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졸후 사업전선, 정년후 재회 보람

‘대덕인물’, 이상춘 회장
골목대장 때부터 남달라
중졸후 사업전선, 정년후 재회 보람

글/ 이찬영 상록수장학재단 사무국장

1. 이상춘과 함께 자란 나의 고향

이상춘 회장과 나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도 같이 다닌 소위 께복젱이 친구다.
고향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 관기 1리 이다. 동네 이름은 관터라고 한다.
館基를 집관 자는 음(관)으로, 터기 자는 뜻(터)으로 읽어서 관터라고 부른듯하다. 김천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금릉군 대덕면 이었다. 대덕면은 김천시 서쪽 끝단에 위치 해 있으며 시내에서 32km 떨어진 곳이다. 경남 거창(웅양면)과 전북 무주(무풍면)가 맞대어 있으며 무주구천동, 나제통문도 가깝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대덕면에는 초등학교가 5개(대덕, 연화, 내감, 문의, 가례)가 있었고 이 회장과 나는 면소재지 학교인 대덕초등학교 23회(68년 졸업) 졸업생이다. 당시 전교생이 800명이 넘었고 우리 동기도 130여명 되었었다.
짐작컨대 5개 초등학교 전체 숫자는 1,500명이 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면에 대덕초등학교 하나만 있는데(통폐합) 전교생이 30명도 안된다고 하니 세월의 변화와 농촌의 현 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춘 회장도 틈만 나면 늘어나는 노인문제, 급속히 줄어드는 인구 문제를 경제와 연관 지어서 걱정의 목소리를 높인다.
대덕면에는 대덕산(해발 1,290m)이 있다. 대덕면과 무풍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소백산맥과 가야산맥의 분기점이다. 산의 남동쪽에는 가야산국립공원이 남서쪽에는 덕유산국립공원이 있다. 또한 동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甘川)이 발원하고 서쪽으로는 금강의 지류인 무풍천(茂豊川)이 발원한다.
우리 고향 대덕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협곡형이라 물은 맑고 좋지만 상대적으로 논, 밭이 적어서 근본적으로 가난했다.

2. 김천서 자취하던 중학교시절 추억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에는 부모님을 도와 일했다.
방학 때에는 일을 더 많이 하였다. 그 시절은 대도시 외에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일터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보통 겨울에는 지게지고 먼 산까지 나무하러 다녔고 아침. 저녁으로 소죽 끓이는 일과 여름에 소먹이고 꼴 베는 것이 기본적인 일과였다.
모든 친구들이 다 그랬다. 그런데 이 회장 부모님께서는 이 회장에게 다른 친구들보다 그렇게 일을 많이 안 시킨 것으로 기억한다.
경운기나 리어커도 없던 시절 모든 것을 사람이 직접 해야 되므로 일손하나가 귀하고 필요한 때에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은 엄청난 사랑과 희생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학교 시절의 이 회장은 골목대장에 가까웠다. 학교에서도 요즘 애들이 말하는 짱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출생신고 등 호적정리가 잘 안되어 실제 나이가 아주 많았던 친구를 제외 하고는 그랬던 것 같다. 비슷비슷한 친구들과 자주 자웅을 겨룬 것으로 알고 있고 승부욕이 대단하여 거의 이긴 것으로 기억된다. 이 회장 아버지가 씨름을 하셨고 힘이 장사셔서 이 회장이 이어 받은 것 같다.
여학생들도 괴롭혔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 회장이 중학생 때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줄려고 수학여행가서 목걸이를 샀는데 전해 주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부족한 용돈에 먹고 싶은 것 참고 아껴서 산 선물일 것인데... 이 회장에겐 그런 순정도 있다.
우리 동네 관터에서 동기생은 모두 13명 이었다. 이 중에서 중학교에 간 사람은 5명이다. 그나마 거의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 때 면에는 중학교가 없었고 32km 떨어진 김천이나, 30여km 떨어진 거창으로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 하숙은 엄두도 못냈고 자취를 하였다. 문제는 초등학교 졸업한 남자 애들이 밥할 줄도 모르고 연탄을 사용해 본적도 없고 번개탄도 없던 때여서 무척이나 고생했다. 전기밥솥, 냉장고가 없어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반찬을 며칠 못 먹고 쉬어서 버리기도 했다. 당시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고 감자, 고구마 등으로 점심 끼니를 이어가던 시절에 자취를 하면 매달 쌀 한 말씩이 필요했다.
이 자취 생활은 혼자서는 못하고 선배하고 하게 된다. 모든 걸 선배에게 배우고 선배가 졸업하면 내가 선배가 되어 후배를 맞아 가르치고 내가 졸업하면 이 후배가 선배가 되어 후배를 맞는 식이다. 그런데 이 짝을 만나지 못하거나 중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헤어지기라도 하게 되면 어려움이 찾아온다. 대덕 같은 골짝에서 중학교 한명 보내기가 요즘의 대학교 보내기보다 어쩌면 더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이 회장과 나는 부모님들의 열정과 희생 덕분으로 김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이 회장과 내가 가끔 옛날을 이야기 할 때마다 그때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중학교 과정이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회장은 줄줄이 이어지는 동생들 진학 등으로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당시 돈 500원을 가지고 울며 상경하면서 사업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께 가난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는 것과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돕겠다는 것과 가난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중단한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박사도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현실화 된 일화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과정을 간증이나 강의 등을 통하여 들을 때마다 가슴 벅찬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며 절로 박수가 쳐진다.

