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대, 61대 판한성부사 역임

서(庶) 얼(孼) 차별 진언
서선(徐選)
58대, 61대 판한성부사 역임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길래 홍길동은 가출을 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서 허균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잘못된 사회를 혁파할 것을 꿈꾼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양반이 아니면 과거시험을 볼 수 없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신분제도가 바로 조선시대의 서얼을 차별대우하는 법제이다.
본부인(正妻)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적자(嫡子)라 하고 그 외의 여인(妾)에게서 낳은 아들을 서자(庶子)라고 한다. 서자는 다시 서얼로 나뉘는데 서(庶)는 어미가 양민일 경우이고 얼(孼)은 어미가 천민일 경우 그 아들을 이른다. 그래서 이들은 양반의 자손이면서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가슴에 불평불만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서얼이 그리 흔하지 않았는데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조선시대에는 서얼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고질적 난제가 되고 만다.

서얼금고법을 조정에서 논의하다

태종15년(1415), 정부에서 시행해야 할 정책 33조목을 진언하면서 세 번째 항목으로 승정원의 우부대언 서선 등 6인이 이러한 상소를 올린다.
<종친과 각 품의 서얼자손은 현관직사(顯官職事)에 임명하지 말고 적첩(嫡妾)을 분별하소서>
왕족과 양반들의 서자는 높은 벼슬자리에 임명하지 말라는 취지를 공론화 하여 적자와 서자의 분별을 확실히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을 윤허하는 대목에서 왕실의 속사정을 암시하는 의미를 짚어보게 된다. 아마도 임금의 심중을 꿰뚫는 상소일 것인 즉, 배 다른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왕실의 적통(嫡統)질서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한 방책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풍설에는 서선이 언젠가 서얼 출신인 정도전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삼봉이 죽자 개인적 앙갚음으로 서얼금고법의 시행을 추진했다는 얘기가 훗날 있었지만, 하나의 주요한 제도를 도입하는 명분으로서는 설득력이 미흡하고 아무래도 정치적 측면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서얼을 차별하는 정책은 왕통계승 차원만이 아니라도 일부다처제가 야기하는 사회적 폐해가 드러나 풍속을 정화하는 측면에서 일부일처제를 권장하는 하나의 선량한 제도일 수도 있었으나, 양반계층의 축첩행태는 개선됨이 없었고, 결국《경국대전》에 규정되면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신분사회의 특징적 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

서희 장군의 후예

▲ 장위공 서희 장군.

경기도 이천과 여주에 가면 이천서씨 문중의 사적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다. 시조 서신일의 묘역은 웬만한 왕릉보다도 넓은 터를 잡고 비석을 비롯한 석물도 단정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2세조 서필은 태사내의령에 올라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이었고, 3세조 장위공 서희는 80만 대군을 몰고 온 거란 장수 소손녕을 세치의 혀로 설득하여 물리치고 도리어 강동 6주를 얻어낸 공훈으로 유명한데 그의 묘역은 풍우에 마모된 석상과 장명등의 푸릇한 이끼로 고풍이 완연하여 고려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의 명문으로 맥을 이어 온 이천서씨는 조선조에 들어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한다.
서선(徐選)의 자는 대숙(大叔), 호는 해화당(海華堂), 시호는 공도(恭度)이며 방원(태종)의 스승이었던 운곡(耘谷) 원천석의 문인으로서 공민왕16년(1367)에 태어나 세종15년(1433)에 죽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태조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 해 부봉사가 되고, 의정부사인·형조의랑 등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계사를 잘못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죽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전사시영·세자시강원좌문을 거쳐 문하주서·사헌부집의가 되고 동부대언·경연참찬관·보문각직제학·춘추관편수관·지공조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우부대언 겸 군자감사·지호조사가 되고 좌부대언·집현전직제학 겸 판사재감사·지형조사를 역임한 뒤 우사간으로 있을 때 설화(舌禍)를 입고 부평도호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태종15년(1415) 우부대언 때 서얼의 차별을 진언하여 제도화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 뒤, 예조우참의·우대언을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세종1년(1419) 고부겸청시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윤이 되었다. 또 경기도·경상도·전라도 등의 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예조·이조참판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 형조판서에 올랐다. 1429년 판한성부사 때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에 다시 갔다 와서 마지막 관직으로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 해화당선생 신도비 (소재지: 여주 신북면 후리 상두산 북록)

서선이 세상을 뜨자, 세종은 제문(祭文)을 내렸는데 “임금에게 보답하는 충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였으니, ~ ~ 경은 그릇이 크고 쓰임이 넓었으며 지식이 밝고 행실이 민첩하였다.”고 썼다. 시호 ‘공도’의 의미가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마음이 능히 의리에 맞게 함이 도(度)이니 이에 바로 부합한다 하겠다. 아들은 서달(徐達)이며 명재상 황희(黃喜)의 사위다.

서얼금고법의 역설적 해석(?)

금고(禁錮)의 사전적 풀이는 현대의 법률적 측면에서는 교도소에 가두기만 하고 노역을 시키지 않는 형벌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죄과가 있거나 신분상의 허물이 있는 사람을 벼슬에 쓰지 않던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신분상의 허물이란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죄를 가리키는데, ‘서자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 질문이 절로 난다. 출생에 자기결정권이 없는 서얼 자식의 운명으로서는 너무나도 억울한 천형(天刑)의 낙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내내 서얼에 관련한 논의가 여러 조정에 걸쳐 그치지 않았으며, ‘나라에 충성을 하는 사람이 어찌 꼭 본처의 아들뿐이겠는가?’
‘서얼을 금고한 옛날 제도는 편협한 것이다’
‘가문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질적 폐단이다’
‘나라 법에 서자들을 금고 시켜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등의 논란이 거듭되다 조선 말기에 와서야 갑오경장에 의해서 완고한 반상(班常)제도는 철폐되어 사단으로 얼룩진 서얼의 차별이 사라지고 만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조선 초기, 서얼금고법이 자손을 차별하는 악법으로서가 아니라 서얼의 출생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장치로 인식되어 양반사회에 일부일처제가 정착하였다면 최선의 법률이 되었으련만, 당시의 왕족과 양반들에게 어찌 20세기의 ‘인권의식’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공도공 서선을 위한 변명은 부질없는 상상이었나 보다.

참고자료 및 협조 : 조선왕조실록, 이천서씨숭조록·해화당선생문집, 서재석박사(대종회부회장), 서정택(성균관 전례위원회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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