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정치권 수도이전설
수도남천설은 단견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질과 능력과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가 나라를 난국으로 이끌고, 마침내 멸망에 빠뜨리기도 했던 많은 경우를 알고 있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관산성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이 전멸당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임금은 백제 26대 임금 성왕이다. 그 이전에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임금은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었다.
성왕의 이름은 부여명농(扶餘明). 무령왕(武寧王)의 아들로서 523년에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성왕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결단성이 있었다.’고 했지만 이는 의례적인 기술에 불과하다. 관산성전투에서 패사한 정황만 두고 보면 그는 용병술이 모자라고 치밀함도 부족한 인물이었다. 성왕이 즉위할 무렵 백제·신라·고구려 삼국관계는 서로 치고받는 험악한 상황이었다. 특히 신라가 가야와 손잡고, 고구려는 계속해서 백제를 압박하고 있어 백제가 가장 불리한 형편이었다. 이에 성왕은 신라와 화친을 모색했다. 그리고 538년에는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하는 등 개혁을 통한 국력의 회복을 꾀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548년에 고구려군이 남침, 백제의 한강 이북 대 고구려 방어요새인 독산성을 포위했다. 성왕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신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구해주었다. 3년 뒤인 551년에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일으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그 보복전에서 백제는 고구려 남쪽의 6개 군을, 신라는 10개 군을 점령했다. 당시 백제가 차지한 6개 군은 한강 하류 오늘의 서울과 경기도 일대였고, 신라가 차지한 10개 군은 오늘의 남한강 상류 강원도와 충북 일대였다. 그러나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라가 동맹을 배반했던 것이다. 신라군 총사령관 김거칠부(金居柒夫)는 내친 김에 백제가 천신만고 끝에 70년 만에 되찾은 옛 서울 한성지역의 6개 군마저 기습하여 차지해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성왕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성왕은 한성탈환이라는 눈앞의 성취에만 만족하여 신라의 음모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아무 대비책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신라의 군사행동을 비겁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이란 본래 칼로 하는 정치가 아닌가. 동맹관계란 영원하지 않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고대나 현대나 변함없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실상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성왕은 재위 32년(554)에 마침내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오늘의 충북 옥천인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이 연합군인 대가야와 왜의 군사까지 거느리고 맹공을 퍼붓자 신라는 각간 김우덕(金于德)과 이찬 김탐지(金眈知)로 하여금 이를 막도록 했으나 백제군의 노도와 같은 기세를 당할 수 없어 서전에서 패퇴했다. 그러자 신라의 신주(新州:한산주)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을 구원하러 달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성왕은 뒤에 위덕왕(威德王)이 되는 태자 부여창(扶餘昌)이 걱정되어 밤중에 보병과 기병 50명만 거느리고 달려갔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첩보를 입수한 신라 삼년산군의 하급 장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구천(狗川)에 매복하고 있다가 전광석화처럼 기습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이 관산성싸움에서 백제군은 임금이요 총사령관인 성왕 자신은 물론, 장관급인 좌평 4명, 장병 2만 9천 600명이 전멸당하고 말았다. 임금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전멸했으므로 백제는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에게 잡혀죽고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또다시 멸망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은 삼국시대와는 정치·군사·경제적 사정이 다르지만 백제가 서울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다시 부여로 남천(南遷)한 끝에 멸망당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한강 하류를 고구려와 신라에게 차례로 빼앗기고 남천을 거듭한 끝에 망했던 것이다. 명칭이야 수도든 행정수도든 한강 이남으로의 남천은 백제 망국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위험한 발상이다. 중부지방을 장악한 정권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공약,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세종시를 탄생시킨 수도 이전 이슈가 최근 재부상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개헌을 해서라도 국회와 청와대를 세종시로 옮기는 완전한 수도 이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게 계기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지지 의사를 보냈고 이춘희 세종시장, 더불어민주당의 김태년·이춘석 의원 등 상당수 단체장, 정치인들도 공감을 표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지난 7월 5일 취임 2주년 간담회에서 찬성 대열에 가세했다. 서울이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데 서울시장이 수도 이전을 얘기하는 것은 본분을 망각한 처사다. 지난 2004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이래 숨죽였던 ‘수도이전론’이 12년 만에 다시 고개를 든 셈이다.
수도가 충청도로 이전하게 되면 기존 수도권은 인구, 일자리, 영향력 등에서 출혈이 불가피하다. 서울에 근거지를 둔 단체장들이나 정치인들로선 쉽사리 찬성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번엔 기득권을 가진 쪽에서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다며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나선 것이다.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면서 국회와 청와대는 서울에 둔 채, 오늘의 세종시인 행정복합도시를 건설하는데 그쳤다. 이후 10년 이상 수도 이전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오지 못한 것도 위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법을 고친다면 수도 이전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특히 내년 대선을 앞두고 권력구조 개편, 분권강화 등 개헌 논의가 무성한 상황이다. 수도이전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찬성하는 쪽은 수도권의 집중과 과밀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로 서울의 심각한 주택문제, 교통난 그리고 이로 인한 국가의 경쟁력 약화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해법이 수도 이전이라는 주장이다. 수도권 집중 억제를 위해 실시하고 있는 각종 규제로 외국 유명기업이 국내투자를 기피하는 등 수도권 자체의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는 점도 든다.
반대 논리는 충청지역 수도이전은 기존 수도권의 외연 확장 또는 광역화에 그칠 수 있고, 한반도 전체로 볼 때 남쪽에 위치한 충청 지역에 수도가 만들어지면 통일을 대비할 때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행정 수도 이전만으로 지역의 균형발전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차라리 건설과 이전에 소요되는 비용으로 비수도권 전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기반시설 투자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국회와 청와대를 세종시로 옮기는 것은 천문학적 비용이 들고, 실제 지역 균형발전을 가져올지도 불분명하다. 충청권 집중에 따른 수도권 등 타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인한 국론 분열의 우려도 있다. 세종시로 수도를 이전했는데 통일이 되면 수도가 너무 남쪽에 치우치게 된다는 반대 주장도 있다. 차라리 수도 이전 주장을 하려면 충청도가 아니라 포천이나 철원으로 북천하는 것이 장차 남북통일에 대비해서도 훨씬 진취적일 것이다. 비생산적 정쟁으로 국론 분열을 가져오고 막대한 혈세를 낭비할 수도이전론,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라도 그만 멈춰야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6호 (2016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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