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날 제정, 과학의 생활화 조성

김기형 초대 과기처 장관
과학기술정책 기초 확립
과학의 날 제정, 과학의 생활화 조성

▲ 초대 과기처 장관을 지낸 고 김기형 박사

초대 과기처 장관을 지낸 김기형(金基衡) 박사의 별세 소식(92세)에 1970년대 초 과학기술정책 수립에 고심하던 모습이 확연하게 떠오른다. 당시 과학기술 분야 문외한이던 출입기자로서 전문용어의 의미를 캐물어가며 취재할 때 김 장관은 늘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면서 “과학담당 기자가 국내 과학기술 진흥을 좌우하게 된다”고 격려해 주었다.

박대통령 빽 삼아 신생부처 위상확립

김 박사를 비롯한 과학기술계의 오랜 숙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움직여 과학기술처가 발족했지만 예산과 인력이 제한된 미니 부처에 지나지 않았다. 광화문 조선일보 뒤편 당시 원자력원 자리에 들어선 과기처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등 힘 있는 부처가 예산안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독립 행정부처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초대 김기형 장관과 이재철(李在澈) 차관은 경제기획원 등 힘센 부처 국장급을 스카웃 하고 박 대통령을 빽으로 삼아 과학기술진흥 없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없노라고 강조했다. 당시 언론도 과학부 전담기자를 두고 있는 경우가 일부에 지나지 않아 과학기사 지면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신설 미니 부처 안팎에는 ‘전 국민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 등 박 대통령의 휘호가 나부끼고 초도순시를 계기로 ‘대통령의 말씀’을 마패로 삼아 예산을 확보하고 추가 인력을 증원하는 기세를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과기처는 각 부처로 분산된 과학기술 관련 연구조정력을 확보하고 청와대 과학비서관을 통해 선진국의 과학기술 정책동향을 대통령에게 직보함으로써 부처로서의 위상을 높여 갈 수 있었다.

미래지향 재외두뇌 유치계획 실행

▲ 1967년 4월 출범한 과학기술처의 현판을 걸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기형 전장관. <사진=국가기록원>

김 장관은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을 통해 과학기술 행정의 진로를 명확히 설정하는데 온 열정을 쏟아 성공했다. 이 무렵 국가 차원에서 수출과 건설 행정에 주력하고 있을 때 “국민들 밥 먹여주기도 바쁜데 무슨 과학기술을 위한 예산이냐”는 인식이 정부 내에 깔려 있었지만 김 장관은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과 의욕을 적극 활용하여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국가 과학기술진흥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1971년에 내놓은 재외(在外) 과학두뇌 국내유치 계획이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주로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공계 박사들을 고연봉과 아파트 등 특별우대로 국내로 유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취재했던 기자가 “터무니없는 특혜로 예산만 낭비하지 않겠느냐”고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국내로 유치된 재미 과학자들이 전자, 기계, 통신 분야 및 원자력과 국방과학 분야까지 실용화기술을 개발 주도함으로써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까지 일으켰으니 초대 김기형 장관의 업적이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전문 기자들 배워가며 취재보도

과기처가 발족했을 때 경제부처와 사회부처 기자실은 출입기자들이 넘쳤지만 과기처 기자실은 과학기술 전담 4~5명의 전문기자들만 상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일보 심승택 과학부장을 비롯하여 중앙일보 이종수, 동아일보 김재관, 서울신문 현원복 기자 등 이공계 출신이 전문성으로 열심히 취재했다.
그 밖의 출입기자들은 보도자료가 있을 때만 방문하여 이들 전문기자들이나 담당 공무원들에게 배워가면서 기사를 작성했다.
비전문 기자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세종대왕의 측우기나 장영실의 발명이야기 정도가 고작이었기에 과기처가 수립한 정책을 이해하기가 벅찼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과기처를 방문하여 반도체나 원자력 및 국방과학을 이야기할 때도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얼마나 아느냐”고 속으로 빈정거리기도 했다.

▲ 1967년 4월 출범한 과학기술처의 현판을 걸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기형 전장관. <사진=국가기록원>

지금 되돌아보면 진공관식 라디오와 흑백TV를 겨우 구경한 시절에 대통령과 과기처 사람들은 반도체산업, 전자통신, 원자력기술자립 등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국가발전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고 회상된다.

공직은퇴 후에도 과학기술계 헌신일생

김기형 장관은 함남 원산 태생으로 서울 공대 화공과를 나와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대구대에서 응용화학 교수로 재임 중 초대 과기처 장관으로 취임했다. 김 장관은 신설부처 살림을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과학의 날’ 제정, ‘과학기술개발 장기계획’ 수립, 재외 과학두뇌 유치 등 기초를 확립하고 퇴임했다.
그 뒤 9대 국회의원으로 과학기술 관련 입법에 앞서고 KAIST 설립 이사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사장 등으로 과학기술계에 헌신했다. 또 공직 은퇴 후에도 과학기술계 단체와 과우회 회장으로 활약하며, 국가안보 관련 이념갈등이나 친북 종북세력의 난동을 보면서 국가원로 로서 국론통합을 역설하는 품위와 사명감을 보여 주었다.
김기병 현 롯데관광 회장이 김 장관의 동생으로 매사에 뛰어난 추진력을 보여 주는 성품이지만 경제기획원을 거쳐 한때 과기처 공보관을 지낸 바 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김준현 수원대 교수 등 2남 1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3호 (2016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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