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한필순 박사의 목숨 건 집념 감동

[ 원자력 연구회고 (13)]

기술식민지서 독립국으로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립
고 한필순 박사의 목숨 건 집념 감동


글/장인순 박사,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2009년 12월 27일 저녁,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날아온 400억 달러 UAE 원전수출 계약 뉴스는 대한민국이 ‘원자력기술 식민지’에서 ‘원자력기술 독립국’으로 태어났음을 전 세계에 공표한 날로 기억된다.
30년 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사명감과 열정 하나만으로 연구개발을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 이외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원자력기술 독립국으로 태어난 날

원자력 기술자립에 도전하기 위해 선진국 자료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체면도 자존심도 버리고 ‘기술식민지의 과학인’으로 기술구걸(?)했던 것이 엊그제와 같다. 그러나 이젠 떳떳한 원자력 기술독립국으로 세계 원자력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며 새로운 역사와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처음 수출한 이래 UAE에 원전을 수출하면서 대한민국은 미국·러시아·프랑스·캐나다에 이어 세계 52번째로 원전 수출국이 됐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 모든 것은 대형 원자력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전두환 전 대통령, 이정오, 김성진 전 과기처 장관, 박정기 전 한전사장 및 원자력 기술자립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한국원자력연구소장 고 한필순 박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한다.
50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산하를 가졌지만 아쉽게도 에너지를 포함한 천연자원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들어 세계사를 선도하는 과학문명에 동승하지 못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조국의 분단 및 민족상잔이라는 질곡의 역사를 겪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리가 잘린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정전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대한민국은 민족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를 바탕으로 창의성을 꽃 피우고 수학과 과학적 잠재력을 발휘하여 20세기에 가장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이제 세계인들은 한국을 ‘아침이 바쁜 나라’(land of morning rush)라고 부른다.

북한, 남침준비를 위해 5.14 단전

얼마나 많은 국민이 ‘1948년 5월 14일’을 기억할까? 이날은 북한이 6.25 남침준비를 위해 남한에 예고도 없이 송전을 중단한 날이자 우리나라가 전기가 없는 암흑천지가 된 바로 그날이다.
북한이 단전하자 미국이 발전함인 일렉트라함(6,900킬로와트급)을 인천항에, 자코나함(2만킬로와트급)을 부산항에 파견하여 선상에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공급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전력사정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현재 남한 내의 좌파가 주장하는 북침설이 설득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남북한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원자력발전 강국으로 발전하면서 북한의 송전 중단일로부터 57년 후인 2005년 3월 16일에 우리가 북한의 개성공단에 전기를 공급하게 되었다. 단전을 당했던 우리가 거꾸로 북한에 송전을 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2006년 10월 9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생 원자력으로 살아온 필자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치미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주변국들의 우려와 경고를 무시하고 끝내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위협이었다. 북한은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며,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모험이…

