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만원시대’… 구로공단 수출시대
스프링을 고리로 부품산업 창업성공

15세 소년의 上京이야기
그때 그 세월의 추억들
‘서울은 만원시대’… 구로공단 수출시대
스프링을 고리로 부품산업 창업성공

▲ 60년대 섬유/봉제산업을 이끌었던 구로공단. <사진=국가기록원>

꿈 많은 15세 소년 이상춘이 단돈 500원 갖고 서울로 올라온 1971년은 나라님이 앞장서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독려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매일같이 ‘노는 일손’들이 무작정 상경했고 배움의 길을 못 찾은 젊은이들이 ‘일하며 배우겠다’는 꿈으로 서울의 구로공단을 찾았다. 당시 5.16 정부는 농공병진(農工倂進) 책으로 수출공단을 조성하여 상시 근로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서울은 만원’시절 무작정 상경 풍경

이 시절 시중에서는 공단 젊은이들을 ‘공돌이’, ‘공순이’나 여공(女工), 직공(職工)이라고 마구 불렀다. 반면에 수출입국을 주창한 나라님은 수출전사(輸出戰士)라고 깍듯이 부르며 예우코자 했다. 가난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야근, 특근으로 수출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그들이 바로 조국근대화 일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년 이상춘이 상경하던 날 서울은 이미 만원(滿員)이라 불렸다. 인기소설가 이호철(李浩哲)씨가 동아일보 연재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통해 각가지 도시병을 고발했었다. 그렇지만 이 무렵 서울 구로공단, 울산공단 등에서 밤낮없이 일한 젊은 산업전사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들임은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 대규모의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무작정 상경 세태를 다룬 신문기사. <사진=스캔>

대다수 국민이 배고픈 시절,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은 고학(苦學), 야학(夜學), 독학(獨學) 아니면 달리 길이 없던 시절이다. 수출공단 산업전사들은 ‘일하며 배우자’는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월급은 집으로 송금하고 야학으로 공부하여 자신의 뜻을 세운 이 시대의 소영웅들이었다. 이들 산업전사들 가운데 독립하여 기업전선에서 자수성가한 모델이 많이 나오고 진학을 계속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자녀를 키워 판·검사 어머니가 된 사례도 언론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은 세월이 발전하여 옛 구로동 수출공단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람한 최고층 빌딩 숲으로 변해 최첨단 창조경제의 산실로서 새로운 미래역할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SCL 이상춘 회장의 자수성가 성공기도 바로 이 무렵의 이야기에 속한다.

수출공단 역군들… 교복과 책가방 소원

수출공단 남녀 수출전사들의 소원이 교복과 책가방으로 조사됐다. 공단 작업이야 아무리 고달파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같은 또래들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모습은 너무나 부럽고 간절하다는 응답이었다.
5.16 정부가 기업인들을 독려하여 야간 실업고 설립을 권장하고 공업계 고등학교 설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을 공장과 학교로 확산시키는 정책도 폈다.
당시 새마을운동 화보집에 몽당연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전북 김제시 봉남면 신흥리 소재 초처국민학교에 겨우 2cm의 끄트머리만 남은 몽당연필이 세 가마니에 달했다. 이에 절약과 근면을 강조하던 정부가 학교 새마을운동 우수학교로 표창했다.
경남 마산의 한일실업이 1974년 최초로 야간 실업고를 설립했다. 1976년 9월 7일, 당시 경제기획원 월례 경제동향보고 회의에서 새마을지도자 활동상을 보여준 슬라이드에 한일여자실업고 첫 입학식 장면이 소개됐다. 하얀 교복과 책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감격하여 울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슬라이드가 끝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김한수(金翰壽) 회장에게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고 언론이 보도하여 널리 알려졌다. 한일실업고는 1977년 2월 17일 1,258명이 첫 졸업식을 갖고 교장과 졸업생 대표가 청와대로 보낸 감사의 편지를 통해 “각하께서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주시고 새마을 장학금을 지원해 희망과 용기를 가졌다”고 밝히고 이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교정 현관 앞에 상록수를 심어 위덕을 기리고 있다고 적었다.
1978년에는 삼성그룹 제일합섬이 부설 성암여중고 실업고를 개학, 1981년 3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때 월간 학생중앙이 제일합섬 사보(社報)를 인용하여 ‘한올씩 엮어낸 눈물의 졸업장’이라고 표현했다. 합섬공장 여성근로자들이 엘리트 학생복지 교복에 단발머리 하얀칼러와 책가방 모습으로 바뀌어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 1977년 당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방문중인 박근혜 현 대통령. <사진=국가기록원>