3. 양가 부친은 백마고지 참전 전우사이

이 회장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친구인 동시에 전우이시다. 6.25 전쟁 당시 미2사단에 배치되어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참전하셨다. 같은 마을에서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서 전쟁이 끝난 후 제대하여 살아 왔으니 꼭 꼬집어서 애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 내면 깊은 곳에 서로의 위로와 의지 같은 것이 있지 않았겠나 싶다.
이 회장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 그리고 성악가 형 어머니는 인정이 많으셨다.
우리 어릴 때 보따리장사 아줌마들이 가끔 와서 며칠씩 숙식하며 장사를 하고 돌아가곤 했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거의 위 세집에서 기거하였다.
당시의 환경으로 봐서는 재워줄 수 없는 것이었고 먹는 것도 그랬다. 딸. 아들 우글거리는 환경에서 어떻게 재워주고 먹여 주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릴 적 기억으로 자주 오는 보따리장사 아줌마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
이 회장은 가끔 인정 많고 베푸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복의 근원이 아닌가 이야기 한다. 집에 찾아 온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무엇인가 손에 들려 보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 어머니의 인정과 선행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 회장과 나는 중학교 졸업 후 헤어졌다. 그 후 첫 만남은 이 회장이 용산 원효로 친척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프링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1974년도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가 갔을 때 기름 묻은 옷과 얼굴로
나를 맞았고 손이 더럽다며 옷에 쓱쓱 문지르고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공장 견학과 설명이 있었는데 스프링 제작 과정이 신기하였고 열처리하는 시설이 공장안에 같이 있다 보니 석탄가루 등으로 인하여 환경이 안 좋다는 기억은 있다. 장기도 둔 것 같고 자장면도 먹었다.
그 후 1977년 5월 용산구 신계동에 대신스프링사를 설립하였다는 것은 풍문으로 들었었다.
그리고 1978년 8월 이 회장이 구로구 구로동 (코카콜라 회사 근처)으로 회사를 옮기고 원일정공사로 상호도 변경 한 것을 나는 다른 친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때 나는 장교로 입대하여 군 복무 중이어서 모임 같은 곳에 참석하지 못하고 어쩌다 고향에 오게 되면 소식을 묻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으로 기억하는데 일산 9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던 내가 용인 군사령부에 출장을 가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원일정공사를 방문하였다. 친구도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친구가 설립한 회사를 구경하고 싶었다. 음료수 한 박스 달랑 사서 들어갔다. 반 지하였지만 꽤나 넓었고 기계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친구가 그 때는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운전병에 지프차를 타고 왔으므로 오래 있지 못하고 헤어졌다.
1984년 원일정공사가 부천에 제1공장을 설립한 후에도 한번 왔었고 1987년 공장증축 및 이전 때에도 왔었다. 새로 지은 건물에 컴퓨터실이 있었는데 컴퓨터로 디자인 한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관공서나 공기업에도 컴퓨터가 없었고 타자로 하던 시절이었다 한 부서에 타자기 한 대와 타자수가 있었다. 두고두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이 때 나는 공기업에 입사했고 또한 우리는 동네에서 남자 친구 계를 만들어서 적어도 일 년에 한번은 얼굴을 보며 살았다.
이렇듯 이 회장과 나는 오래전부터 자주는 아니어도 만남은 이어져 왔으며 나는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늘 이 회장을 자랑하였다. 굴곡의 시간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매출액도 모르고 지금처럼 알려진 회사도 아니었는데도 그냥 대단한 회사라고 자랑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 회장이 통역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데리고 매년 일본에 있는 회사를 장기간 견학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최신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과 제품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것도 자랑거리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이 회장은 사고가 이미 남들보다 달랐고 앞서 있었다고 생각된다.