1958년은 배고픔과 가난이 상식으로 통했던 국민소득 80달러 시절이었다. 그 당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인 시슬러 박사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그에게 에너지 자립에 관한 의견을 묻자, 그는 늘 들고 다니는 에너지 박스에서 조그마한 금속 우라늄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속에 수십 트럭 분의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원자력을 하십시오.”
이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우리는 기술도 인력도 예산도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원자력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20년쯤 걸릴 겁니다.”
이 대화 이후 이듬해인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미국이 건설비의 반을 분담하여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초 원자력 연구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의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장학금을 만들어 2백여 명의 젊은이들을 해외유학 보냈다. 아마도 이들이 우리나라 1세대 국비유학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을 하지 않아 실망도 컸다. 사실, 그 당시에는 귀국해봐야 연구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그 선택을 십분 이해한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근대화에 가장 필요한 분야로 전기를 지목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없기에 원자력 발전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1970년에 미국 WH(웨스팅하우스) 사로부터 턴키방식으로 고리 1호기 원전건설을 발주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리 1호기 건설만큼 모험적이고 위험요소가 많은 프로젝트는 없었을 것이다. 국민소득이 2백 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돈도 인력도 전무한 상태에서 건설비만 정부 1년 예산의 4배가 투입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성공여부도 불확실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1년치 정부예산으로 백 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는 국력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옛 속담을 무시하고 도전한 박 대통령은 아마도 미래를 꿰뚫어보는 지도자의 예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1978년 고리 1호기가 완공되면서 원자력발전 시대를 열게 되었다. 놀랍게도 1958년 이승만 대통령과 시슬러 박사가 만난 지 정확히 20년 후인 1978년에 고리 1호기 상업운전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국민소득 80달러 시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가난한 살림살이에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고 국비로 젊은이들을 해외유학 보낸 이승만 대통령, 국민소득 2백 달러 시대에 상용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결심하고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 전쟁 후 폐허에서 조국을 원자력발전 강국으로 이끈 두 지도자의 지도력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원자력연구소, 치욕의 창씨개명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되면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연구도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1979년 10.26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혼란에 빠지면서 원자력연구소는 설 땅을 잃었다. 그동안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연구소를 없애라는 국내외의 압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결과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는 ‘치욕의 창씨개명’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름을 뺏긴 비극은 일제하에서 우리 선조가 당한 창씨개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창씨개명으로 연구소 간판을 바꿔달 때 우리 연구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당시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것이 바로 약소민족과 기술식민지 국민이 받아야 하는 수치와 굴욕이었다. 이러한 눈물과 질곡의 역사 위에서 시작된 것이 원자력기술 개발사업으로 맨 먼저 핵연료 국산화(중수로, 경수로)사업, 연구용 원자로 개발사업 그리고 한국표준형원자로 개발사업이었다. 모든 연구개발사업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일주일에 80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달렸던 연구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9년 핵연료 국산화 사업이 성공함으로써 그해부터 한국핵연료주식회사(지금의 한전원자력연료주식회사)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핵연료를 전량 공급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정부에 건의해서 한국원자력연구소 이름을 되찾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연구용 원자로 개발은 1995년 원자력연구소 내에 30메가와트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를 성공적으로 건설, 운전하기 시작했고,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표준형원자로 개발은 1995년에 95퍼센트 기술자립을 목표로 시작됐으며, 현재 운전 중인 21기의 원자로 중에서 7기가 한국표준형 원자로로 건설되었다. 한국표준형원자로는 그 성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이용률 또한 세계 최고이다.
한국표준형원자로는 경제성 면에서도 탁월해서 원자로 1기를 건설할 때마다 6천 5백억 원의 외화를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요즘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2% 부족한 부분’은 이미 개발이 끝나서 인증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 원자로 냉각펌프(RCP, 개당 2백억 원), 원전설계용 안전코드가 그것인데, 한국원자력연구원, 두산중공업,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공동으로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를 슬프게 그리고 분노케 했던 것들

4반세기의 세월 동안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이 겪었던 수모와 고초, 에피소드 그리고 무용담 등을 모으면 아마도 수십 권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고 또한 분노케 했던 것은 고된 연구과정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구소 이름을 바꾼 창씨개명이 그것이고, 북한의 핵실험에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이 땅의 반핵단체들은 집요하게 원자력 기술자립을 반국가, 반민족 행위로 호도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그들이 던진 돌팔매와 폭력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가!
우리가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젖혀두고라도 잃어버린 시간과 돈을 계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에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반핵단체들이 원전반대를 외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부족한 연구비와 인력 그리고 인프라 등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정녕 우리를 가장 슬프고 괴롭게 한 것은 “엽전이 무슨 원자력 기술자립이냐”고 하는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한국표준형원전이 어디 있느냐고 얼마나 시비를 많이 했던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원전기술을 발전시킨 일본도 일본표준형원전이 없다는 것이 비난의 근거였다.
우리 국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엽전’이라는 언어는 오히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연구원들의 오기와 열정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하고 싶다.
한참 한국표준형원전이 있느니 없느니 시끄러웠을 때 일이다. 어느 회의석상에서 고명한(?) 교수 한 분이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장 박사, 요즘 말썽 많은 한국표준원형원전이 정말 있는 거요?”
그러면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보고 몹시 화가 났다.
“서울 시내를 달리는 ‘그랜저’라는 현대차가 국산입니까, 외국산입니까?”
나는 그분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아무도 그 실체를 믿지 않는 한국표준형원전이 멸시와 고통스런 긴 산고 끝에 태어났지만, 앞으로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국을 이끌 성장동력으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한국·UAE 정상회담이 생명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원자력 기술자립 자체를 부정하고 투서하고 방해했던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든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그늘진 곳에서 밤낮 연구실을 지켰던 연구원들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청계천에 조국근대화의 공적비를

