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교육 언론의 선구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요’ 유언
[한국인을 찾아서(24)]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기업 교육 언론의 선구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요’ 유언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인촌과 고하… 가깝고도 먼 사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그들은 타고난 천성, 기질과 가치관에서 근본적으로 현격한 대비를 이루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김성수는 경북의 거유 서병오 선생이 지어준 아호 ‘인촌’에서 느낄 수 있듯 겸손하고 넓은 도량과 어진 성품을 지녔다. 발군의 추진력을 지닌 송진우는 일제치하에서는 조선민족 우국정신 앙양에 힘쓴 독립 운동가였고, 해방 뒤에는 열혈청년 기개로 민주정부 수립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김성수(1891~1955)는 1891년 외세의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시기,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호남의 거부 김경중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893년 세 살 때 그는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고, 여섯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는 등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과 교양을 익혔다.
1903년 열세 살 되던 해에 다섯 살 연상인 고광석(1886~1919)과 혼례를 올린다. 장인 고정주의 도움으로 1906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거기서 그는 평생 동지가 되는 고하를 만난다.
송진우(1890~1945)는 전라남도 담양의 양가 집안에서 송훈과 양(梁)씨 부인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의병대장 기삼연에게서 민족주의적 훈도를 받았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학숙에서 인촌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인촌은 1908년 군산 금호학교를 다니다, 그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겠다며 송진우와 함께 군산항에서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도쿄로 건너간 그는 중등학교 입학 예비학교인 세이쇼쿠(正則) 영어학원에 들어간다. 1909년 송진우와 함께 긴조(錦城)중학교 5학년으로 편입했고, 1910년 두 사람은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4개월 뒤인 8월 29일, 일제가 조선을 강제합병하자 두 사람은 시국관 차이로 잠시 헤어지게 된다.
송진우는 조국으로 돌아가고, 김성수는 도쿄에 머물면서 와세다대학 정규과정 정치경제학을 전공한다. 인촌은 1914년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문화민족주의 사상을 몸에 익혔다. 그즈음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세우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놀랍도록 근대화되어 있었다. 간다 서점거리에 쏟아져 나온 산더미 같은 책들, 새 지식을 갈망하는 무수한 학생들의 물결, 그 가운데 김성수는 교육과 출판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선광문회와 민족신문 태동
1914년 7월 귀국한 인촌은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뜻을 세운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찾아 최남선의 지도를 받았다. 백암 박은식의 발의로 육당 최남선이 창설한 조선광문회에는 당시 조선팔도에서 우국의 시름과 애족의 기염을 토하며 한민족의 장래와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는 지사(志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조선광문회는 뒷날 3·1독립운동의 태동지이며, 인촌 교육문화사업의 인재 활용원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조선광문회는 국학고전 <동국통감> <택리지> <율곡전서> <삼국사기> <열하일기> 등 100여 권의 번역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는 신문화의 발상지요,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조선근대정신의 발원지라 할 수 있었다. 임규, 김두봉, 한정, 권덕규 등은 광문회에 아예 유숙하며 조선 최초의 말모이(국어사전) 편찬을 해나가고 있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이곳에서 외국간행물을 탐독할 수 있었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그리고 <더 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외지에 자주 파리강화회의 기사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해설이 실렸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안창호 등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이 났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날마다 조선광문회에 모여서 외국신문을 접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담론(談論)하며 독립운동 열의를 지펴갔다.
육당은 제자 홍일식(전 고대총장)에게 기미독립운동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
“거사를 목전에 두고 기독교계의 거목인 남강이 평양에서 빈손으로 내려왔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네. 남강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조선의 대표적인 교육자요, 기독교 장로교계의 얼굴이요, 독립운동가가 아닌가. 자칫하면 다른 단체들의 참여에도 영향을 미쳐 거사 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르는 긴급 상황이었네. 그때 인촌은 거금 5천 원을 내놓으면서 출처를 밝히지 말고 남강에게 전해, 분담키로 한 거사 자금으로 내놓도록 해 달라 했네. 나는 한걸음에 종로 YMCA 뒤편 황금여관으로 달려가 남강에게 그 돈을 건넸지. 덕분에 3 · 1 거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어. 인촌의 나이 스물여덟 살, 참으로 큰 인물이었네”
나라의 성패는 교육과 출판
조선광문회에서 김성수는 한 나라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교육과 출판 그리고 산업 육성임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육당과 함께 부친을 찾아뵙고 교육 사업에 투자할 거금을 지원받는다. 1915년 4월 그는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1917년 3월 직접 교장에 취임하고, 면직류 공장 경성직유(京城織紐)를 인수한다.
