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가 뽕잎 따는…
친잠례(親蠶禮) 참관기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처음 보는 구경을 하러간다. 자하문 너머 평창동에서 ‘궁중 친잠례 행사’를 재현한다고 해서 학회가 있는 종로3가로 부터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킴스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마이크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미 행사가 시작된 모양이다. 장내로 슬며시 들어가 뒷자리 하나를 잡고 본 행사에 앞서 진행 중인 학술토론회의 발제 내용을 살펴본다.

궁중복식으로 뽕잎 따는 모습재현

오이순 한국의생활문화원장의 친잠례 행사를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인사말씀은 이미 끝나고 본격적인 기조발제를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백성의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위해 양잠을 권장하였다는 우리나라의 의생활 역사에 대한 설명에 이어 상명대 박선희 교수가 ‘한국 고대 실크생산의 기원과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바통을 이어 받았다. 고대 한국의 복식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 발표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큼 아주 의미심장하였으며, 이어 진태하 박사의 ‘문자학으로 살핀 양잠’은 흥미로우면서도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학술발표가 끝나고 20평 정도의 평면 무대에 조명이 바뀌면서 곧바로 본 행사가 시작됐다.
친잠례, 왕비가 상궁 등 내명부(內命婦)와 고관대작의 부인들인 외명부(外命婦)를 거느리고 뽕잎을 따는 채상(採桑)의식이 연출되었다. 궁중복식을 한 열 명 남짓의 여인네들이 왕비·공주·정경부인 등의 순서로 역할에 따라 느릿느릿 30분 정도 들고 나고 하면서 뽕잎 따는 시늉을 하는 과정이 재현 공연의 전부이고, 따로 친잠의례 복식 쇼를 연이어 했는데 희미한 배경 음악 속에 별다른 흥미를 끌기에는 다소 싱거웠다는 느낌이다.
물론 옛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행사가 작은 규모에다 형식적이고 상징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겠으나 오늘 본 모습은 어쩐지 궁중의례가 갖는 연극적 요소가 빠진 듯해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를 넘으면서 종묘제례의 장중한 제례악과 일무(佾舞)의 춤사위를 연상하며 왔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규모나 완숙도에서 기대 밖 수준이라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과도한 기대감은 아마도 무리한 바람이었을 것이고 개인이나 작은 단체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이 정도의 시도를 한다는 자체가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이미 아홉 차례나 행사를 경험한 전례가 있다 손 치더라도 그때마다 애로는 반복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분야의 전문적 소양을 축적한 입장도 아니어서 보통의 관객으로서 참관 후의 느낌을 정리하여 주최 측에 전달하는 것도 그리 고약한 일은 아닐 듯싶어 몇 가지 적어본다.

▲ ‘궁중 친잠례 행사’. <사진=필자 최종인>

선잠례·친잠례·수견례·조현례

첫째, 양잠에 관련한 행사는 선잠례(누에의 신에게 드리는 제사)·친잠례(뽕잎을 따는 의식)·수견례(누에고치를 받는 의식)·조현례(누에고치를 나눠주는 의식)로 나누어 행해지는데 다른 의식들은 약식으로 하고 친잠례 중심으로 재현했기 때문에 간단할 수밖에 없었다면 연출과정의 사이사이 해설자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장소는 고궁이 제격일 듯싶지만 여건이 마땅찮으면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공연장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 호텔은 교육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셋째, 출연진을 비롯한 행사 요원 확보는 소요경비를 감안하여 동호인과 자원봉사자를 활용한 것은 잘한 것이었다. 이번 출연진도 동네 아줌마와 이웃 아가씨를 연습시켜 공연하였는데 서툴러도 진행만 진지하면 관객은 이해하면서 공감을 할 수 있다. 단지, 해설자만큼은 능숙한 경험자를 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넷째, 친잠례 재현 행사가 후세 교육에 목표를 둔다면 각급 학교에 초대장을 보내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본다. 일반인은 나중이다.
다섯째, 그래도 악공(樂工) 몇 명은 있어서 생음악이 연주되어야 공연장에 생동감이 번지지 녹음기를 틀어 놓는 것은 김빠진 맥주와 다름 아니다.
참관 첫 경험의 소박한 소감이니 고까워 마시고 명년 공연에 참고한다면 고마운 일이겠다.
친잠례 재현행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학술발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내용 전개의 편의상 학술 발표의 순서를 거꾸로 바꿔서 우리나라 고대 의복문화를 소개한다.
이미 명성이 널리 알려진 대로 진태하(陳泰夏) 박사의 한자(漢字) 문자학(文字學) 강의는 문자학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우리 역사의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주춧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문자학으로 살펴본 양잠」이라는 제목의 발표는 누에 잠(蠶)·누에 촉(蜀)·뽕나무 상(桑)·잠박(蠶箔)·실 사(絲)·고치 견(繭)의 상형화(象形化)된 자형(字形)을 변천 단계별로 의미를 쉽게 설명하였으며, 특히 영어 silk의 어원이 우리 말 ‘실’이라는 놀라운 해석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끝으로 누에와 관계되는 자형이 은대(殷代) 갑골문(甲骨文)에서부터 만들어져 사용된 것을 보면 양잠(養蠶)은 적어도 3,40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이므로 양잠은 곧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에서 발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굴절된 고대사의 한 부분을 볼 수 있음이다.

고조선시대 실크는 독자성·고유성

박선희(朴仙姬) 교수의 「한국 고대 실크 생산의 기원과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의 발표 요지는 이렇다.
“우리 문화가 이웃나라에 영향을 준 것을 한류(韓流)라고 일컫는다면, 역사적으로 한류현상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 생산한 실크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가진 우수한 품질로 기술적으로 앞섰는데도 중국의 실크가 고대 한국에 수입된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면직물의 경우, 이미 삼한시대 이전부터 백첩포라는 면직물이 생산되어왔음에도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의 목면 종자를 붓통에 숨겨 들여왔다는 문씨 족보의 내용이 여과 없이 교과서에 소개되어 우리나라가 마치 의복문화의 후진국처럼 알려졌다”는 주장은 작은 사실 같지만 아주 놀라운 소식이었다. 다른 품종 하나를 들여온 것에 불과한 일이 마치 이 땅에 목화가 처음으로 들여온 것처럼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한민족 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의 호복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종래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우수한 직물 생산의 전통은 고유 문화요소로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 복식문화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 교수의 주장은 의복문화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매우 충격적이며 감동적인 발표였다.
오이순 원장의「오늘날의 의생활로 이어진 친잠례」라는 기조발제는 앞에 언급한 친잠례 이야기에서 그 역사성을 대충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생략한다. 다만 전통문화 보전과 계승 발전을 위해 헌신적 열정을 보이는 그분의 행사장에서 본 인상을 간단히 살펴보며 마감하고자 한다. 자그마한 체수에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명징하게 가르마를 한 머리 매무새와 옅은 황색의 국의(菊衣)를 입고 앉아 있는 단아한 모습이 조선왕조의 왕비를 연상케 하는 자태였다고나 할까...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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