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죄과 알고 있는 유일한 일왕

[일본과 일본인 제23화]

아키히토 퇴위전에 초청
독립유공자 묘역 제단서
과거사 사죄의례 어떨까

일본의 역사죄과 알고 있는 유일한 일왕



글/ 이원홍(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일공사, KBS 사장,문화공보부장관 역임)

반가사유상과 생전퇴위

아키히토 일본천황(明仁日本天皇)이 한국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 이달 초 TV와 신문, 인터넷에 게재되었다. 한일수교 50주년 기념행사로 도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이 마련한 두 나라 “미소 머금은 부처님”, 반가사유상 전시장에서 내외가 함께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와이셔츠만 입은 캐주얼 차림으로 회중전등을 켜고 미소가 번져있는 부처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7월14일 아키히토 천황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생전퇴위(生前退位)를 하겠다는 계획을 언론에 공개했다. 천황은 1933년생, 올해 82세다. 부친 소화천황(昭和天皇)의 사망으로 1989년에 125대 천황에 즉위하여 올해가 재위(在位)27년째다. 신문은 1면 톱 배너로 이 사실을 보도하고 방송은 추적에 바빴다.
일본의 황실제도는 천황의 퇴위를 천황의 사망일로 지정하고 있다. 200년 넘어 지켜지고 있는 제도다. 여론은 대체로 82세 고령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천황 편이었지만 개중에는 아베 총리의 국정운영이 천황을 괴롭힌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도 있었다. 정부 측의 코멘트는 아소(麻生太郞) 부총리가 섭정(攝政) 운운한 것 정도다. 그러나 반응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 아키히토 일왕 내외가 4일 저녁 일본 도쿄 우에노의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해 ‘ 미소 짓는 부처—두 개의 반가사유상’특별전에 전시된 한국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보고 있다. <사진=주일한국대사관>


대통령의 운동권식 외교발언

이런 일이 생기면 글 쓰는 사람들은 과거의 자료를 들추어보는 것이 버릇이다. 필자도 2012년 9월 21일자 한국일보 2면에 게재된 박스 기사를 스크랩에서 찾아냈다.
일왕 “언젠가 방한 원해, 사죄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제목의 도쿄 특파원 한창민 기자의 기사다.
《아키히토 일왕이 최근 외무성 간부에게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일본의 주간지가 보도했다. 주간지 여성자신(女性自身)에 따르면 아키히토 일왕은 4일 쓰르오카 고지(鶴岡公二)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에게 “언젠가 우리(일왕과 왕비)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키히토 일왕은 또 “앞으로도 일본과 한국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는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배경에 관해 설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이후 일본에서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나 당사자인 일왕의 반응이 외부로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발언은 일왕 부부가 외교 현안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쓰루오카 국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 것으로, 당시 일왕은 한일, 중일 갈등에 대해 질문하는 과정에서 이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간지)여자자신은 아키히토 일왕이 이전에도 “(일본)정부가 원하면 방한하고 싶다.” “나는 (한일)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라면 현지(한국)에서 사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는 모 국회의원의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상이 기사의 전문이다.

아키히토, “한국서 사죄하는 것이 더 쉬울 듯”

