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할 일

글/전성자 (한국소비자교육원장)

할 수 있다는 맹신

“할 수 있다.” 한국인 맹신(盲信)이다. 올림픽 펜싱경기에서도 통했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정연한 논리의 전개도 있다. 그래 “노오력”을 한다. 노력정도론 부족하다. 남보다 열심 하지 않으면 붙여먹고 살아 갈 수 없다. 그래 열심히 한다. 그 열심을 강조하다 보니 “노오력”이라 강세를 붙여 쓴다. 요즈음처럼 복잡하게 발달한 사회에선 많은 것을 해야 한다. 무엇이 소용 닿을지 모르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둬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요구할지 모르니 우선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둬야 한다. 그렇게 만답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모두가 열심히 하라고만 한다. 아직 뭘 할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어른들이라도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과거 보던 시대부터 내림해 온 “반딧불 아래서라도 열심히” 하라고 닦달하던 습관적 독려를 적극적 사고로 윤색해 놓은 것이 “하면 된다.”는 미신이다. 학교는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 나만 잘 할 수 있는 것은 찾아주지 못한다. 그런 건 자기가 찾아야지!?…
“노력하면 못할 것 없다”고만 말한다.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정명이 되어 버렸다. 젊은이들 입막음 하는 데는 아주 효능 있는 지령의 말이다. “해보긴 했어?”이쯤 되면 겁박이다. 소질, 흥미, 끈기, 우수성, 자질도 고려치 않고 몰아붙이는 욱지름이다. 그래 사회도 정함이 없고 젊은이들은 난감해 한다.

스펙 좋은 사람? 품질 좋은 사람?

열심의 결과는 스펙으로 나타난다.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다. 객관화하기 위해 자격증, 수료증, 면허증으로 입증한다. 실력보다도 “증(證)” 우선이다. 이것도 강세를 붙여 “찡”이라 부른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 “찡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곧 “스펙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다.
노력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엔 “찡”만하게 없다. 경력과 이력도 스펙이다. 스펙 쌓기는 곧 “찡”모으기로 읽힌다. 많을수록 으스댄다. 보여주기 쉽고 확실한 게 그거니 그렇다.
하지만 실제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스펙 좋은 사람보다는 “품질 좋은 사람”이 더 환영 받아야 하는 게 정리다. 인력도 시장에선 상품일진 데는 스펙과 품질은 결코 동일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스펙 좋다고 능력 있다 판단할 수도 없고, 스펙보고 진실 되다, 양질이다 판단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사람사회에는 품질 좋은 사람이 더 값지다. 품질 좋은 사람이 품질 좋은 사회를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를 품질 좋은 사회로 품위를 올리기 위해선 품질 좋은 사람을 우선으로 치는 풍조가 서야 한다.

일자리가 아니라, 문제는 일감이다

몇 십번을 넣어도 회신이 없는 응시원서, 해도 해도 올라가지 않는 성과, 비교우위를 점할 수 없는 무력함을 맛보고야 “하면 된다.”는 말은 책임 없는 단순 격언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 말이 희망고문인 것을 이내 알게 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사회정신에 눌려 주눅 들고 만다. 그래 풀죽어 산다. 그러면서 불만만 복어처럼 뱃속에 부풀려 채운다.
이런 희망고문은 청소년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사회적 정명을 넘어 지금쯤은 사회적 폭력이다. 이 이상 무얼 어떻게 더 잘 하라고!? 쌓인 불만이 터질 듯하다. 해소의 돌파구가 없어 보인다. 음주가무도 하루 이틀이고, 허허롭게 살자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젠 사회가, 어른이, 선배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하여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어야 할 때이다. 곧 일자리 만들기라는 허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른들이 알고 있는 일자리란 몇 년 안에 사라질 것들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일감을 찾아 주는 일에 힘 쏟을 때이다. 일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있어야 할 일감들,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감들, 우리가 담당하고자 하는 일감들, 지금은 보이지 않으나 곧 나타날 일감들을 찾고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먼저 바뀌어야

▲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명예교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경쟁을 독려하기에 이만한 격문이 또 없다. 경쟁을 원치 않는 사람에겐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다. 이 격문이 우리에게 그렇게 강하게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그리는 평화로운 사회는 경쟁의 도가 치열하지 않은 사회이다. 경쟁이 덜 심한 사회에서 경쟁을 덜하면서도 사회 구성원이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싫어해서 경쟁이 없는 분야를 택해 전공하다 보니 이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다고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일본학자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는 말한바 있다.
남 노벨상 받은 거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도 경쟁을 치열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 줄 책임이 있다. 그냥 좋고, 즐겁고, 하고 싶은 일 선택해서 재미 붙여 하다보면 평균은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어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몰인정하게 몰아붙이는 야박한 사회 말고, “그래 힘들지?” “그래 쉬엄쉬엄 하려무나!” 하고 위로 해 주는 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보라! 말갛게 고운 얼굴들, 빛나는 눈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자기 생각 그리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자리(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모든 좋은 것은 미래에 있다.”고 행복을 뒤로 밀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신뢰와 위로를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7호 (201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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