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민간외교 대기록, 깊고 오랜 인연, 潘基文 대망론 간직

세계정상 500명 인터뷰
40년 민간외교 대기록
林德圭(임덕규) Diplomacy 회장 집념의 발자취
깊고 오랜 인연, 潘基文 대망론 간직

▲ 올해로 41주년을 맞은 월간 영문 디플로머시(Diplomacy)의 창간 발행인 임덕규(—Ñ德Œ\) 회장.

월간 영문 디플로머시(Diplomacy)가 지난해 창간 40주년을 넘기고 올해가 41주년째 이니 월간지 발행, 보급이 지극히 어려운 풍토에서 장수기록을 세웠다. 창간 발행인 임덕규(林德圭) 회장의 영문 월간지 창간 발상에서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과 글로벌 세계와의 친선 가교역할을 맡아온 과정은 진귀한 기록이자 애국심, 사명감, 선구적 발자취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조찬·만찬·세미나·기념식 취재열정

임 회장은 디플로머시 발행에 몰두해 오면서 올해 80세 고령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휴일이나 주말이 없는 연중 만근(滿勤)의 현역 발행인이자 다방면의 논객이며 민간 외교관이다.
임 회장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조찬, 만찬모임이나 기념식과 세미나에 단골로 참석하며 주제발표 메모하고 질의응답에 참여하는 취재(取材)의 열정이 넘친다.
임 회장을 초청하는 인연이 다방면으로 겹겹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각 언론사 행사와 언론인 단체모임을 비롯하여 11대 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헌정회 모임과 각 정당 행사 및 월간지 발행인으로 한국잡지협회 행사에도 회원자격으로 참석하게 된다. 또 디플로머시 발행 목적과 관련 외교관련 행사, 각국 대사관 초청에다 각종 사회단체, 기관 등 초청행사도 많아 연중행사 참가 및 취재가 거의 본업(本業)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임 회장은 골프와 같은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사생활도 거의 희생하며 살고 있다. 모든 행사 참가 시에는 빨간 넥타이에 정장 차림으로 월간지와 서류 보따리를 휴대하고 앞자리에 자리 잡는 버릇이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디플로머시 창간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각계 명사들의 얼굴이 임 회장이 독보적으로 걸어온 민간외교관 역할을 잘 말해준다. 이날 정·관계 인사들과 외교관 출신, 주한 각국 대사 등이 참석하여 하나 같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영문 월간지의 생존환경이 어려운 풍토에서 확고한 신념과 열정으로 국익과 공익을 대변해 온 발자취에 대한 평가와 격려했다. 이 자리에서 임 회장은 창간이념 그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날을 향해 디플로머시는 계속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각오를 밝혀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주말, 휴일 없는 글로벌 세계와 소통

임 회장이 40년 세월간 영문 월간지를 꾸준히 발행해 온 원동력은 확고한 사명감이었지만 월간지 경영난 속에 온 가족들의 힘을 합친 일종의 가업(家業)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다고 믿어진다.
임 회장은 매일 새벽에 집을 나서지만 조찬, 만찬행사에 참석하느라고 회사에는 늦게 출근했다가 일찍 퇴근하는 근무방식이다. 이 때문에 부인이 내조를 위해 경영을 맡고 장남 임종국 상무가 기획관리실장을 겸해 2세 경영을 준비하는 단계로 보인다. 그렇지만 디플로머시 제작과 보급은 여전히 임 회장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디플로머시의 브랜드와 공신력이 바로 임 회장이다.
디플로머시는 1975년 8월 창간 이래 무교동 삼덕빌딩에 자리 잡아 한 번도 이사하지 않았지만 이 지역 재개발 관계로 지난해 퇴계로의 국제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국제빌딩은 임 회장이 근무했던 옛 동화통신의 동화빌딩과 인접하여 친정댁 가까이로 돌아온 감회를 갖는다.
국제빌딩 405호실의 임 회장 사무실은 오랜만에 이사하여 낡은 것을 많이 정리했다고 하지만 각종 자료와 사진, 기념품과 복사물 등으로 빽빽하기 짝이 없다. 벽에는 40여 년간 각국 정상급과 인터뷰 장면이 전시되어 있고 캘린더에는 각국 대사관 초청 행사와 경축일 관련 일정으로 꽉 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음을 말해 준다.
임 회장이 각국 정상급과 주고받은 수많은 연하장 가운데 국교수교 이전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보낸 답장이나 쿠바 카스트로 수상의 연하장 등은 진귀품으로 꼽힌다. 종종 수집가들이 이들 진귀품을 잠시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임 회장에게는 주 5일제나 주말, 휴일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까닭이 있다. 세계 각국과 소통하고 대화하느라고 지구 반대편 나라와도 수시로 통화해야 하므로 우리나라 휴일제와 상관없이 밤낮을 가릴 수가 없다. 한밤중에 통화하면서 ‘Good Morning’이라고 인사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각국마다 다른 제도와 관습에 따른 예절을 암기하고 금기사항과 기호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각국과의 통화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알리고 상대국의 경사를 축하하고 흉사에는 애도를 표시함으로써 신뢰를 쌓고 친교를 두텁게 하니 곧 민간외교이다.

