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소망 ‘60이전 노인복지센터’ 건립

▲ 불굴 의지의 성공담을 들려주는 ㈜라프(RAF) 이태섭 회장의 고백록, ‘ 나의 인생, 나의 도전’

잡초인생의 성공 스토리
불굴의 의지 눈물감동
이태섭 ㈜라프 회장의 인간 고백록
남은소망 ‘60이전 노인복지센터’ 건립

‘가난을 넘어, 죽음을 넘어’ 절박했던 인생의 백전불굴 의지의 성공담이 눈물과 감격으로 느껴온다. 스스로 잡초(雜草)처럼 자랐다고 고백하는 ㈜라프(RAF) 이태섭 회장의 인간승리 스토리다. 그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여 자살직전까지 좌절했었지만 지금은 수백억대의 부동산 컨설팅 전문가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아 봉사하는 삶을 일생의 사명감으로 여긴다.

호적에도 못 오른 ‘버려진 자식’

이 회장의 고백록, ‘나의 인생, 나의 도전’(2015.7, 서영출판사)에 따르면 성장기의 모진 고생, 사회진출 후 험난했던 성공과 실패 뒤의 극적인 재기과정이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뜻밖에도 그의 인상은 타고난 건강체력에 얼굴에 구김살 한 점 없는 호남형이지만 50대에 이르기까지 결혼을 못한 독신이다. 버려진 자식으로 부모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서러움이 북받쳐 경로봉사로 ‘대리효도’ ‘대리사랑’을 베풀려는 심경일까.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두면 사회봉사에 지장 받고 노후에는 재산분쟁이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이 회장의 측근이 일러준다.
이 회장은 충남 부여군 남면 송암리 호남부락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부모님 얼굴도 못 본 채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자랐다. 아버지는 잘 생긴 미남으로 김삿갓처럼 밖으로 나다니고 구박 받던 어머니는 돈 벌러 나갔다는 말로 얼굴을 감췄다. 이 때문에 누이와 동생 3남매가 외할머니 댁에서 ‘애비 없는 자식’처럼 자라야만 했다.
이 회장의 어릴적 이름은 그냥 ‘태면’이었다. 아버지가 통천김씨이니 ‘김태면’이었지만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보니 출생신고가 없었다. 급히 마을이장께 신원보증을 부탁하여 호적을 만들면서 ‘이태섭’으로 바뀌었다. 뒷날 이 회장이 서울가정법원에 제소하여 김씨 성을 회복했지만 아직 법적절차가 남아 좀 더 뒤에나 본명을 되찾을 운명이다.
이태섭 소년이 학교로 가는 10리길은 추위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도시락을 못 싸가는 점심시간, 부모님이 손을 잡아주는 소풍이나 운동회날이 제일 싫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늘 단짝인 지게를 지고 땔감나무로 외가댁을 도와야 했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5학년 때는 같은 또래들보다 ‘키 큰 아이’로 반장을 맡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꿈에 그리던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큰누나는 서울 구로동 공장으로 취직하러 가고 얼마 뒤에는 둘째마저 서울로 올라가 이태섭 혼자 남았다. 온갖 궁리 끝에 외할머니의 소개로 60대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갓 16세 어린 나이지만 건장한 체구로 머슴 넷, 식모 둘이 있는 대농(大農)으로 인삼밭과 논농사 일이 중노동이었지만 몸 사리지 않고 ‘상머슴’으로 일해 인정을 받았다.

머슴살이, 구두딱기 거쳐 운수업 성공

머슴살이 1년 끝에 세경으로 쌀 세 가마를 받아 보니 2만4천원 상당이었다. 이중 1만5천원을 간직하고 나머지는 여동생에게 주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용산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누나가 취직했다는 구로공단을 찾아가려도 길이 어려웠다.