이날 학교장 오명주, 학생대표 김분희 씨가 ‘대통령께 드리는 감사문’을 통해 졸업생들의 대다수가 50만원에서 400만원까지 저축하여 일하면서 배우고 저축할 수 있었다면서 감사했다. 6.25 참전용사인 당시 엄경호(嚴敬昊) 사장은 이날이 재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졸업식이었다고 회고했다.
같은 시기 이상춘 소년은 스프링 공장에서 6년여 견습, 실습, 기능체득으로 독자적인 기업을 설립, 자수성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고학력 미취업자… ‘못살겠다 이민가자’

무작정 상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출공단에서 꿈을 키우고 있을 때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을 못한 상당수 고학력자들이 사회를 떠돌았다. 그중 일부는 “못 살겠다, 이민가자”면서 서류를 들고 관청을 출입하고 있었다.
미국에는 자유가 있고 무한정한 ‘아메리칸 드림’이 기다리고 있다고들 했다. 미국 비자가 어려우면 캐나다나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안내하는 브로커들도 많았다.
미국으로 이민 갔던 친구들이 한참 뒤에 일시 귀국했을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이제 우리도 밥 먹고 살게 됐다”고 말하자 “밥만 먹고 살면 돼지나 다를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핀잔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민생활의 편익을 자랑하면서 “미국에는 양주 마시고 양담배 피워도 죄가 되지 않는다”, “장발단속 없고 분식·혼식 강요 없고 통행금지도 없다”고들 예찬했다. 6.25 이후 치안불안으로 실시했던 통금(通禁)은 1982년 1월에야 5공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해제했다. 또 양주, 양담배 금지도 없어지고 장발단속과 분식, 혼식 도시락 검사가 폐지된지도 오래됐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그 세월’의 추억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그때의 집권자가 지금이라면 양주, 양담배 금지하고 장발단속 하겠느냐고 생각된다.
지나고 보니 오늘의 대한민국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발전해 온 역사의 길일뿐이라고 여겨진다.

