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경시풍조, 출판 상업주의 사라져야

[2030목소리-어른들은 몰라요]

공공연한 대리번역 폐해
‘마시멜로 이야기’ 교훈
번역경시풍조, 출판 상업주의 사라져야

글/ 김문영(외환은행 번역팀, 30세)

아나운서 정지영이 번역한 ‘마시멜로 이야기’는 그녀의 유명세와 한경BP 출판사의 스타마케팅에 힘입어 작년 10월까지 38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약 100만부의 판매를 자랑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실제 번역자 김씨가 이 책이 대리번역 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정지영 아나운서는 러닝개런티 계약에 따라 받은 약 8천만원에 이르는 번역료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를 믿고 책을 구매한 독자들 중 131명이 지난 11월에 정신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1억원에 이르는 집단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현재 번역사인 필자는 번역계가 뼈저린 반성과 자기 개혁을 한다면 이 사건을 번역계가 진일보(進一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리번역을 폭로한 김씨의 용기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은폐되었을 테지만, 번역계에서 적지 않은 대리번역이 행해진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필자는 대리번역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출판사와 번역자와 독자 모두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출판사는 번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창조의 결과인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고, 누가 해도 상관없이 잘 팔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듯이 보인다. 이렇듯 번역을 경시하는 풍조와 돈만 벌면 된다는 ‘극단적인 상업주의’는 하루 빨리 퇴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도의 상술이 개입된 행위로 독자를 기만하는 사기이자 범죄행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번역사의 용기와 양심의 문제이다. 웬만한 번역사라면 번역계에 입문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에이전시는 이렇게 입문하는 번역사들에게 대리번역을 요구하는데, 이는 번역사들이 한두 번은 겪어봤을 얘기이다. 번역사들은 생계의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이 요구에 응하게 된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 김씨도 번역료로 200만원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한다.
번역사들이 노력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번역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매명(賣名)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출판사의 요구에 분명히 거절할 수 있는 번역자의 용기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마지막으로는 독자들의 독서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은 일 년에 평균 15.6권의 책을 읽으며, 4명 중 1명 꼴로 일 년 동안 단 한권도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한국일보, 2006년 12월 15일자)고 한다.
이렇게 독자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기 때문에 출판계는 불황에 시달리게 된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중심리가 스타마케팅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마시멜로 이야기’도 유명인이 번역했다는 사실만으로 화제가 되었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자 너도나도 책을 사보는 풍광이 연출되었다. 번역자의 이름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무게를 둘 수 있는 독자들의 수준 높이기 또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리번역 사건이 집단 소송으로까지 번지면서 출판계와 번역계는 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번역계는 말한다, 언젠가는 터질 고름이었다고. 이번 사건을 통해서 더 이상 번역과 출판계가 부도덕한 관행을 되풀이하지 말고 악습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특히 번역계의 개혁이 필요하다. 번역가들에게 적정단가와 납기를 보장하는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번역 품질을 높이고자 하는 내부 노력 또한 필요하다. 자성의 목소리만이 오명으로 얼룩진 번역계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왜 여성사인가’(Why history matters)에서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번역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미의 다른 층들은 모두 놓칠 수 있다. 단순한 내용 위에서 공명하는 박자와 음조의 떨림을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번역은 글자를 그대로 옮기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많은 배경 지식과 연습 그리고 노력이 필요한 총체적인 작업이다. 번역사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정당한 대우를 통해, 그들이 더 이상 양심을 팔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기를 기원해본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0호(200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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