▲ 어린시절을 보낸 외할머니집 앞에서…

대합실에 앉아 있으니 온갖 건달들이 접근하여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가진 돈을 다 뺏기고 구두담기 ‘찍새’를 거쳐 ‘딱새’가 됐다. 오야봉의 등살에 쫓겨 남대문시장으로까지 ‘찍새’ 갔다가 작은 이모를 만났다. 식품가게를 운영하는 이모네 집에서 자전거 배달하며 침식하니 배부르고 마음은 편안했다. 그렇지만 돈 벌어 성공하겠다고 무작정 상경하여 언제까지 배달이나 하겠느냐고 생각되어 운전기술을 배워 독립해 보겠다며 나왔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제일고속’을 찾아가니 운전면허가 없으니 조수(助手)일부터 배우라고 해서 3년간 열심히 배우자 기회가 찾아왔다. 운전면허를 취득하자 사장이 격려해 주면서 4.5톤 트럭 구입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1981년 21세에 트럭 주인이 되어 희망에 부풀어 ‘독종’이란 핀잔을 들어가며 열심히 노력했다.
불과 2년만에 트럭이 10대로 불어나 ㈜동아특수통운을 설립하고 얼마 뒤에 트럭 52대의 번듯한 ‘사장님’ 명함을 갖게 됐다. 운송사업이 승승장구하자 사업의욕이 더욱 분출하여 물불 가리지 않는 도전욕으로 화장품 회사에 5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화장품회사 경영이 악화되어 투자금을 회수할 생각으로 이를 인수한 것이 탈이었다.
화장품회사 경영을 맡고 보니 밑 빠진 독이었다. 이 무렵 동아특수통운에 대형 인사사고가 겹쳤다. 여기저기 급한 불을 끄느라고 사채시장에 의존하다 창업 11년만인 1992년 5월 부도(不渡)를 내고 말았다. 부채 22억8천만원을 안고 수배자 신세로 도피한 신세였다.

장례식장 노숙자에서 자수 후 1년형

고향친구로 ‘의형제’를 맺은 상무 손철상에게 회사정리를 맡기고 몸을 숨겼다. 빚쟁이들의 원성이 귓전을 울려 신경쇠약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수를 생각해 봤지만 두렵고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고 속단했다.
고향 부여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자살장소를 찾고 있다가 어느 노인께서 다정히 손을 잡아주며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다. 집에 데려가 배불리 밥을 먹여주니 감격할 지경이었다. 그 길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고대 구로병원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돌려 노숙인 생활을 시작했다.
영안실에는 남은 음식이 많아 먹을 수 있고 자정이 넘으면 조문객들이 돌아가 빈 소파에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는 문병객으로 위장, 병원에 들렀다가 저녁이면 다시 장례식장 조문객처럼 돌아오곤 했다. 청소 아줌마들의 눈치가 보여 한 병원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시내 종합병원 장례식장을 전전했다.
언제까지나 노숙자 생활로 해결되겠느냐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어 손 상무에게 연락했더니 이튿날 작은 이모와 함께 찾아왔다. 운수사업 때 트럭구매 보증을 서준 작은 이모가 “별도리 없으니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고 권고했다.
1993년 10월, 경찰에 자수하여 재판을 거쳐 징역 1년형을 받아 만기 출소하여 새 출발을 각오했다.

빚청산 위해 사채소굴 들어가 끔찍체험

사채로 망한 악몽을 안고 사채소굴로 찾아가 빚을 청산하는 방도를 찾기로 했다. ‘신흥대부’라는 간판을 보고 찾아가니 부산 사투리의 40대 오야봉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운수사업 부도나기 전 온갖 밑바닥 경험 다 했노라고 설명하자 6억4천만원의 빚을 갚겠다는 약정서 체결을 조건으로 일을 해보라고 허락했다.

▲ 졸업식 때의 아픔을 회상하며 42년만에 모교 정문 앞에 선 필자.

