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너무나 무서운 줄 알았기에…

내가 만난 인간 이태섭 회장
파란만장 운명극복 성공인
가난이 너무나 무서운 줄 알았기에…

글/ 장지원 세종대 평생교육원 주임교수

이태섭 회장을 만난 것은 2004년 5월 26일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노원 구민과 함께하는 “어울 마당”이 열린 곳은 600백년의 역사를 가진 <학도암>이라는 사찰이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참여한 일이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행사주관의 핵심이 (주)라프 라는 기업의 이태섭 회장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약 500여명의 노인 어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행사는 민요가수, 대중가요 가수. 그리고 강연과 품바타령으로 이어졌고 참석자 모두는 흥겨움으로 가득했다.

어려서부터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아

그 후로 필자는 이태섭 회장이 노인어른을 위한 잔치 행사에 자주 참여하게 되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노인어른들을 위하여 간식으로 빵 2천개를 주문하여 음료수와 함께 나누어 드렸지만 부족할 때도 있었고 겨울에는 떡국을 수백그릇씩 대접하고 시립요양원에 예능기부와 음식대접 등, 매년마다 2회 이상을 봉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회장님, 노인어른을 위한 봉사를 계속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저는 어려서 부모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난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어려서 깨달았고 외할머니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 ㈜라프 이태섭 회장. <사진=(주)라프>

이 회장의 그 한마디 대답으로 필자는 충분하게 이해가 되었다.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그리고 특별한 날에는 십여 곳의 고아원에 케이크를 수십 개 구매하여 택배로 배달을 시켰고 20년 전부터 불우한 어린학생에게 생활비와 학비를 후원해주기도 한다.
“아버지, 내일 점심 사 드릴게요. 시간 내주실거죠?”
“녀석아, 점심은 내가 살 테니 나오너라.”
“아니에요. 저 취직했어요. 아버지 식사 대접할 돈 있다고요.”
이 회장이 어렸을 적부터 생활비와 학비를 후원해준 청년과의 대화 내용이다. 그들이 성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버이날이나 이 회장 생일날에는 카네이션이나 예쁜 카드가 지금도 배달되어 오기도 하고 이 회장 사무실 까지 찾아오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파란만장, 기구한 운명 자력 개척

필자는 그런 사실을 접하고부터 이 회장 삶의 철학을 알았고 이 회장의 말없는 이웃사랑 실천에 고개가 숙여졌다.
리더십교육을 전담하는 교수로서 지식의 습득과 지식전달에만 애써온 필자보다 더 높고 은혜로운 리더십을 실현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태섭 회장은 본래의 성씨가 김씨이다. 초등학교를 가야할 나이가 되었지만 호적도 없었다. 친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생모인 어머니가 이 회장이 어릴 적 재출가하여 이씨와 혼인한 관계로 호적을 만들기 위해 이씨 가문으로 입적되었던 것이다.
57세가 된 지금도 이씨 성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죽을 고생으로, 죽음을 뛰어넘어 파란만장한 고비를 비집고 일어나 사업에 성공한 그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환한 얼굴이다.
그는 지금도 숫총각이다. 본인은 밝히기를 꺼려하지만 이 기회에 털어놓으려 한다.
“이 회장님, 결혼을 안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교수님, 비록 적은 재산이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하면 제가 평생 소원해온 노인복지사업과 불우한 청소년을 위해 사회 환원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이에 더욱 결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필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몇 차원 위에서 삶의 가치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2014년 그는 자서전 속에서 살아온 속내를 적나라하게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겨우 다니다가 학교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갔을 때 유일하게 여행비를 내지 못해 본인만 빠졌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졸업하고 먹을 것이 없어 머슴으로 팔려갔다가 1년치 세경을 받고 서울로 도망쳤으나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고 돈도 빼앗겨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구두 닦는 왕초에게 걸려들어 구두 통을 메고 찍세 생활을 하는 등, 견뎌내기 어려운 고비를 어린 시절에 겪었다.
‘자살’을 시도하다가 ‘살자’로 바꾸고 죽음의 늪에서 굳건히 일어선 그의 저서 인생드라마 <나의인생 나의도전>이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는 지금 약 1천억 원대의 재산을 가지고 사업을 계속하며 노인복지의 꿈을 향해 굳건한 의지로 일관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난생 처음 해외여행 감명 그때의 모습

2016년 3월 8일, 이태섭 회장은 필자가 주임교수로 있는 세종대 평생교육원 <리더십 최고위과정>에 입학하여 제1기로 사각모를 쓰고 수료했다.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원우회장을 맡아 열심히 원우들의 뒷받침이 되었으며 졸업여행을 중국 상해로 3박4일간 함께 떠나면서,
“저는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떠나봅니다. 저는 가난의 설움을 벗고자 앞만 보고 일만 죽도록 했습니다.”라며 원우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소외를 털어놓았을 때, 동행하는 원우들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고 모두가 놀랐다.
“교수님, 저도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인생을 살아가겠습니다.”
“이 회장님,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놓았고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철학과 실천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강한 신념에 감동의 박수를 드립니다.”
근자에는 자주 이태섭 회장을 만나게 되지만, 때로는 지치고 고독할 때도 있겠으나 그의 얼굴에서는 그런 면을 찾아볼 수 없었고 언제나 노인어른을 위한 일에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있다.
‘소유와 존재의 가치’를 분명하게 구분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태섭 회장은 사람향기가나는 사업가이다.
“만 60세 까지 열심히 일해서 복지법인을 세우고 노인어른의 건강한 삶을 도와드리고 또 한편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시스템도 만들어 양질의 사회교육으로 건강한 복지사업을 펼치겠습니다.” 하는 계획을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듣기만 해도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각박해져가는 이 사회에 청량제이며 산소 같은 삶의 방식이 너 넓게 퍼져가기를 소망하면서 소유보다는 존재의 가치에 머리를 두르는 기업인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해본다.
이태섭 회장의 사업이 순조롭게 번성하여 머지않은 날에 그분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