그해 10월,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경성방직(주) 설립을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김성수에게 중앙학교 교사 최두선이 찾아왔다. 최두선은 김성수에게 민족주의계 신문 창간을 맡으라는 하몽 이상협의 의견을 전했다.
이상협은 당시 신문제작에 관한 한 조선인 최고의 경력을 갖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었다. 김성수는 하몽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 때문에 대학 설립계획은 연기되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나서야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재창학하게 된다. 아직 서른 살도 안된 김성수가 교육, 기업, 언론 세 가지 사업을 동시에 떠맡게 된 것이다.
신문창간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3·1독립운동 뒤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 일환으로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한다는 발표가 나자, 제출된 신청서는 10여 건에 이르렀다. 김성수와 이상협을 중심으로 한 새 신문 발간팀도 화려한 진용으로 창간준비에 돌입했다.
신문이름은 유근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아일보(東亞日報)>로 정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발전하려면 시야를 크게 잡고 동아시아를 무대로 삼아 활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은 제호였다. 제호 글씨는 당대의 명필 김돈희가 썼다.
1919년 10월 9일, <동아일보>는 발행인 겸 편집인 이상협의 이름으로 총독부에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김성수는 곧바로 서울 화동 138번지 중앙학교 옛 교사에 동아일보 창립사무소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자본금 100만 원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주식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자금을 보태는 심정으로 참여했다.
조선팔도에서 78명이 <동아일보> 주식을 인수했고, 신문 발행 허가가 난 지 8일 뒤인 1920년 1월 14일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2월 1일 발기인 대표 김성수의 명의로 회사 설립 허가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자본금 총액은 100만 원이었다.
동아일보는 창간에 즈음하여 사시(社是)를 선언한다. ‘첫째, 조선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노라. 둘째,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셋째, 문화주의를 주창하노라’였다.
동아일보 창간
그러자 서울 진고개 일본상인연합회 대표들이 사이토 총독에게 몰려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인 동아일보를 왜 허가했느냐’며 항의했다. 총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하는 굴뚝이다. 가스를 배출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 폭발하고 만다.”
마침내 1920년 4월 1일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창간호를 손에 든 김성수는 막중한 사명감과 긍지에 스스로 감격하여 눈시울을 붉혔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횃불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그는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확신했다.
화동 사옥은 옹색한 규모였지만, 1926년 광화문 사옥을 신축하기까지 7년 동안 우국열정이 넘치는 민족지 <동아일보>의 산실이었다. 창간 당시 <동아일보>는 20대 청년들이 이끈 ‘청년신문’이었다. 사장 송진우가 서른두 살로 가장 연장자였다. 그때 동아일보사에 모인 인사들은 대부분 민족지사 기품의 사람들로 모두 독립투사라도 된 양 비장한 분위기였다.
조선총독부 발행정지 처분
1924년 5월, 사장직을 내놓은 송진우는 주필을 맡았다. 이승훈이 5개월 남짓 사장에 재임한 뒤, 10월 21일 김성수가 다시 사장에 취임했다. 인촌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동아일보>는 다시 제2차 무기정간처분을 당하며 주필 송진우와 발행인 김철중이 구속되었다. 소련에 있는 국제농민회 본부에서 3·1운동 7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전해달라고 보내온 전보문을 게재했다는 이유였다.
이 위대한 날의 기념은 영원히 조선농민에게 역사적인 국민적 의무를 일깨울 것을 믿으며,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지어다. 현재 재감(在監)한 여러 동지에게 형제적인 사랑의 문안을 드리노라. 1926년 3월 1일.
총독부는 이 글이 실린 3월 5일자 <동아일보>에 발매금지처분을 내렸다.
김성수는 1927년 10월 임기가 만료되자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송진우가 다시 사장에 취임했다. 송진우는 1936년 8월에 있었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퇴직을 강요당하기까지 9년 동안 <동아일보>를 이끌게 된다. 한편 김성수는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한다. 이어서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출판언론과 교육 실태를 견학하고 와서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맡아 교장에 취임한다.
1927년 1월 5일, 인도의 독립운동지도자 간디가 보내온 메시지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와 1929년 4월 2일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이 <동아일보>에 실린다.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껴온 독자들은 절실한 심정으로 타고르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그 등불과 촛불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이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일본 군부의 파쇼통치 아래 일본의 언론자유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통제 아래 있던 조선의 민간신문들 또한 항일적인 논조로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질곡의 상황에서 1936년 8월에 일어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 사진게재는 조선민족언론의 저항정신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대사건이었다.
