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에 대한 기대 보답
친구의 모친 치매 돌봄 미담에 감동

부친은 ‘호인’, 모친은 ‘인정’
장남에 대한 기대 보답
친구의 모친 치매 돌봄 미담에 감동

글/ 장성현 김천출신 성악가

1. 고향 ‘관터’ 앞뒷집 사이

SCL 이상춘 회장 주변에는 이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나, 나도 누구보다 이 회장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상춘 회장과 나는 김천시 대덕면의 <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난 동향의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이 회장 가정과 우리 가정은 고향마을의 앞뒷집에서 가까이 살았는데 부모님들은 그릇과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형제 이상의 깊은 고향의 정을 나누어 온 각별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인, 1962~1966년까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개획이 시작되었고, 1967~1971년까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어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고 공업국가로 발돋움을 하려고 많은 힘을 쏟을 때였다. 이 회장과 나는 초기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될 때에 자라난 세대인 것이다. 그 때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아이들이 두 가지 진로를 택하여 사회에 진출하였는데 각 반에서 극히 일부 학생들만 중학교 진학을 하고 그 외의 학생들은 살기가 힘들어 집에서 농사를 짓든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는데,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공부하곤 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가난한 나라여서 불평할 틈도 없었으며 요즘과 비교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근무여건에 시달리면서도 기술을 배워서 장차 성공할 기반을 닦아나간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중학교는 진학할 수 있었지만 이상춘 회장 부모님은 슬하에 모두 6남매를 두셨는데, 지금의 형편은 가난하고 어렵지만 사람이 희망이 있으려면 공부를 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회장을 김천까지 중학교 유학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회장이 1960년대 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단돈 500원을 들고 작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으로 기술을 배우려고 상경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2. 부모님의 근면, 열정 대물림 받아

어린 시절 이 회장 부모님은 맏아들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대단한 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님은 고등학교 진학도 못시킨 아들을 객지로 보내면서 마음이 아파겠지만 아들의 성실성과 가능성만을 믿고 밀어주고 기다려 준 부모님은 오늘날의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의 부모님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어린 나이의 자식들을 독립시켰고 연단시키면서 성공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CL 이 회장의 오늘의 성공스토리가 있기까지는 이 회장 부모님의 삶의 열정과 성실성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가능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회장 아버님은 부지런하시기도 했지만 시골에서는 드물게 힘이 좋으시고 잘 웃으시는 호인의 풍모를 가지고 계셨다. 이 회장이 여러 자식들 가운데서도 가장 덕스럽고 베풀 줄 아는 것은 아마 아버지의 성품을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은 내 친한 고향친구인 홀어머니가 치매가 걸려서 고생하셨는데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친구 집을 방문하여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데리고 공원에 같이 모시고 가서 친부모처럼 산책도 시켜 드린 일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 감동받은 일이 있다. 내 부모도 못 모시는 세상인데 뭐가 답답해 남의 부모까지 일일이 챙기겠는가? 이 회장은 언제나 우리 부모님, 친구의 무모에게도 똑 같이 대하고 도와주는 인간다운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한참 회사가 성장하고 어려울 때도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고향에도 구석구석마다 많은 물질로 지원하고 베풀어 왔었다. 그 때마다 이 회장은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실행에 옮겨 도와주곤 하였는데 돈이 있다고 도와주고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베푼다는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이 회장의 아버지는 군대 시절 미군부대에 복무하셨다는데, 부대의 씨름선수로 뽑혀서 덩치 큰 미군들을 많이 넘어뜨리고 우승했다는 이야기는 퍽 재미나고 통쾌하고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어머니도 마을에서 꽤나 부지런했는데도 이 회장의 어머니와 비할 바가 못 될 정도였다. 내 고향 대덕에서도 그 부지런함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지런했고 농사일을 시원스럽게 척척해내는 억척같은 어머니셨으며 그 힘든 일을 감당하시면서 많은 자식들을 다 키워내시고 공부를 시키셨다. 특히 우리 집과 이 회장의 전답은 아주 멀리 있어서 부모님들이 특별히 많은 고생을 하신 걸로 기억한다.
특히 이 회장의 어머니는 베풀기를 좋아하셔서 내가 방학 때 고향에 오면 꼭 날 먹으라며 음식을 담 너머로 주시곤 했다. 특히 음식솜씨도 좋으셨는데 때때로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면 “아이고! 앞집 이상춘 엄마는 희한하게 잠시 주물럭 주물럭하면 맛있는 음식을 짭짤하게 잘도 만들어 낸대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러워했던 생각이 난다.

3. 오랜 신앙생활로 나눔경영 실천

마라톤대회를 보노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출발총성을 듣고 출발하지만 준비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낙오하는 많은 선수들을 본다. 우승은 오직 한 명만이 결승선을 통과하여 우승 면류관을 받는다. 언제인가 방송에서 “한국은 물론 세계 많은 유망 기업들의 흥망성쇠는 경영주 한 사람의 판단과 비전에 의하여 결판이 났다”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 회장은 60년대부터 기술을 배우고, 기업을 설립하여 기업문화와 경영에 대하여 뼈 속 깊이 터득하고 체험하면서 내가 경영주로 있는 회사의 미래에 대하여 국내외에서 기업 경쟁력은 물론, 앞으로 기업이 나아갈 비전을 많이 고민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회장의 경영은 장학사업, 나눔 행사, 저개발국가에 대한 학교건립, 대학에 대한 지원, 해외 지원과 봉사 등 나눔을 실천하면서 기업의 아름다운 문화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며 많은 젊은이들에게 기업의 이념을 통하여 꿈을 심어주고 내일의 지도자를 키워내는 일에 전력투구로 비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 회장이 매일 기도하면서 얻어지는 이런 앞서가는 비전과 생각이 없었다면 수없는 기업의 흥망성쇠 속에서 이 회장의 SCL이 과연 오늘까지 살아남았을까 하는 반문을 해본다.
요즈음도 가끔 이 회장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경주에 오면 대화할 때가 있다. 작년에 이 회장이 김천향우회장까지 맡고 있으면서 고향 김천을 위한 <나눔2000> 행사를 기획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존경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앞으로 자신의 할 일과 경영자로서의 앞으로의 꿈을 말하는 것을 들어볼 때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이나 기업의 경영자들이 기업을 부정하게 경영하기도 하고 말과 행동이 달라서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기업인이 국민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행동들은 국민들의 반 기업 정서를 더욱 확장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 회장의 진실하게 행동하는 아름답고도 훈훈한 소식을 접할 때 마다, 마치 행복의 바이러스가 번져가듯이 여러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기쁨을 나누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앞으로 이 회장이 계속적으로 사회와 아름답게 소통하고 나눔을 실천해 간다면 SCL은 한국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그 브랜드 가치의 위상은 점점 더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즈음도 서로 만나면 내가 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회장은 무조건 건강해야 돼! 아프면 안 돼! 그래야 좋은 일을 많이 하지. 누워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
이 회장이 또 어떤 새로운 비전을 우리들에게 주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인지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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