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당원이 당비로 자립운영 가능

[김동길 박사의 '이게 뭡니까']

남은 것은 ‘대한민국’ 하나 뿐
노인정당 하나 만들면
100만 당원이 당비로 자립운영 가능


글 /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태평양위원회 이사장

유럽에는 녹색당(Green Party)이 있지만 자연보호 보다는 진보적·혁신적 정치단체로 근년에 활약이 눈 부신다. 반면에 서구사회에는 ‘은색정당’이 등장하지 않았다. 노인 정치인들이 여전히 현실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 3국에서는 역량이 있건 없건 60이 넘은 정치인은 물러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각 있고 눈치 빠르고 건강한 정치 유단자 노인들에게 아예 ‘노인당’(Silver Party)을 만들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대한민국 하나 뿐’

노인당 발기를 하면 100만 당원은 힘들이지 않고 모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당비를 내고 그 돈으로 당을 운영해 나갈 것인데 아마도 이 나라 최초의 자립정당이 될 것이다.
당 대표를 포함하여 100만 당원이 매월 1만 원씩 내면 월 100억 원이 모이고 1년이면 1200억 원이 마련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지난 몇 년간 대한노인회 이심 회장이 선두에 서서 큰일을 척척 해치우는 것을 보면 노인들이 정당 하나 만들어 훌륭하게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나무에 비유하면 잔뜩 물이 오른 50대를 준회원에 가입시키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을 Silver Party가 능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80세 이상이 모여 만든 ‘장수클럽’에서 96세 회원 김형석 교수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대한민국 하나 뿐”이라고 말씀하여 회원 모두가 감동 했었다.
우리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은 나라걱정 밖에 없는데 그 정신으로 Silver Party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청년들이 나라를 살리지 못하면 노인들이라도 모여 나라를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 2016년 대한노인회 신년하례식. <사진=대한노인회>

조선조에 큰 도둑이 태어난 이야기

선진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에 태어난 국민이 타고 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라라고 정의하고 싶다. 하루아침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 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가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기적은 없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해내는 것 뿐이다.
조선조에 유명한 도둑이 있었는데 아직 갓난아기 때 그의 엄마가 엿 장사로 겨우 연명했다. 아이 엄마가 엿을 팔러 나갈 때에는 남은 엿 그릇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아이는 끈으로 묶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데 온종일 갇힌 채 놀아야 하는 어린애가 노끈 끝에 구부러진 못을 하나 매어 바닥 한 구석에 놓인 화로에 가서 못 갈고리를 데워가지고는 선반 위의 엿 함지에 던져서 그 못에 묻은 엿을 먹고 또 먹어 엄마가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선반 위의 엿이 주먹만큼 줄어들었다.
답답한 엄마가 아들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나서 두들겨 패면서 “너는 커서 도둑질 밖에 더 하겠냐”고 야단쳤다. 그런 욕을 먹으면서 자란 그 아이는 커서 도둑이 될 것을 다짐하며 자랐을 것이고 마침내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조선조의 유명한 도둑이 됐다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나는 한국대학 교육의 맹점과 부조리를 개탄한다. 대학이 원하는 것은 전국에서 수능성적이 뛰어난 ‘좋은 학생’들을 입학시키겠다는 것이다. 일류대학은 그 틀에 맞는 학생들만 받겠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일류대학에 못 가는 아이들이 2류나 3류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은 이미 자존심을 잃어 자포자기하는 경향이 짙다. 천재로 인정됐기 때문에 대학이 무조건 받아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우리나라의 영재교육은 내가 보기에 ‘영재 고사(枯死)작전’ 같은 인상이다. 한국의 대학교육 개혁과 선진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한반도는 하늘이 맡기신 그 큰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것이다.

올해 89세… 죽음에 대해 한마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되도록 이면 죽음에서 아주 먼 거리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기를 싫어한다. 그것이 어쩌면 본능의 일부인지 모른다.
사람은 태어나 살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늙어간다. 젊게 보일 수는 있어도 젊어질 수는 없는 것이 생명체의 운명이다. 사람이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마침내 죽어서 사라진다. 아직껏 지구상에 120년을 살아본 사람이 없다. 앞으로는 그렇게 오래 산다고 해도 인간이 불사조(不死鳥)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올해 89세, “소년행락(少年行樂)이 어제련가 하노라”는 노래처럼 세월이 덧없이 흘렀음을 개탄한다. 그러나 내가 90이 다 되도록 살았으니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 집안에는 80 넘도록 사신 어른이 한 분도 안 계신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다.
남아 있는 숙제는 “어떻게 죽어야 잘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이다. ‘안중근처럼’, ‘윤봉길처럼’ 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영광스러운 죽음을 꿈꾼다는 자체가 주제 넘는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그런 재목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유가(儒家)의 오복(五福) 중 다섯 번째가 ‘고종명’(考終命)이다. 뜻이 좀 애매하지만 ‘목숨이 끝나는 때를 생각해 보는 여유’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여유를 가지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이 복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죽은 뒤에 이어질 삶을 아는 사람도 없고 따라서 일러줄 사람도 없다. 그러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믿음 하나가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를 제거해 준다. 나는 죽음 앞에 비굴한 자세를 취하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다. 가능하면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떠나고 싶다.

“왜 사느냐”고… 그건 사랑 때문이야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는 질문을 받는 사람도 모르지만 질문하는 사람도 모른다.
‘어떻게’(How) 사느냐고 묻는다면 한 두 마디 대답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왜(Why) 사냐’고 물으면 정말 대답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꾸준히 생각은 해 봐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가는 대로’ 그냥 살 수는 없는 일이기에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살아야 ‘취생몽사’(醉生夢死)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밥은 왜 먹는가’부터 생각해 보자. 배가 고프니까 먹는다. 안 먹으면 굻어 죽으니까 먹어야 한다. 그러나 밥 먹고 집에서 빈둥빈둥 하며 아무 일도 않고 하루해를 다 보내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낭비요 일종의 죄악이다.
해방 후에 유명한 복음 전도자인 Stanley Jones 박사가 당시의 성결교 신학 과정에 와서 집회를 갖고 “소련 헌법에는 성서에서의 인용이 꼭 한 군데가 있다”고 말하고 그것이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는 구절이었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이 돼야지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돼서야 되겠는가. 물론 그 다음에 질문이 따른다. “그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80년 세월을 거쳐 답을 얻어 냈다.
사람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 때문에 사는 지구상의 유일한 동물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형제나 친구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태어나서 어느 나이가 되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찾고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찾는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므로 남녀의 사랑이야말로 절대자가 주는 질서 속에서만 가능하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며느리로 들어온 미녀 양귀비(楊貴妃)를 왕비로 삼는 불륜을 범하여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불렀다. Abelard(1079~1142)와 Heloise(1101~1164)는 중세의 뛰어난 지성들이지만 사제지간에 불륜의 사랑에 빠져 두 사람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살지만 건강한 사랑을 위해 사는 것이다.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사랑 때문에”라고 대답하면 정답이다. 그 정답은 하나뿐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8호 (2016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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