밤을 낮 삼아 연구에 몰두했던 연구원들의 공로와 함께 청계천 상인들에게도 감사하다. 1970~1980년대 이 땅에서 연구개발을 했던 사람들과 기업인들은 청계천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당시 부품공급이 원활치 않아서 연구개발에 필요한 중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상가를 구석구석 뒤져야만 했던 기억들…….
놀라운 것은 청계천 상가에는 우리가 찾는 국적불명의 부품들이 모두 있었다는 사실이다. 청계천 상가가 그 당시 열악했던 부품시장에 가장 중요한 공급처로서, 조국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으니 공적비 하나쯤 세워주면 어떨까!

한때 공중분해된 한국원자력연구소

1996년 원자력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과 인력을 산업체로 이관하는 문제를 놓고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은 연구소에 남기를 원했지만, 인력은 그대로 두고 기술만 이전하는 것은 실용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650명의 연구원들이 원자력연구원에 원자력기금을 만들어 연구개발비를 주는 조건으로 연구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표준형원자로개발팀은 한국전력기술㈜로, 핵연료개발팀은 한전원전연료㈜로, 방사성폐기물연구팀은 한국전력으로 옮겨감으로써, 한때 원자력연구원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우수한 연구원들이 한 곳에서 함께 유기적인 협력체계를 갖춰 연구를 계속했으면 훨씬 많은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우라늄 농축시비 유감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우라늄 농축기술은 지금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나같이 평생 핵물질을 만지고 산 사람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가 우라늄 농축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진정한 원자력발전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핵연료주기에서 가장 중요한 농축과 재처리기술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4년 당시 IAEA에 보고했던 우라늄 농축실험 결과 1차 실험에서 11퍼센트, 3차 실험에서 7퍼센트 농축에 성공했다.)
2000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시절, 호기심과 순수한 학문적 동기 그리고 평화적 목적으로 고난도 기술인 레이저 우라늄 농축실험에 성공한 적이 있다. 이 실험에 왜곡되게 알려져 국내외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거의 1년 동안 국내외 언론과 씨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논란을 지켜보면서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평화적인 목적의 연구활동마저 묶여버린 현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그 실험을 하도록 허락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지만, 이 자리를 빌려 국민들께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기관장의 고뇌,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우라늄 농축시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라늄 농축기술만이라도 갖고 싶은 것은 평생 핵물질과 함께 살아온 핵연료 전문가에게 너무나 당연한 꿈이 아닐까? 그때 온 국민이 우리에게 보내준 성원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기에 깊이 고마움을 표한다.
1965년에 개발된 핵무기 제조기술은 더 이상 하이테크(high tech)가 아니다. 핵무기 제조기술은 상용원자력발전소보다 훨씬 쉬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핵무기는 마치 폭탄처럼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인 반면, 원자력발전소는 엄청난 에너지에서 꼭 필요한 양만을 안전하게 꺼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1940년대에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서 컴퓨터도 반도체도 없었던 때에 불과 3년 만에 우라늄(U-히로시마에 투하된 종류)과 플루토늄(Pu-나가사키에 투하된 종류)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이제는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만 확보하면 누구나 쉽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IAEA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핵물질의 양과 용도, 이동경로를 정기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전 세계가 기후변화와 화석에너지 고갈시대에 대비하여 녹색성장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tool)인 원자력은 선택이 아닌 절체절명의 필수조건이라는 공동의 인식으로 한미원자력협정을 한 단계 격상시켜 상호신뢰 하에 전핵연료주기를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 대통령 감사

