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부 공직에서 현대, LH 사장 역임
용맹전진 현장달인… '할수있다' 신념

'정주영 정신' 의 계승자
이지송, 영원한 건설인
건설부 공직에서 현대, LH 사장 역임
용맹전진 현장달인… '할수있다' 신념

▲ 이지송 전 현대건설, LH 사장 역임.

정주영(鄭周永) 건설사관(士官)으로 현대건설, LH 사장을 역임하고 은퇴한 ‘영원한 건설인’ 이지송 전 사장을 말하는 증언기록이 ‘꿈의 한 가운데서 다시 시작’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토목공학도로서 국내외 건설현장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용맹전진 한 그의 기백이 이 책 속에 나와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다.

전천후 4계절형 현장경영 숙련

이지송 사장은 건설부 공직으로 출발했지만 정주영 회장이 스카웃하여 현장경영을 학습, 실천함으로써 ‘정주영 정신’의 계승자쯤으로 평판된다. 그는 현대건설 23년 근속 중 11년을 해외현장에서 근무하면서 전천후 4계절형 현장의 달인(達人)이 되어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이 사장은 현대건설 근무를 마치고 퇴임하여 경복대학 석좌교수로 강의하다 현대가 유동성 위기로 허덕일 때 채권단에 의해 CEO로 발탁되어 현대건설 본관과 서산 간척지에 정주영 흉상을 건립했다. 바로 정주영 정신의 상속, 계승자임을 자부한 기록의 하나다.
이 사장은 젊은 시절 국내외 현장근무의 긴장과 과로로 암 수술 받고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의지와 집념으로 재활하고 재기한 분이다. 이 때문에 ‘꿈의 한 가운데서 다시 시작!’이란 책 제목이 만들어 졌다고 본다. 책은 이 사장을 가까이서 보고 그의 성품과 일하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아는 3인의 공동 집필이다.
김수삼 전 한양대 대외협력 부총장, 현대건설서 함께 근무했던 이종수 사장, LH출범 멤버로 이 사장의 업무비서를 맡았던 박동선씨 등이 증언해 준 기록물 성격이다.
공동저자들은 이 사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댐 전문가, 현대건설이 위기일 때의 구원투수, 국내 최대 공기업인 LH가 안고 있던 각종 난맥들을 정리하고 경영을 정상화 한 대가로 묘사했다. 또한 경복대학의 제5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중부권의 중심대학으로 육성한 공적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현대건설 스카웃후 해외현장 11년

이 사장은 충남 보령군 주포면 신대리의 유복한 가정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효심(孝心) 넘치는 장남정신으로 성장했다. 대전중학을 거쳐 서울 경동고와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후 ROTC 제1기생 공병 소위로 의무복무를 마친 후 건설부 영남국토건설국 남강댐 건설사무소 근무로부터 공직을 천직으로 선택했다.
남강댐 공사 이후에는 한강유역 개발조사단 일원으로 수자원개발 분야에 근무하다 업무가 수자원 공사로 이관되면서 소양강댐, 안동댐 현장에서 댐 전문가 코스를 밟았다. 이 무렵 현대건설의 스카웃 제의로 고심하다 1977년 대청댐 현장 공무부장으로 현대건설인이 됐다. 그로부터 23년간 근속 가운데 11년을 해외근무 하면서 이라크 키루쿠크 상수도 공사 현장소장으로 위기 앞에 정주영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키루쿠크 공사현장이 바로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드 반군의 전쟁터였다. 석유매장량이 100억 배럴로 추정되는 이 지역은 소수민족으로 독립투쟁해온 쿠르드족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이라크 경찰의 경계속에 공사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아랍화 정책으로 쿠르드족을 동부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무장투쟁의 난리가 나고 말았다.
섭씨 50도의 열사에다 모래폭풍이 잦은 이곳엔 숙소를 지을 자재조달마저 어려워 인근 공사장의 사무실과 숙소를 철거해 와 겨우 숙소를 세웠다. 이때 이라크 경찰의 경비 속에 이지송은 현장의 긴장과 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없이 뛰다가 의식불명으로 쓰러져 바그다드로 후송되고 말았다. 그러나 극적으로 의식을 회복하여 다시 현장에 복귀했을 때 근로자들이 쿠르드족 게릴라에게 납치되는 큰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근로자 납치 구하려 반군 본부로 잠입