남루한 행장이 눈에 거슬린 듯 사장이 운동화와 체육복 한 벌을 사주며 고참들과 한 조가 되어 실습하라고 지시했다. 고참들의 사채독촉은 폭언 폭행의 조폭식이었고 채무자는 부들부들 떨었지만 인정사정이 없었다. 한 달쯤 견습, 실습이 끝나자 혼자 단독으로 해결해 오라면서 어느 볼트너트 회사를 소개했다.
사채꾼 스타일로 가방을 끼고 찾아가 빚 독촉을 하자 사장이 ‘죄송’ ‘죄송’만 연발하니 별 대책이 없었다. 이를 멀리서 훔쳐 본 고참이 오야봉에게 일러바쳐 그날 밤 죽도록 매를 맞았다. 이튿날에는 고참과 함께 그 회사로 재차 방문하여 협박 공갈하니 사장이 얼마큼 돈을 내놓았다. 그러나 고참이 발길로 걷어차고 더욱 강압하자 교육보험 계약 통장과 도장을 내주면서 계약을 해지하여 찾아가라고 했다.
차마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되었다. 오야봉도 “너는 안 되겠다”면서 “이번 기회에 장기(콩팥)나 팔아 빚 갚고 나가라”고 호통치니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이러다가 목숨 잃겠다고 두려워 오야봉에게 “이자를 낮추더라도 중소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사채놀이 하는 방안이 있다”고 제안했다. 한참 주판알을 굴리더니 “잘해보라”고 응낙했다.
과거 운수업과 화장품 사업할 때 익힌 중소기업인들을 찾아가 종전보다 낮은 이율로 빌려주자 제때 이자와 원금을 갚아주어 오야봉의 사업이 잘 됐다. 이에 만족하여 처우도 개선해 주고 빚도 일부를 탕감해 주었다.
그로부터 사채꾼 앞잡이 2년여 만에 빚을 완전 청산하고 오야봉과 홀가분하게 결별할 수 있었다.

60 이전에 노인복지센터 설립 꿈

약간의 종자돈을 밑천으로 부동산 경매시장에 눈을 돌렸다. 교도소 1년동안 부동산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경매물건 감별이나 투자수익 계산법을 익혔다. 부동산 컨설팅 칼럼을 신문에 연재하여 기자들과 사귀고 독자들과 상담도 해봤다.
누가 성북동의 찜질방이 유찰을 거듭하고 있다고 일러주어 가보니 유망한 물건이었다. 이를 경매낙찰로 붙잡아 쉼터를 만들고 공연장을 꾸민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신장개업하니 적중했다.
관내 노인들을 매월 초청하여 무료목욕 서비스하고 때론 등도 밀어주니 친절서비스 소문이 퍼졌다. 인기 연예인 초청 공연행사 때는 모든 고객들이 환호했다. 수익이 나오자 남아 있는 빚 일부를 갚아가며 편익시설도 늘리고 나머지 일부는 반드시 사회환원 하겠다는 계획을 실천했다.
드디어 2006년 부동산 컨설팅 전문 ㈜라프를 설립, 영등포 당산동의 오피스 하우스에 라프 1·2·3을 오픈했다. 지난해에는 영등포 아트홀에서 700여 노인들을 초청 ‘사랑의 통 큰 경로잔치’를 벌여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이 회장은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고 다짐하며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옛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겼다.
첫 사업종목인 성북동 찜질방을 정리한 대신에 전주 덕진구 동산동에 대지 600평, 건평 800평의 초현대식 찜질방을 건축, 오는 9월 오픈할 계획이다. 온천 천국 일본의 목욕문화를 벤치마킹한 획기적인 뉴모델로 찜질방 문화를 활성화 시킬 것으로 기대하는 야심작이다.
이 회장은 ㈜라프의 자산가치가 700억대쯤 될 것으로 추산하지만 전주 찜질방 모델 인기로 머지않아 1~2천억대까지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나이 60 이전에 노인복지센터를 설립하겠다는 일생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다짐한다.

잃어버린 부모님 사랑 되찾아

▲ 처음 노숙을 했던 고대 구로병원 장례식장.

이 회장의 노인복지센터 꿈은 잃어버린 부모님 사랑이 너무나 그립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다니던 아버지는 68세 때인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을 때 이미 자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고향 부여에 묘지를 장만했다가 나중에야 여유가 생겨 봉분을 다시 손질하고 상석을 꾸며 술잔을 올려놓고 ‘아버님’이라고 호곡했다. 홀로된 어머니는 모진 세월에 쪼기다가 개가하여 서울에 살고 있지만 병약한 소식을 듣고 집을 장만해 주고 용돈도 드렸다.
어머니 또한 종종 홀로 사는 아들 집을 찾아 살림을 돌봐주는 모정을 보여 뒤늦게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라는 소망을 성취했다.
이 회장을 키워 준 외할머니는 여든에 돌아가셨고 식품가게 이모네, 누이와 동생들도 서울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집안이 모두 성공한 셈이다.
이 회장의 고향마을도 부자촌으로 변신했고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두 잘 살고 있어 만나면 잡초인생 이태섭의 성공이야기를 나누며 옛날을 추억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3호 (2016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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