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다가…
8년전 신문칼럼에 대한 해명

글/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2008년 2월 26일 <국민일보>에 기고했던 칼럼 “새정부 출범 무렵에”를 전재하려고 합니다. 이명박 새 정부의 조각 작업이 청문회 문턱에 걸려 난항을 겪고 있던 때였지요. 이 나라 각계에서 명성을 얻은 저명한 인사들이 인사청문회 장에서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후보자를 죄인처럼 문초하는 청문회에 고언

각료라는 자리가 저런 식의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탐할 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국무총리, 장관 후보자로 지명될 만큼 성공한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 흠을 남겼다니!’하는 배신감도 있었고요. ‘청문위원들이 제기하는 의혹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있을 텐데 이를 어쩌나’하는 걱정도 생겼습니다. ‘저리 호기롭게, 화난 얼굴과 목소리로 후보자를 죄인 문초하듯 하는 국회의원 각자는 오직 도덕적으로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이 목구멍을 간질이기도 하더군요.
아마 나이 탓이었을 겁니다. 그 전해에 정년퇴직을 했으니 좀 나이가 들긴 했었지요. 상대적으로 많이 이른 나이에 ‘논설위원’이 되어 비교적 오래 사설이나 칼럼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는 표현이 점잖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을 텐데, 그게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비판은 해야 하지만 취모멱자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당시 주필은 가끔 그렇게 주의를 환기시키시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앙앙불락이었지요. 잘못은 호되게 지적하고 따져야지, 점잖게 말해서는 누가 들은 척이라도 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자주 그러지는 않았지만 가끔 심하게 대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부끄럽게 떠오르곤 합니다. 야단을 치다가 결국은 달래기에 애쓰시던 주필의 모습과 함께요.
그래서 칼럼 문장이 좀 물러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각료직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국민의 분노를 자극하지 말고 스스로 포기하는 게 옳다. 다만 청문위원들도 예단으로 후보자를 죄인 만드는 일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높은 분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지만 고관대작만 탐할 일이랴, 이름에 때 안 묻히고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은 찾기 나름이다.”

MB 정부 출범 무렵 신문칼럼

아래 글이 그 칼럼입니다.
“옛날에 동릉후(東陵侯)가 청문(靑門)에서 외밭 고랑을 탔다더니/한여름 내 땀으로 가꾼/무우 배추가 서푼에 팔리나니/배부른 자여/은진미륵처럼 커서/코끼리 같은 벽(壁)이 되거라/나는 엄나무마냥 야위어 산다/가시가 돋힌……”(김관식, 無題)
중국 진(秦)나라 때 동릉후였던 소평(召平)은 나라가 망하자 장안성 동쪽에서 오이를 심어 생계를 이었다. 그가 기른 오이는 맛이 좋아 세간에 ‘동릉과(瓜)’로 이름이 났다(사마천, 사기 소상국세가).
부귀의 무상함을 몸으로 겪은 소평은 몇 걸음 세사에서 비켜선 모습이지만 이를 닮기에 시인은 너무 젊었던 것일까. 가진 자들이 한껏 피우는 거드름의 그늘 아래서 못 가진 자들의 텅 빈 손은 늘 아리고 시리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면서 돌아서도 마음속의 울분이 삭아지기는커녕 뾰족뾰족한 가시가 되어 돋친다.
나라 전체로 말하자면 이제 1950〜60년대의 빈곤은 옛 이야기가 됐다. 그러나 가난이 인간세상을 아주 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적빈(赤貧)은 대도시의 지하도들에 처연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다.(물론 이는 상징적인 예일 뿐이다.)
그에 못잖은 고통은 상대적 빈곤감이다. “배가 고픈 것은 참아도 배가 아픈 것은 못 참는다.” 그런 인심을 조소하는 이들도 있지만 부모 잘 만난 덕에, 줄을 잘 잡아, 어쩌다 횡재를 해서, 투기 재주로 땀이 배지 않은 부를 누리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어찌 잘못이라고만 하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이 조각(組閣)에 애를 먹고 있다. 총리 후보자부터 이런저런 자질논란에 휘말렸다. 장관 후보자들 가운데도 여론이나 야당의 손가락질을 받는 이가 여럿이다. 어떤 이는 이미 사퇴를 했고 두어 명은 사퇴압박을 받고 있다.
주로 지적되는 게 ‘부동산 투기’ 의혹이다. 논문 표절이나 중복 게재, 경력 부풀리기, 전비(前非)도 섞여 있다. 보도 내용만으로는 하자가 너무 커서 나라를 경영하는 중차대한 책무의 한 자락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가 없지 않아 보인다. 도덕적이지 못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적법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지위를 얻고 부를 쌓았다면 아무리 지탄을 받은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런데 아직은 추측이고 의심일 뿐이다. 우선 이것부터 분명히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한번 의혹의 대상이 되거나 여론의 매를 맞고 나면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사람의 일생이 한 순간에 흙탕물 속에 빠뜨려지고 마는 것이다. 옛날 죄인들에게는 얼굴에 먹으로 글자를 새겨 죽을 때까지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했다고 하지만 대중적 ‘의혹’ 또한 그에 못지않은 형벌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도덕군자로만 살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법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산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못 된다. 법이 너무 많고 복잡한 세상이다. 지켜야 할 사회적 규칙이나 납부해야 할 공과금의 가짓수도 그렇다. 일을 당하거나 고지서를 받기 전엔 모르고 살게 마련이다.
예단으로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진실이 판명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예의일 것 같다. 취모멱자(吹毛覓疵)라고, 굳이 털을 불어가면서까지 흠을 찾아내기로 들면 공직을 맡을 사람이 있겠는가. 또 도덕의 사표를 찾는 게 아니라 공직을 잘 수행할 일꾼을 선정하는 과정이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의도했건 안했건 공직을 맡기에 부적합한 이력이나 부를 가진 인사들이 있다면 스스로 포기하는 게 옳다. 그게 남보다 더 가진 사람으로서 이웃에 대한 도리다.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이런 시는 어떨지 모르겠다. 중국 동진시대 시인 도잠(陶潛)의 음주(飮酒)다. 제목과는 달리 은퇴한 이의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그리고 있다. 특히 눈길을 붙잡는 게 셋째 연(聯)이다. “채국동리하(采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꺾다가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본다.” 공직 후보자들더러 닮으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물러나 누릴 수 있는 삶도 있으니 마음 느긋이 가지라는 뜻이다.