여성자신(女性自身)은 일본의 여성 주간지 가운데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는 잡지다. 분위기 파악을 위해 기사전문을 입수했다. 5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네 카트, 노무현 대통령이 한 카트 실려 있었다. 두 대통령의 사진은 모두 방일시에 부부가 궁성에서 아키히토 천황 내외의 영접을 받는 장면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상륙 장면과 연설하는 사진이 추가되었다. 기사의 줄거리는 한국일보 특파원의 보도대로 아키히토 천황이 어떤 애로가 있더라도 한국을 방문해서 양국우호에 가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86년 황태자 때와 김대중 대통령 취임초인 1998년에 있었던 방한(訪韓)계획이 황후의 와병으로 중단된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문맥으로 보면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에도 뭔가 교섭이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지 않으면 이명박 대통령이 천황의 방한문제를 그렇게 호되게 비판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에 전해진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내용이다.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분들을 찾아 마음으로부터 사죄(謝罪)해야 한다. “통석(痛惜)의 염(念)”이니, 이런 단어(單語) 하나로 오겠다면 올 필요가 없다.》정서나 논리로 보면 옳은 말이다. 한국국민의 울분을 전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간의 중요한 외교현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저돌적인 데가 있다. 잡지는 설명을 덧붙였다.
《“통석의 염”이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하였을 때 천황폐하가 과거의 일한(日韓)의 역사에 언급하며 사용한 말이다. “그 정도의 말이라면 필요 없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이 여기까지 노골적으로 폐하의 사죄(謝罪)를 요구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잡지는 천황의 말을 인용했다.
《정부가 바란다면 물론 방한하고 싶다. 나는 양국의 우호에 도움이 된다면 현지(現地)에서 쾌히 사죄(謝罪)의 말씀을 드리겠다. 한국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다. 일본으로 초청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다.》
츠루오카 외무성국장도 천황의 심경일 것이라며 몇 마디 덧붙였다.
《일한우호(日韓友好)를 소원하는 천황폐하와 미치코님의 영혼의 호소를 한국국민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방한의 실현이 어렵다는 것은 두 분께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저렇게 간절하게 방한을 희망하는 것일까. “언젠가는 우리들이…”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들이 못 이루면, 다음 세대가 꼭…”이라는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소신발언을 흠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보도를 보고 역풍을 예상했을 것이다. 천황의 사죄(謝罪)를 독도(獨島)와 비빔밥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역풍의 바람이 될 것이다. 천황에 관한 사항은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외교사항이다. 그 기본을 지키면서 대응하는 것이 외교력의 수준이다.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는 것을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한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은 고사(古史)의 기록을 설명한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침전되어 있는 그 무엇을 토로하는 것으로 들린다. 고사의 기록이란 언급을 안 하면 그만이다. 들추어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소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키히토 천황은 전후정리(戰後整理)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슨 구상을 가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에 가서라도 사죄하고 싶다는 말은 메아리가 강하다. 우리들의 마음에도 메아리친다. 필자는 우리가 옹졸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상징천황(象徵天皇)이란 시대의 장식물로 퇴장(退藏)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아베 총리가 이끄는 한일관계에 가슴을 열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일본의 모든 천황이야 말로 일본을 비추는 빛이다. 결코 무엇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씀을 드린다. 이키히토 천황을 생전퇴위(生前退位) 전에 한국으로 오시라고 초청하자고 권하고자 한다. 그리고 천황의 희망대로 현충원에 마련된 독립유공자묘역에서 참배의식(參拜儀式)을 행하도록 하였으면 한다. 그 이유 몇 가지를 설명 드리고자 한다. 생각의 배경 몇 가지를 설명 드리기로 한다.

일본의 죄과를 아는 유일한 천황이기에

▲ 아키히토 일왕 내외가 4일 저녁 일본 도쿄 우에노의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해 ‘ 미소 짓는 부처—두 개의 반가사유상’특별전에 전시된 한국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봤다. <사진=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첫째 이유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시절 일본의 실정과 조선의 상황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천황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점이다.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은 전전(戰前)에 대정천황(大正天皇)이 황태자 시절 조선에 한 번 둘러 조선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으로 피가 상통하는 인연을 느낄 수 있다. 국권을 찬탈당한 그 시기를 모른다 하더라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조선의 모습은 분명하게 기억하여야 한다. 그와 함께 일본인의 행복과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한 방울의 땀까지 쥐어짜던 그 시절, 강토를 뒤덮었던 서리 낌에 책임을 공감하면 된다. 조선을 알고 한국을 아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 전에 서야할 곳이 한국일 것이다. 그리고 입을 열어 일본의 과오를 순국열사에게 고해주기를 바란다.
아키히토 천황은 중학생이었을 때, 라디오를 통해 A급 전범의 판결 선고를 들으며 강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 때 나라와 국민이라는, 개인을 초월한 것에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사죄(謝罪)의 말씀을 하는 것이 쉬울 것 같다는 아키히토 천황의 말에 그 분의 인간성을 느끼게 된다.

