먼, 동양 성인 조명
인간 공자, 논란 공자, 돌아온 공자까지

동아시아의 저력과 한계
공자가 만든 세상
서양기자 마이클 슈먼, 동양 성인 조명
인간 공자, 논란 공자, 돌아온 공자까지

서양 언론인이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를 벗겨낸 ‘공자(孔子)가 만든 세상’을 펴냈다니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016.9, 지식의 날개, 김태성 옮김) 어릴 적에 부모님으로부터 공자에 관해 귀가 아프게 들어 효(孝)와 숭조(崇祖)사상의 원조라고 믿고 있는데 서양기자가 뭐라고 공자 이야기를 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서양기자가 공자를 도마위에 올려 분석

이 책의 부제가 ‘동아시아의 저력과 한계의 근원’이라고 적었으니 아마도 언론인의 안목으로 공자에 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분석 집필한 모양이다. 그러나 392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다 내용이 어려워 소화하고 읽기가 벅차 대강 더듬어 가며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오랫동안 성인으로 추앙되어 왔지만 서양에서는 ‘수염달린 지식인’ 쯤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한다. 실제 저자가 많은 자료와 증언을 인용하여 ‘인간 공자’, ‘논란의 공자’, ‘돌아온 공자’ 편으로 분류한 것을 보니 공자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분석한 셈이다. 저자는 공자가 무려 2500년 전 학자, 정치인이지만 아직도 세계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6억 동아시아인들 속에서 숨 쉬고 있지만 “오랜 논란과 비판으로 그의 유교문화가 너무나 굴곡된 역사를 거듭”했노라고 적었다.
또한 시대마다, 사람들마다 공자를 자기 마음대로 성형(成形)시켜 본래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공자의 나라 중국의 현세대와 후세대 및 그 다음 후대까지도 ‘자신들의 새로운 공자’를 찾아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자가 만든 세상’에서의 혼례식

우리네는 ‘공자가 많은 세상’이라기에 필경 한국과 연관된 기술이 나올 것으로 믿고 책을 구입하여 대강 읽었다. 예상대로 저자는 중국 본산보다 한국이 보다 공자가 만든 세상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저자 마이클 슈먼은 타임지의 베이징 특파원으로 20여년간 한·중지역 전문가로 활약해온 전문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동양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 특파원을 거쳐 한국계 여기자 유니스 윤과 결혼한 친한파로 지금도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저자는 지난 2009년 유니스 윤과 유교식 혼례를 치를 때 “초청도 하지 않은 공자가 참석했었다”고 비유했다. 이날 아내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장인 장모에게 한국식 큰절하고 폐백을 올리자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호두와 대추를 아내의 치마폭에 던져주며 축복하더라고 했다.
저자는 공자의 가르침인 큰절이란 어른의 권위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자 부자관계의 으뜸가치인 효(孝)정신을 따랐으니 결국 ‘공자가 만든 세상’ 절차에 따라 혼인한 사실을 먼저 소개한 것이다.

인간공자… 노나라 보통인간서 성인으로

공자는 중국대륙 동부 산둥지역 노(魯)나라의 ‘보통인간’으로 태어나 곡물창고 관리인, 가축 돌보는 일을 하다가 대신이 되고 전쟁 분쟁 협상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정치개혁의 한계를 느껴 노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대륙을 순회하며 제자들과의 대화록 논어(論語)를 남겼다.
이 책속에 공자의 제자 수는 3,000명에서 70명설, 25명설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사후에 제자들이 논어를 제작하고 스승을 온갖 지혜와 능력과 고결의 모델로 표준화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공자의 사후 350년 뒤의 사마천(司馬遷)도 그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각종 전설 등을 사기(史記)에 올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공자가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는 수제자인 안회(顔回), 고집불통의 자로(子路) 등은 이미 먼저 가고 상인이자 정치인 제자 자공(子貢)만이 임종을 지켜봤다. 이때 노나라 국왕은 공자의 죽음에 대해 “이제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라며 스승을 잃은 슬픔을 탄식했다고 한다.
또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애도했으며 특히 자공은 무덤 옆 오막살이로 3년간 시묘살이로 애도했다. 공자 사후에는 맹자(孟子)가 있었지만 그도 40여년간 공자의 발자취를 따라 양대 산맥을 이뤄 중국대륙을 지배한 유학파(儒學派)의 원조가 됐노라는 설명이다.