엄정하되 품위있는 청문회가 되길 바람

그런데 이 칼럼의 내용이 “흠결 많은 후보자라도 봐줘야 한다”고 읽혔던 모양이지요. 얼마 전 몇몇 언론이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각료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의 자질 및 자격 검증에 대해 단호한 표현으로 후보자들을 질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으로 읽히고 들렸습니다. “그러고서 무슨 윤리위원장이냐”고 따지고 싶은 듯했습니다. (사실 제가 월여 전에 새누리당 중앙윤리위원장직을 맡게 됐거든요.)
그렇지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덩달아 그렇게 호통 치면 쓰는 사람의 속도 후련해 질 겁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칼럼이나 사설을 쓴 적도 많았고요. 지금까지 사설과 칼럼 합해서 한 4,000편쯤 썼으니 무슨 말인들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어 철이 나기 시작했는지, 우리의 세상살이가 너무 각박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초를 하는 측이나 받는 측이나, 저잣거리에서 멱살잡이 하듯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지요.
이 글이 게재될 즈음엔 이미 끝났을 수도 있겠지만 개각으로 장관직에 오를 세 사람에 대한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시점입니다. 벌써부터 청문위원들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죄인 다루듯 하는 청문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하는 후보자뿐만 아니라 호통 치는 의원들의 이미지도 심하게 손상되고 말거든요. 민주정치의 성숙을 위해서도 ‘엄정하되 품위 있는 청문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도덕군자로만 살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법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산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못 된다.”
위의 칼럼 가운데 이 부분을 못마땅해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이냐”고 묻더군요. “잘못을 덮어주자는 것이냐”는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자 그대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든 흠과 실수를 흘리며 사는 게 삶 아니겠습니까? 물론 아주 깨끗한 분들도 있다고 믿지만 대개는 다소간의 얼룩을 가졌다고 봅니다. 범법 까지는 아니더라도 면구스러운 언행을 한 기억 몇 가지씩은 다 안고 있게 마련이지요.
“현자의 후반생은 그 전반생에 범한 우행(愚行) 편견(偏見) 사견(邪見)을 시정하는데 충당된다.”(조나단 스위프트, 多題多想)
장관 후보자로 지명될 정도이면 현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혹 잘못이 있었다하더라도 반성에 주저함이 없으리라 믿어 봅니다. 물론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흠까지 덮어줄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조는 부드럽게 판단은 분명하게 처리는 단호하게’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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