40년간 세계정상급 500명 인터뷰 대기록

▲ 2015년 9월호 표지커버.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

지난 40년간 임 회장이 인터뷰한 각국 정상급이 거의 500여 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기록 아닌가. 정상급과의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나 평소 온갖 방식의 직간접 소통을 통해 방문, 인터뷰에 성공했다고 한다. 기록사진과 대화록에 따르면 근대 세계사의 주역들이 몽땅 망라되어 있다.
세계의 석학 토인비 교수, 중국의 지성 임어당, 나일강의 기적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에서 사우디 압둘라 국왕, 남아공 만델라 대통령,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 브란트 서독 수상, 이스라엘 라빈 수상,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장쩌민과 후진타오 중국 주석,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등 전현직 세계의 정상들을 모조리 만난 기록이다.
이들 정상과의 만남은 곧 외교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아프리카 알제리의 부테플리카(Bouteflika)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한 김일성과 친하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는 말로 우호감을 표시함으로써 2년 뒤에 국빈으로 방한이 성사된 사실이 바로 외교성과의 하나였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방한 후 국내 건설업체들이 알제리의 국가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다. 또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과 인터뷰 후 한·헝가리 우호관계가 급속히 증진되고 인도 수상 면담 후 현대자동차 등 국내기업의 인도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외교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여 국가안보가 불안할 때 미 8군 싱글러브 장군을 만나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주한미군 철수는 안 된다”고 강조하자 실제로 싱글러브 장군이 기자회견을 통해 철군반대론을 주장하여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장군은 이 때문에 끝내 보직을 사임한 후 곧 전역하고 말았다.
임 회장은 지난 40년간 이들 각국 정상급과의 인터뷰를 통한 외교적 성과에 대해 누가 평가해 주거나 말거나 디플러머시 발행에 따른 보람이자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임병직 외무장관 권유로 영문잡지

임 회장이 영문 월간지를 창간한 것은 집안 어른인 임병직 외무장관을 가까이 모신 인연 때문이었다고 소개한다. 임 장관은 이승만 정부의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외교통으로 “영문 잡지를 만들어 외국 지도자들을 만나 대한민국을 알리고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면 국익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권고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여건상 영문 잡지 창간이 결코 쉽지 않았다. 정치 지망생 꿈을 안고 대학(동국대)을 졸업한 후 신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동화통신에 재직 중이던 1975년 집과 ‘백색전화’를 담보로 창간자금을 마련하여 겨우 창간했다. 창간을 준비하면서 독립운동가 이갑성 선생,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 윤치영 박사, 임영신 중대 총장, 안호상 박사 등을 찾아뵙고 영문 잡지의 창간 취지와 발전 방향에 관한 조언도 받았다.
이 결과 한반도 분단 상황과 관련하여 세계 각국과의 우호와 평화 이미지를 심고자 편집방향을 ‘장점 따라 삼만리’라고 정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장점만을 보고 대한민국과 우호관계 조성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같은 편집방향에 따라 끈질긴 집념으로 이룩한 것이 세계 정상급 500여 명과 인터뷰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임 회장은 디플로머시 창간 후 정계진출의 꿈 따라 11대 국회에 진출하여 외무위원회 소속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이만섭 대표가 이끈 국민당 소속으로 논산과 공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됐었다. 그러나 임 회장의 정치적 꿈은 ‘김종필 대통령’ 만들기였으나 정계상황의 변화와 요동으로 11대 단임으로 정계를 물러나 디플로머시를 필생의 가업으로 지금껏 이끌고 있는 것이다.

“곧 때가 오면…”, 반기문 총장 유망론

임 회장은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과 오랜 인연으로 그의 임기 후에 관해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 언론에 차기 대권 선호도 제1위로 반 총장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반 총장 스스로 차기 행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여론조사 때마다 제1위로 나타나고 있다.
임 회장은 “반 총장이 지금은 세계 각국의 불을 끄러 다니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서 차기 대선과 연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을 아낀다. 올 총선을 겨냥하여 친반(親潘)정당이 여럿 출현했지만 반 총장과는 직접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때가 오면 반 총장 대통령 만들기에 가장 앞장 설 사람 가운데 임 회장이 먼저 꼽힌다. 두 사람 관계는 충청인 인맥에다 외교관련 외교잡지 발행인 사이로 깊고 오랜 관계로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 회장은 반 총장이 외교부 장관일 때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권유하고 각국 정상이나 외교관을 만날 때마다 아시아권 유엔 사무총장 후보론을 제기하면서 알게 모르게 ‘반사모’(반기문 사랑 모임)를 가동시켰다. 러시아와 중국 지도자들에게도 아시아권 사무총장론과 반 장관의 적격론을 설득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인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만큼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을 맡을 경우 국제분쟁 해결과 세계평화에 가장 적임자라는 논리였다. 더구나 반 장관의 외교관 생활터전이 워싱턴과 유엔 본부였으므로 각국 대표들과도 너무나 익숙하고 그의 외교력과 인품도 충분히 알려졌다.
이 같은 배경으로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어 임기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대권주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올 수 있다.
임 회장은 나름대로 확신을 지니고 있다. 김대중, 김영삼 민주화 투사가 대통령을 지냈지만 3김정치의 한 축인 김종필 전 총리가 끝내 집권하지 못했으니 시운(時運)이 반 총장에게로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임 회장은 이 같은 기대와 소망으로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때가 오면…”이라고만 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1호 (2016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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