당시 쿠르드 반군들은 외국인들을 자주 납치하여 몸값을 흥정하는 사례가 많았다. 1986년 8월 9일 새벽, 야간 방수작업 중에 한국인 근로자 2명과 방글라데시인 17명이 납치된 큰 사고가 났다.
때마침 이지송은 일시 귀국하여 모처럼 가족과 함께 강원도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급보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근로자 납치 관련 정보도 얻기 어렵고 석방교섭 방안도 캄캄했다. 궁리 끝에 이지송이 반군 측과 직접 석방교섭 방안을 제시했다. 이라크 정부군과 대치중인 반군과 접촉하려다 경찰감시에 들통이 나면 만사가 끝장나는 위험천만의 발상이었다.
그때 이지송은 “우리가족을 살려내는데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회사 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1987년 3월, 이지송이 쿠르드족 현지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반군 본부 잠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석방교섭은 난항이었다. 그 사이 7개월간 억류됐던 한국인 2명이 극적으로 탈출했다. 도중에 1명은 정부군과 반군 경계지점에서 낙오하여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지송의 끈질긴 협상과 우여곡절 끝에 상수도 공사는 완공되어 현장경영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

현대건설 구원투수로 8조원 수주기록

현대건설 임무를 마치고 경인운하㈜ 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경복대 토목 석좌교수로 취임했을 때 대한민국 건설 명문 현대건설의 운명이 불안해졌다. 이라크 공사대금 미수금 등으로 유동성 위기가 심각한데다가 정몽구 정몽헌 형제의 난으로 결국 채권단 관리 하로 넘어갔다.
채권단이 현대출신 심현영 사장을 발탁하여 경영을 맡겼지만 몇 년 뒤 건강을 이유로 사임하자 후임으로 이지송 사장에게 경영책임을 맡겼다. 2003년 3월 이지송 사장이 현대건설 구원투수로 취임했다.
이 사장은 건설업이란 수주(受注)산업임을 강조하며 국내외 공사 수주로 승부전을 펼쳤다. 이 결과 임기 중 무려 8조원 상당의 수주기록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2004년 건설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사장은 2003년 6월 3일에서 5일까지 ‘3일간의 기적’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한다.
신고리 원전 1, 2호기 수주, 다음날은 여수광양 항만공사, 또 다음날은 청계천 복원공사 수주 등 3일만에 1조원 수주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 사장의 주도면밀한 준비와 적극적인 작전의 성과였다.
현대건설 경영 정상화에는 이라크 공사 대금 미수금 회수가 관건이었다. 2003년 10월 워싱턴으로 출장 간 이 사장은 채권기관들과 대금회수 협상에 나서 “무기판매 대금도 아니고 땀과 기술과 자재를 몽땅 투입한 민생 공사비”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라크 미수금은 이자를 합쳐 16억5,492만 달러(1조6,833억원)로 이를 회수하면 당시 현대건설 총부채 1조7천억원에 비춰 당장 우량기업 위치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협상 끝에 총 미수금의 20%인 3억3,100만 달러와 이자를 합쳐 6억8,130만 달러 회수에 성공했다.
이 무렵 노사관계 정상화를 위해 끈질긴 협상으로 2005년 5월 임단협에 합의한 후 이 사장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그의 손가락에는 노조간부들이 만들어 준 금반지가 끼워 있었다.
정주영 회장의 혼이 쌓인 서산 간척지의 수난도 그의 솜씨로 극복해 냈다. 간척지 3,100만평 가운데 1,000만평을 담보로 현대건설이 토지공사로부터 3,450억원을 빌렸다가 경매처분 위기를 맞았다. 이 사장이 이를 무난히 해결하여 현대가(家)에서 못 이룬 정주영의 염원을 대신 성취했노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토공, 주공 통합 LH 경영 정상화

▲ ‘꿈의 한 가운데서 다시 시작’

토지공사와 주택공사가 통합되어 국내 최대 공기업으로 새출발한 LH 초대사장에 2009년 10월 7일 이지송이 취임했다. 취임식 날 이명박 대통령과 정종환 국토부 장관, 이병석 국회 국토해양위원장 등이 참석하여 LH 경영 정상화가 얼마나 긴급한 정책과제인가를 잘 말해주었다.
이 사장이 취임에 앞서 행여 축하 화환이나 난을 보내려면 쌀로 대신해 달라고 요청하여 수백 포대의 쌀이 모였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통합 LH의 진로에는 막대한 부채정리를 비롯하여 양 조직의 융합, 인사, 재정혁신 등 난제가 쌓여 있었다. 부채감축의 방안으로 사업구조를 조정하는 데는 지역민들의 반발과 지역출신 국회의원들의 압력이 작용했다.
이 사장은 공기업 경영혁신의 길은 고정관념과 부정적인 인식을 타파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접근했다. 경기도 파주 운정 3지구 주민들은 아예 LH 본사 앞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 사장이 직접 천막 안으로 들어가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들어줄 리가 없었다. 농성 천막 옆에 이 사장이 천막을 치고 밤을 새워 설득하고 대화했다. 끝내 LH의 사업조정은 순차적으로 관철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이 사장은 2012년 11월 폐암을 수술했지만 내색 없이 LH 경영 정상화의 매듭을 짓고 2013년 5월 3년 8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영원한 건설인 이지송 이야기의 줄거리 속에 “모든 도전이 끝났을 때 그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었다”는 말이 너무나 실감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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