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살아온 길

허구와 진실의 날들
사람마다 살아온 길


글/金淑 (김숙 본지 상임 편집위원)

사람의 생각이나 말, 혹은 행동은 그 사람이 처해진 현실과 맞닿아 있기 마련이다. 말이나 행동이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주변의 여러 여건이 그만큼 순탄치 않은 탓일 테고, 두서없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주어진 현실이 무질서한 까닭일 것이다.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과정이나 순서 중 가장 먼저 접해야 하는 테두리는 가정이다. 일단 출생하면 한 가정의 몇째 딸, 몇째 아들로 자리매김 해지며 저마다의 고유명사로 불리어지게 된다. 그러나 누구누구의 자식으로,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상황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더러 선택의 여지없음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없는 능력 밖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선천적인 운명을 숙명이라 부른다. 숙명이란 꽤나 뻔뻔스럽고 불공평한 얼굴을 갖고 있다. 게다가 가혹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는 입에 금수저를 물려 편안한 가정에 내보내는가 하면 누군가는 엉켜진 실타래 같은, 듣기만 해도 골치가 욱신거리는 가정에 내던지기도 한다. ‘내던진다’는 다소 거친 표현에 딴 뜻은 없다. 못마땅한 숙명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은 사실이다.
살다 보면 너나없이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가 있다. 필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자면 오히려 길었다고 할 수 있다. 유년시절에서부터 학창시절을 포함한 미혼 시절 내내 암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결코 감정의 과장이 아니라 폭우나 폭설을 맨몸으로 맞아야 했던 날들이 많았었다. 한쪽 발에는 구두를 신고 다른 쪽에는 검정고무신을 끌고 다녔음이나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양쪽 발에 신었던 신발이 모양도 크기도 무게도 달랐으니 걸음걸이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절뚝거리는 모양새나 행동거지도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고 움직일 때마다 느끼는 제 나름대로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늘 주변인이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서성거렸다.
평범한 가정이 아니라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이상기온으로 쓸데없이 빨리 자란 기형적인 떡잎은 그와 비슷한 형태의 줄기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웃자란 자의식과 현실의 괴리는 누군가와 부딪칠 때마다 매번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절 필자의 말은 언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리한 흉기에 가까웠다. 숙명이 내던져준 삶이란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조금만 닿아도 곧 폭발할 것 같은 몹시 험악한 분위기의 연속이다 보니 누구에게든 폭언을 쏟아내기 일쑤였고 가능하면 가장 아파할 곳을 찾아 비수를 꽂으려고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픈 건 자신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속절없는 날들이 계속 흘러갔다. 시작도 끝도 모를 분노는 어느 시점에 결국 병적이라 할 만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불가의 계율 중 묵언수행이 있는데 필자의 침묵은 종교적 수행이라든가 금언과 견줄만한 가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계산된 반항이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여고시절의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우스운 일이 있어도 입술 꼬리만 살짝 말아 올려 웃는 모습이 소름끼친다는 친구의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내심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금방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장 뾰족한 수도 없었다. 웃고 살 건더기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었던 형편이었다. 자연스럽게 웃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훈련이 필요했다. 환한 미소가 어쩌고 해맑은 웃음이 저쩌고 따위는 허구였다. 웃음도 고운 말도 필자에게는 애당초 맞지 않는 옷에 불과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아버지의 죽음과 다른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한한 세월 앞에 허락된 개인적인 시간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다. 세월에 비하자면 한낱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간조차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넉넉하게 내어주지도 않았다. 겁이 더럭 났다. 자신만 모를 뿐 분명한 한계상황인 인생을 더 이상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 앞에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고 똑바로 서서 크게 웃어보기로 작정했다.
천형(天刑)같았던 홍역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상대를 정해두고 미워하지는 않았을망정 먼저 손 내밀고 더불어 살아가자고 말하지 못했음을 뉘우쳤다. 단 한 번도 다정하게 불러본 적이 없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그동안의 무심했음에 용서를 구했다. 고약한 감정의 응어리들이 앞 다투어 빠져나갔다. 마음의 감옥을 허물고 나오자 홀가분했다. 세상도 따뜻했다.
지금은 조용히 미소 짓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한다. 너무 큰소리로 웃어 남편에게 핀잔을 듣는 경우도 더러 있다. 굳이 순화된 말을 건져 올리려고 의식적으로 애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필자로 인해 주변이 향기로워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웃음)
이쯤 되면 여태까지의 삶이 누추하지만은 않았다고 자부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겨진다. 가을이 짙어졌다. 어느새 필자의 인생 빛도 붉고 누르스름하게 물든 가을나뭇잎이 되었다. 마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 오늘은 그들과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싶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4호 (2015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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