‘무관의제왕’서 전설과 왜곡까지 논란

저자는 공자가 중국문화의 아이콘으로 제국시대에는 신성의 상징, 영적 지도자로 왕족이 아닌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역대 통치자들은 그를 백성을 다스리는 홍보, 교육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공자는 반동 혁명가, 독재자, 봉건 영주, 학자 사기꾼, 외국인 혐오자, 권위의 기둥, 위험한 반대론자 등 각가지 논란의 대상이라고도 지적했다. 또한 중국경제의 성공과 실패원인에서 문화적 근본주의자, 세상을 바꾸려는 선지자(先知者), 동아시아의 힘과 약점의 근원으로까지 묘사했다.
그러나 어떤 측면으로 보든 공자의 사상이 중국문명의 창시자로 성인이나 영적존재의 반열로 수천 년을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중국대륙에는 각 고을마다 공자의 사원이 있어 2000년간 제례로 숭배해왔다. 국왕이나 황제마저 공자 앞에 머리를 숙여왔다.
역대 제왕들이 공자에게 최고의 지위를 부여했다. 서기 1세기의 공(公)과 현자(賢者) 칭호로부터 ‘최고의 스승’, ‘완전한 현자’ 등으로 계속 추앙해 왔으며 그의 후손들도 귀족신분으로 나라에서 토지를 하사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공자에 관한 각종 찬사와 호화로운 제례를 공자 자신이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자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면 자신도 못 알아 볼 듯 하다는 말이다. 이는 각종 논란 속에서 제자들이 저마다 공자관련 전설을 만들고 과장 왜곡되게 칭송함으로써 시대마다 고유의 공자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라는 비판이다.

공자를 불러내어 다시 돌아온 공자

공자와 그의 유교사상은 중국대륙에 온갖 외부사상의 영향이 미쳤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대륙은 공산주의나 기독교의 영향을 감수했지만 유교사상이 제거되거나 대체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공자는 아브라함, 예수, 마호메트, 석가모니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과 나란히 문명의 창시자로 예우된다.
이에 비해 서양의 학자나 정치가들은 공자에 대해 무지했던 셈이다. 오늘날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확대되면서 공자문화도 성장하고 있으므로 공자를 습득할 필요가 있다.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한·중·일 등과 교류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모든 정책과 정치, 기업경영, 인사, 교육 및 부부관계까지 공자가 만든 세상으로 되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중국 관리들은 공자의 사상인 논어를 읽고 숙지한 대가로 벼슬을 유지했었다. 중국에는 유교 외에 불교가 있고 도교를 창시한 노자(老子)도 있었지만 공자만큼 위대하지는 못하다.
유교사상의 뿌리는 거의 난공불락이다. 청나라의 경우 야만족으로 불린 만주족이 건설하여 엘리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가 공자사원에 무릎을 꿇었다. 논어를 암기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들을 등용했다. 그런데도 서양학자와 정치가들은 기독교와 성경,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및 아담스미스 사상만 연구해 왔다.
모택동 시절 홍위병의 문화대혁명으로 공자가 일시적 수난을 겪었지만 그 뒤 부활했다. 중국 동부 산둥성 공자의 고향 취푸에는 베이징에서 출발한 고속열차가 정차하여 수많은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이곳 취푸는 2500년 전 현자(賢者)가 살던 곳으로 오늘날까지 유학연구의 심장이 되어 있다. 옛 사마천이 취푸를 방문하여 유학연구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었다.
요즘은 공자의 76대 손이 이곳에서 공자와 논어 낭독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다시 돌아온 공자는 ‘기업이 불러낸 공자’, ‘정치가 불러낸 공자’, ‘중국대륙이 불러낸 공자’ 등 다양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공자가 중국의 미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7호 (201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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