격전지 돌며 전쟁 수습하는 인품을 신뢰하기에

둘째 이유는 아키히토 천황의 인품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전쟁의 상처가 깊은 격전지를 찾아다니며 망자(亡者)의 명복을 빌고 생존자를 위로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며 격려를 보냈다.
가장 어려웠던 곳이 오키나와였으리라 생각했다. 천황이 전국을 순방하면서도 오키나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상륙하는 미군과 싸우면서 현지 부대장이 주민에게 “자살(自殺)하라”고 명령하여 어린이와 여성들이 암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희생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언론의 공세가 있었을 뿐 정부는 위령제와 보상으로 수습을 끝내버렸다.
국민의 생명이 국가의 것이었던가.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의 “위령의 여행”을 국가책임의 무화(無化)라고 반발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희생자는 20만을 넘었다. 천황은 1975년부터 2014년까지 열 번을 방문하여 진혼제(鎭魂祭)를 올렸다.
그리고 10만의 시민이 목숨을 잃은 필리핀도 마다하지 않았다. 철수하는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로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복수의 이를 갈고 있었던 곳이 필리핀이다. 시민과 군인 5만5천이 희생된 사이판에서는 한국인 위령탑에도 헌화해 주었다. 남양군도에서 전사했다는 일본군인은 거의 대부분이 아사(餓死)였다.
“절대자(絶對者), 신(神)”의 시대에 저질러진 전쟁의 희생자가 310만에 달한다. 그때 국민의 생명은 신(神)이신 천황의 것이었다. 천황은 국민을 적자(赤子)”라 불렀다. 패전(敗戰)은 신(神)을 죽였다. 승자(勝者)와 패자의 계산이 맞아떨어져 죽은 신(神)을 인간으로 부활시켰다. 신(神)이 저질은 일을 인간이 수습하려니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이다. 총리는 전쟁수습 보다 전쟁준비에 더 바쁘다. 국가에 빼앗긴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려한다. 그러나 아키히토 천황은 마음과 사랑과 성의로 빼앗긴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마음도 그 쪽으로 기울었다.