1936년 8월 10일 새벽 1시 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실황 중계방송은 손기정 선수가 제1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조선의 학생이 세계의 건각(健脚)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이 한국인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뛰고 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립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이었다. 남승룡 선수마저 3위로 골인하자 중계방송 전파는 더 이상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동아일보사 사장실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소리 지르며 감격에 몸을 떨었다. 한 기자가 밖으로 뛰어나와 확성기로 마라톤 우승 소식을 알리자,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에 모인 군중들은 ‘손기정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았고,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승전보가 전해진 15일 뒤인 8월 23일, 베를린올림픽대회 기록영화를 긴급 입수해 26일부터 우미관에서 일반에게 무료로 상영한다는 사고(社告)를 냈다. 그리고 8월 25일자 제2면에는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촬영된 새로운 사진을 게재했다.
1판에는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일장기가 부착되었으나, 2판에는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진이 게재된 <동아일보>가 시중에 배포되자 총독부 검열 당국은 곧바로 발매와 배포를 금지시켰다. ‘사진의 가필’이라는 전무후무한 구실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많은 관련 인사들이 연행, 투옥되는 대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은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된 <동아일보> 기자들이 매 맞는 합숙소가 되었다.
일장기 사진 제거의 발안자 이길용, 사진을 수정하여 직접 일장기를 제거한 이상범, 사진부 제판기술자 백운선·서영호, 사진과원 신낙균, 그 사진을 게재한 장용서, 사회부원 현진건 그리고 <신동아>에 게재한 잡지부원 최승만 등 참혹한 고문을 당한 이들은 앞으로 언론기관에 절대 근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40일 만에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송진우 사장, 김성수 취체역, 그밖의 간부들은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와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신동아>와 <신가정>에 발행정지·정간처분이 내려졌다. <동아일보>는 279일 만인 이듬해 6월 1일 다시 복간되었으나, <신동아>는 훨씬 뒤인 1964년에, <신가정>은 1967년에 <여성동아>로 이름을 바꾸어 복간되었다.
민족의 횃불이 되어야 한다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탄압과 조선어 말살정책 속에서 <동아일보>는 1940년까지 계속 발행되었다. 일제는 한글로 발행하는 조선의 신문들을, 물자 부족으로 일본 전 지역에 걸쳐 신문사를 정비한다는 정책을 내세워 없애려 했다. 따라서 <매일신보> 하나만 남긴다는 방침 아래 1940년 초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도록 강요했다.
총독부의 강압에도 버텨 6개월을 끌자, 총독부는 최후 수단으로 <동아일보>의 경리업무에 부정행위가 있다는 구실로 사장과 중역들을 체포, 구금 협박하여 강제로 폐간계를 받아내고 만다. 이로써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지령 제6819호를 끝으로 2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조선일보>도 함께 폐간됐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의 독무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그해 10월 김성수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 뒤 김성수와 송진우는 두 가지 사업을 시작한다. 정치활동과 <동아일보> 중간(重刊)이었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를 복간한다.
같은 해 12월 16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탁통치를 채택했다. 신탁통치 발표는 국민 모두의 격렬한 분노와 저항을 촉발시키면서 전국적인 반탁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소련의 지시를 받고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공산주의 진영 또한 송진우를 적대시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56세의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아침 자택에서 암살당한다. 송진우의 암살은 불가피하게 김성수로 하여금 한민당의 수뇌 역할을 떠맡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서재필이 고려대에서 강연했다. 그는 해외에서 독립 운동한 이도 애국자이지만 일제강점 치하에서 꾸준히 민족계몽운동을 한 이도 애국자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더불어, 정부 수립을 앞두고 “김성수 씨 같은 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정파를 초월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인물이라며 서재필은 인촌의 ‘공선사후’ 정신을 높이 샀다.
1947년 2월 주식회사 동아일보를 재발족했다. 또한 김성수는 같은 해 8월 보성전문학교를 바탕으로 고려대학교를 재창학했다. 또 반탁 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했다.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되어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은 점점 더 심해졌다. 사사건건 국회와 마찰을 빚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부통령이던 이시영이 대통령 측근의 부정 사건에 격분하여 사임하면서 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곧 이 자리에 김성수가 추대되었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인촌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대통령제하에서 부통령직은 대통령의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에 김성수는 마지못해 부통령직을 수락하고 1951년 5월 18일 국회에서 수락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인촌은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 그 자리에서 물
러났다.
인촌은 오직 고려대학교 발전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를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전위신문으로 이끌었다. 1953년 10월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인촌은 병석에서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한다. 서로 헐뜯고 편 가르기를 하면 다시 나라를 망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는 민주당 창당의 초석이 되었다.
아침에 피를 쏟고 혼절했다가 오후에 깨어난 인촌은 그날 <동아일보>를 가져오라 하여 1면 단상단하(壇上壇下)란에 시선을 멈추더니 이윽고 사회면 김성환 만화 ‘고바우 영감’에서는 엷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고는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65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0호(200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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