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금호타이어 인수시 그룹 재건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금호산업 인수계약
박삼구회장, 7,228억원 경영권 확보
남은 금호타이어 인수시 그룹 재건

▲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 <사진=그룹 홈페이지>

금호아시아나 박삼구(朴三求) 회장의 금호산업 인수방침이 확정됨으로써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재건이 가시화되고 있다. 박 회장은 지난 9월 24일, 채권단이 제시한 금호산업 지분 50%+1주를 7,228억원에 인수키로 동의, 주식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연말까지 인수대금을 납입하면 지난 2009년 12월 금호산업 워크아웃 개시 이후 6년 만에 그룹 재건이 가능하게 됐다.

그룹지배구조 핵심 인수결단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30.08%)로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아시아나항공은 금호산업 계열사인 에어부산, 금호터미널, 아시아나 IDT의 최대주주로 박 회장이 금호산업을 되찾게 되는 것은 곧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는 의미가 있다.
박 회장은 인수방침 확정 후 주식인수 대금 조달과 관련하여 전략적, 재무적 투자자 등 우호세력이 준비되어 있다고 시사했다. 이어 앞으로는 더 낮은 자세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 진정 아름다운 기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또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화해방침을 밝히면서 “본인의 부덕으로 가족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롯데그룹 신동주·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 됐지만 정치적 사회적 비판이 일고 있는 사태를 의식한 사과로 보여진다. 박찬구 회장과는 대우건설 인수와 재매각 등 제2 창업 프로젝트를 둘러싼 이견으로 불화를 빚었었다.
박 회장이 금호산업에 이어 내년에 금호타이어를 인수하게 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3대축을 회복하여 명실공히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게 된다.

채권단, 그룹재건 위한 헌신노력 평가

금호산업은 2010년 1월 워크아웃 개시 이후 2014년 10월 워크아웃 졸업, 2015년 1월 채권단의 매각 공고까지 숱한 고비와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채권단의 매각 공고 이후 호반건설이 단독으로 응찰했다가 유찰된 후 채권단이 박삼구 회장에게 우선매수 청구권을 부여했다가 1조 213억원에 수의계약키로 의결했다.
이때 박 회장이 6,503억원을 제시했다가 다시 7,047억원으로 올려 채권단 제시안과 181억원의 차이를 보였다. 그 뒤 다시 이를 수용함으로써 최종 인수자격을 확보할 수 있었다.
채권단은 그동안 박 회장이 금호산업 인수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0년 11월 금호산업 무상감자시 일반주주들은 4.5대 1로 감자했지만 박 회장 자신은 막대한 손실을 각오하고 100대 1로 감자하여 경영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또 2011년 11월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각하여 금호산업(2,200억원)과 금호타이어(1,130억원) 유상증자에 참여함으로써 기업을 살리겠다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박 회장이 채권단이 제시한 7,228억원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 후 채권단 내 최대 의결권(14.2%)을 보유한 미래에셋자산운용마저 이를 동의했다. 미래에셋은 지난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때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했다가 2009년 금호산업 워크아웃으로 대우건설을 재매각할 때 채권을 금호산업 주식으로 전환했다.
금호산업 채권단은 KDB산은 금융과 계열사 8.97%, 미래에셋 8.48% 외에 우리은행(4.83%), 재무적 투자자(4.3%), 농협은행(4.01%), 기업은행(3.53%)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 창업기 ‘우애경영’ 모델의 불화

금호그룹 창업주 고 박인천(朴仁天) 회장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회복하는 것은 그룹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의미가 있다.
그룹 창업주는 일제하에 독학으로 보통문관시험을 거쳐 경찰관으로 복무한 후 1948년 11월 광주여객 설립, 1960년 삼양타이어 설립 등으로 금호그룹을 축성했다. 해방직후의 여객운송 사업이란 비포장도로에 안전사고와 서비스 불량 등 온갖 시비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창업주의 깐깐한 성품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여 광주여객에 이어 삼양타이어까지 육성하면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광주고속’(光州高速)이란 사명을 고수하여 그룹을 이룩했다.
창업주는 4남3녀를 철저하게 훈육하여 후계자들로 육성했다. 장남 박성용(朴晟容)은 예일대 경제학 박사, 차남 박정구(朴定求)와 3남 박삼구는 연세대 졸업, 4남 박찬구(朴贊求)는 아이오와 주립대 등 모두가 경영인 재목으로 성장했다. 더구나 창업주는 형제간의 우애를 가훈으로 삼아 재계에 소문난 형제경영 모델을 보여주었다.
장남 박성용 회장이 선대의 육운사업에 이어 아시아나항공을 창업하여 제2 민항으로 안착시킨 후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지만 일찍 별세하여 셋째 박삼구 회장이 계승하여 제2 창업을 선언할 만큼 그룹을 확대경영 하려다가 시운(時運)을 극복 못해 좌초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 동생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의 독립경영 선언으로 형제간 불화가 표면화 되어 우애경영이 조각나고 그룹이 분해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금호그룹의 지배구조 중심인 금호산업의 워크아웃 이후 박삼구 회장이 그룹을 되살리고자 가진 것 전부를 바쳐 이를 인수키로 결단한 것은 창업정신과 형제경영의 맥을 잇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삼양타이어 시절 창업주 조카의 반란

금호산업 인수에 이어 남은 금호타이어 인수과제는 금호산업, 금호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로 이어지는 그룹의 주력 3대축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다. 금호타이어는 1960년 9월, 창업주가 삼양타이어로 창업하여 1984년 금호그룹과 합병으로 금호타이어로 개칭했다. 그 뒤 금호타이어는 금호건설과 합병으로 금호산업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2003년 금호타이어㈜로 독립 법인화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호타이어는 창업이후 고속버스 타이어, 민항공기용 타이어 개발과 수출에서 국내 최초,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많이 세웠다.
그렇지만 창업주 생존 시에 1979년 조카 박상구(朴祥求) 사장에 의한 분리 독립경영 선언으로 분란으로 겪은 바 있었다. 당시 금호그룹 집안 내력에 비춰 조카의 반란은 기업 이미지를 손상시킨 사건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이 무렵 정래혁 국회의장, 박봉환 증권감독원장, 고건 농수산부장관, 김종호 건설부장관 등 호남 출신 명망가들이 나서 중재하여 어렵게 그룹의 일원으로 재결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금화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졸업하자마자 대폭 임금인상을 하고도 단협이 결렬되어 파업투장 한다는 소식이 매우 유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금호타이어의 평균 임금은 동종업계 최고 수준인데다가 경쟁사들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져 적자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금호타이어의 경우 채권단의 지분이 42.1%로 비록 워크아웃은 졸업했지만 고임금 하에 파업투쟁 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다 박삼구 회장이 이를 인수하여 금호그룹을 명실공히 재건하자면 큰 고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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