4. 주경야독하며 나눔과 섬김 경영

2014년 12월로 정년퇴직이 예정된 나에게 6개월간의 공로연수기간이 주어졌다.
늦게 결혼한 나는 아이들을 다 양육하지 못하였다. 딸, 아들인데 딸은 대학졸업 하고 취직을 했고 아들은 제대 후 중국 유학중이다. 그래서 일을 더해야 했고 이 회장을 찾았다. 내 사정을 다들은 이 회장이 집에 있지 말고 사무실에 자리 마련해 줄 테니 출근해서 업무도 파악하고 적응해 보라고 했다. 내세울 것 없는 나에게 쉽지 않은 결단을 한 이 회장의 도움에 항상 감사하며 고맙게 생각한다.
이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77년 5.20 21살에 회사를 설립한 이 회장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SCL을 안정된 회사로 발전시켰고 우리나라 산업발전에도 크게 기여 하고 있다.
업무에 있어서는 신속한 결정과 실행인 것 같다. 강력한 추진력과 열정이 더해진다.
이런 면은 공무원 사회나 공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본다.
회사경영과 더불어 이 회장은 배움의 끈도 놓지 않고 주경야독 한 것을 알 수 있다.
숭실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경영대학원 MBA 석사과정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AIP수료,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AMP수료, 숭실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다.
이 회장은 나눔과 섬김으로 사회에 이바지 한다.
2008년 사재 105억원을 출연하여 상록수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1,600명의 학생에게 23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이 장학재단은 건물을 기부하여 임대수입 (연 5억여원)으로 장학금을 주기 때문에 중단될 염려가 없다.
해외에는 태국, 라오스, 중국, 카자흐스탄 등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지어 빈곤에 힘들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눔 사랑을 실천하고 국내에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 고액기부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부부 가입자이고 또한 기부자 조언기금 1호 가입자이다.
국립암센터, 숭실대학교, 김천대학교, 김천시 인재육성재단 등에 고액을 기부하였고 모교인 숭실대학교에는 숭실 평화통일 나눔 재단을 숭실대 총장과 함께 설립하였다.
또한 초등학교 동기모임 등에도 매년 도움을 주고 있는 등 크고 작은 것까지 열거 하자면 끝이 없다.

5. 재경김천향우회장 취임후 고향봉사

이 회장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잠언 11장 24절에서 25절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또한 이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눔은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는 것이다”라고. “심는 것”이라고 그리고 강의나 간증 때에 “ 경주 최부잣 집 가훈 ”을 꼭 이야기 한다.
2015년 숭실대학교 통일리더십 스쿨 강의 때 학생들에게 이런 강의를 하였다.
학사 위 과정이 석사고 그 위가 박사고 박사 위가 밥사고 밥사 위가 감사고 감사 다음이 봉사라는 것이다. 감사와 봉사를 인간 최고의 인격단계로 본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당진공장에서는 10년 이상 김장을 담아서 주변에 어렵고 소외된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봉사를 하고 있다. 작년에는 재경김천향우회 봉사부도 함께 동참했다. 그리고 청량리 밥퍼 봉사 등 다양한 봉사에 참여한다.
2015년 재경김천향우회 회장에 취임 후 드리다의 의미인 “드림회”를 조직하여 조직 활성화 및 봉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2016년 1월 19일 “나눔 2000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대식을 가졌다.
이 운동은 한 구좌 5,000이상 기부자를 2,000명 이상 모집하여 저소득층과 소외계층 어르신들의 허리, 무릎, 백내장, 치아 등 질병치료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가입자가 460여명으로 금액은 월900만원이 된다. 김천시 노인복지계 협조로 각 읍·면·동장의 추천을 받아 추진하는데 13명에게 3,000여만원 지원키로 했고 자원봉사를 하다 다쳐서 수술을 12번 이상한 이순자씨의 수술비 500만원 지원을 비롯하여 치료 일정에 따라 지원하게 된다.
재경김천향우회는 매월 말 결산회의를 한다. 회계보고와 현안사항 논의, 의결 등이다. 이 자리에서도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나눔 2000운동이다.
많은 사람이 동참하여 고향의 어려운 어르신들을 돕고 좋은 일에 동참함으로 보람과 내적 자아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 회장의 사회에 대한 나눔과 섬김의 자세야 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인 것 같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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