자동차 육성시책 호응 부품국산화 동참

자동차 산업은 경제개발 5개년 성과가 국민의 재미로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정부가 국산화 계획을 발표했다. 1960년대 후반, 1970년 초반까지 자동차 국산화란 멀고 먼 꿈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입대체, 기계공업 육성, 수출산업 육성 차원에서 자동차 국산화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크게 보면 기계공업 육성계획으로 자동차, 조선, 기계, 전자공업에다 정밀, 화학공업까지 서둘러 종합 육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자국산 자동차를 타고 있는 국민은 고작 10여개국에 불과했다.
5.16 혁명주체에 속하는 이낙선(李洛善) 상공부장관이 국세청장 시절의 ‘불도저’ 이미지를 앞세워 자동차의 수출산업화를 앞장서서 독려했다. 기계공업 국산화를 위한 수입대체를 통해 만성적인 대일(對日) 역조(逆調)를 개선하고 연관산업들을 한꺼번에 육성할 수 있다는 꿈의 청사진이었다.
정부가 자동차공업 육성시책을 들고 나오자마자 시중에서는 ‘마이홈’과 함께 ‘마이카’의 꿈이 유행했다. 분명히 성급한 꿈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마이카’시대가 열린 것은 오늘의 우리가 체험하고 확인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국산 자동차의 시초는 6.25 때 미군용 차량을 분해, 조립한 하동환(河東煥) 자동차로 거슬러 올라가고 일본에서 볼트너트 공업을 익힌 김철호(金喆浩)씨의 3천리 자전거로부터 세 발 3륜차, 네 발 봉고차에 이어 국산 첫 모델 ‘브리사’(Brisa)로 회고될 수 있다. 그러나 5.16 정부의 자동차공업 육성책과 10.26 국변 이후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김창원(金昌源) 회장의 신진자동차, 정세영(鄭世永) 회장의 현대자동차,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대우자동차로 경쟁하다가 오늘의 현대·기아차 그룹, GM대우, 쌍용차와 삼성그로 등으로 재편됐으니 격돌과 분열의 연속이었다.
신진자동차는 5.16 정부의 부평 새나라를 인수하고 일본 도요타와 제휴 코로나 승용차로 기세를 올렸지만 오래지 않아 내분으로 멸망하고 현대차는 미국 포드와 제휴 코티나를 출시했다가 국산 첫 모델인 포니(PONY)로 팔자를 고쳐 오늘의 한국자동차 본산을 이뤘다. 대우는 부실기업 개조 전문으로 새한자동차를 인수, GM 코리아로 갔다가 중공 주은래(周恩來) 수상의 4원칙 외교에 따라 GM 철수로 고전, 오랜 진통과 곡절 끝에 오늘의 GM대우로 생존하고 있다.
이상춘 회장의 SCL도 이 무렵 한국자동차공업 육성책에 맞춰 부품공업 국산화에 동참코자 창업하여 꾸준한 연구개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인구절벽, 자동차수요 감소시대 대응

자동차 부품산업 외길 40년의 이상춘 창업주는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내다보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전문 강소(强小)기업의 발전방향을 설계하고 있다.
㈜에스씨엘은 이미 창업 이래 오일쇼크 파장, IMF 외환위기, 글로벌 경제침체와 저성장기 충격을 고루 체험했다. 이제 다시 기후변화와 친환경, 저출산 고령화의 인구감소 시대 등 여러 가지 환경요인으로 전기차에서 무인자동차 시대까지 내다보고 대비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에스씨엘의 끊임없는 연구개발도 하이브리드카와 전기차 시대에 대응하여 새로운 첨단부품 개발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자동차의 외형이 바뀌고 경량화와 친환경에다 무인화시대로 비약하더라도 내부의 기계적인 요소기능은 남게 된다. 프레스 기능, 스프링 기능 등 기술과 성능은 더욱 고도화 될지언정 기본 바탕은 크게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구감소에 따른 자동차의 양적 수요 변화는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우리나라 인구는 신생아 보다 사망자 수가 많은 자연감소에 의한 ‘인구절벽’ 현상이 다가왔다. 전남과 강원도 등은 지난해부터 자연감소, 경북과 전북은 2017년부터 자연감소, 강원도 강릉시의 경우는 초중고 학생수보다 경로당 노인수가 1만여명이나 많다는 통계 분석이 나왔다. (조선일보 5월 25일 보도)
한동안 서울은 만원이라고 했지만 올해 인구통계는 서울인구가 999만명으로 1,000만명 시대가 무너졌다. 인접 경기도로 많이 이전하고 출향지 등으로 귀향, 귀농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로는 행정수도 세종시와 공기업이 이전했거나 혁신도시인 나주, 진주, 김천, 원주 등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
전 세계의 시장으로 꼽히는 중국대륙 인구도 14억에서 머지않아 10억 이하로 감소할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인구 증가의 정체 및 감소 추세도 자동차산업의 성장전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상춘 회장은 국내는 물론 중국 등지에 사업장을 두고 있으면서 기존 중국의 천진, 북경 이외에 상하이 등에 신규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비록 시장의 규모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의 기본수요에 따른 첨단부품 시장의 경쟁력 우위가 앞으로의 생존과 지속적인 발전의 기본방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경험한 창업주로서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미래를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게 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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