가정교사 통한 기독교교육이 살아있기에

셋째 이유는 교양(敎養)을 믿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천황은 1933년 12월23일생이다. 전쟁이 끝난 1945년 12세였다. 12월말 출생이어서 46년까지 12세였다.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일본을 사랑했다. 그래서 천황이 신도(神道)를 버리고 기독교로 전향하면 일본의 민주화가 내실(內實)과 속도(速度)를 향유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천황에게도 선교사를 소개하여 기독교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황태자 아키히토를 위해 성실한 기독교신자인 40대 여성을 가정교사로 추천해 주었다.
《점령군이 억지로 떠맡겼다는 추측이 종종 일어나지만 이것처럼 사실에 반대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미국인 가정교사라는 것은 천황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다. 황태자의 교육을 위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요청한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1946년 방일(訪日)한 미국교육사절단이 황거(皇居)를 방문하였을 때 소화천황이 단장(團長)에게 황태자의 가정교사를 한 사람 구해달라고 청탁했다. 사절단은 일본에 민주주의교육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가정교사의 수기 “황태자의 창문”에서)
소화천황의 요청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어 엘자베스 바이닝(Elizabeth Janet Gray Vining)이 선발되어 황태자 12세 때부터 16세 때까지 4년간 가정교사로 “제2의 어머니”역할을 담당했다. 적령기 소년 황태자에게 맥아더가 요구한 기독교를 중심한 민주주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작가로 활동하다가 뉴욕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남편을 잃고 32세 때 퀘이커 신도가 되었다. 40대 초반의 가정교사, 이상과 정력과 아이디어가 폭포처럼 분출하는 시기의 만남이었다.
그의 가정교사 일기초(日記抄)가 일본의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에 수장되고 있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지낸 4년을 ‘황태자의 창문’이란 한 권의 책에 담아 1500만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가정교사의 영향이었는지 아키히토 황태자는 황후가 되는 자신의 배필을 황실의 관례를 깨고 황족이 아닌 민간인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를 선택했다. 황후 역시 가톨릭계 학교 성심학원(聖心學院) 출신이다. 엄격한 기독교교육으로 성장한 분이다.
일본의 천황은 신(神)이라는 가면을 벗었지만 신(神)에게 결박당한 신(神)의 하수인으로 살고 있다. 한 달 내내 제주(祭主)로 살아야 한다. 신도(神道)의 교주격이다. 최고위(最高位)의 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직계이기 때문이다. 신도(神道)는 “천황의 종교”이자 일본의 국체(國體)를 형성한다. 기독교와 상반된다. 아키히토 천황에게 기독교신자의 종교생활을 요구할 수 없지만 바이닝 부인의 영향은 몸과 마음 모두에 저장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한국에 와서 사죄(謝罪)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입술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거창한 소리였다. 그 분의 약속을 믿어 보는 것도 외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쟁 없는 평화국가 이룬다고 소원하기에

넷째 이유는 전쟁을 거부한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어보자는 것이다. 작년 7월 아키히토 천황의 메시지를 담은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가 발간되었다. 천황의 메시지에 저자의 의견을 곁들인 아주 신선한 책이다.
《전후 연합국의 점령하에 있었던 일본은 평화(平和)와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지켜야 할 중요한 것으로 하여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을 만들고 여러 가지 개혁(改革)을 단행하여 오늘의 일본을 이루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새로 만들고 개선(改善)해 가기 위해서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쏟아 부은 노력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지일파(知日派) 미국인의 협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80세 생일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과거를 성찰하는 말 같지만 미래에 대한 경고로 보이는 말이 저자의 글로 제시되어 있다.
《“일본은 왜 제2차 대전을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라는 거대한 문제에 관해 …하나는 전전(戰前)의 헌법에서는 군부(軍部)가 천황에 직속되어 있었으나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천황이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군부(軍部)가 폭주를 시작할 때 역(逆)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것이 천황 한 분밖에 없다는 구조적(構造的)인 약점이 생겼다. 또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특히 만주국(滿洲國) 건설로부터 국제연맹탈퇴(國際聯盟脫退)의 과정에서 표출된 일본 정치가와 군인들의 “국제법(國際法)에 관한 이해의 결여(缺如)”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도 전적으로 같은 처지다. 일본인의 정통적인 대단히 심각한 결점이다.》
아키히토 천황은 아베와 전쟁 중이다. 작년의 81세 생일 때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는 아베 총리 보라는 듯 일본이 이웃나라와 함께 가는 평화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키히토 천황이 서울을 찾아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사죄(謝罪)의식을 행하며 자신의 소망과 철학을 세계를 향해 개진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여기에 게재된 기사에서는 일본 천황을 호칭 그대로 천황(天皇)으로 하였습니다. 일본“천황(天皇)”의 표기를 “일왕(日王)”으로 하느냐 천황(天皇)으로 하느냐는 문제는 우리나라 언론의 논쟁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천황”이란 말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유래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주장합니다.
외교문서는 일본 측이 사용하는 호칭을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주일대사(駐日大使)가 신임장(信任狀)을 제정할 때 “일왕(日王)”이라 하지 않습니다.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도 일본이 부르는 그대로 Emperor라 합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진무천황(神武天皇)기사를 존중합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4호 (2016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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