원자력 기술자립 의지를 확고히 한 이승만 대통령, 1970년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고, 과감히 상용원자로를 건설한 박정희 대통령. 1980년대에 핵연료국산화, 연구용 원자로, 한국표준형원자로 개발 등 대형 원자력 연구개발을 지원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여기에 더해 UAE 원전수주는 정상외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UAE 원전계약의 성공은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의 물밑 외교와 이명박 대통령의 원자력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확신에 찬 신념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으로 원자력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고, 더 나아가 원자력발전소는 2백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종합과학으로 경제적 파급효과는 물론 대한민국 기술브랜드 가치를 높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관심사인 녹색성장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가 원자력 기술독립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 원자력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서 노력하신 네 분의 대통령께 감사를 드린다.
국가원수가 재임기간 동안에 원자력연구원을 방문한 분은 놀랍게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다섯 분뿐이다. 그분들이 원자력연구원을 방문하여 남긴 휘호기념비가 연구자들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원전수출은 곧 에너지 수출국

원자력발전소 수출은 에너지 수출국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에너지 자원빈국인 한국이 원자력으로 국가안보의 가장 중요한 축인 에너지 안보를 굳건히 하고, 동시에 에너지 수입국에서 당당히 에너지 수출국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력은 자원의존형이 아닌 인간의 두뇌가 만든 하이테크 에너지로써 원자력박전소를 ‘마르지 않는 유전’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자력은 화석에너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백만 배나 큰 에너지로 최소한의 천연자원을 이용해서 최소량의 폐기물만을 발생시키며, 대량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두뇌집약적인 초고밀도의 청정에너지이다. 원자력은 핵연료주기기술을 포함한 원자력기술 자립을 백 퍼센트 달성하면 연료비가 전체비용의 2~3퍼센트 이하여서 해외의존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자력은 종합과학으로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과학이라는 점이다. 세계의 선진국들이 하나같이 원자력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자력산업에 관련된 최첨단 설비, 건설, 철강, 기계, 재료,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국내의 모든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한몫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카 원전사고 통해 우리 원자력기술 우수성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면서 원자력인으로서 가슴 아픈 통증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억세게 운이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땅의 원자력인들이 그동안 최선을 다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앞으로 세계 원자력 업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안전한 가압경수로(PWR)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원전사고는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와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이다. 놀랍게도 가압경수로인 스리마일 섬 사고는 원자로가 완전 녹아버린 최악의 사고였지만, 감속재로 물을 사용하고 원자로를 보호하는 대형 돔 모양의 격납고 때문에 인명피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에 비해 체르노빌 원전은 감속재로 가연성 흑연을 사용하고 불행히도 격납고가 없어 화재와 함께 원자로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체르노빌형의 흑연감속로는 거의 폐쇄되었고, 그 후로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았다.
일본은 가압경수로와 비등경수로(BWR)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번에 사고가 일어난 원자로는 모두 비등경수로이다. 비등경수로는 가압경수로에 비해 안전성 면에서 문제가 많다. 그 이유는 가압경수로는 원자로와 증기발생기가 분리되어 있어 핵연료 손상 시에도 원자로 내의 방사선 물질이 증기발생기 쪽으로 이동할 수 없으며, 가압기가와 증기발생기 때문에 원전 안전에 가장 중요한 돔 모양의 격납고가 비등경수로에 비해 5배나 크다. 또한 원자로를 제어하는 제어봉이 원자로 위에 있어 비상전원이 차단되어도 조작이 가능하며, 가압기가 있어 상당기간 동안 냉각수 공급이 가능하다.
일본의 비등경수로는 화력발전소와 같은 개념으로, 원자로에서 고압의 증기가 바로 터빈으로 가는 방식이다. 가압기와 증기발생기가 따로 없어 격납고가 아주 작으며 또한 격납고가 고압에 취약한 박스 모양으로 건설되어 있다. 또한 원자로 제어봉이 원자로 아래에 있어 비상전원이 차단되면 조작이 불가능하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나타난 잦은 수소폭발도 큰 문제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원전은 수소가 발생하면 실시간으로 수소를 제거하는 수소폭발 방지설비를 갖추고 있다. 만일 일본 원전의 격납고가 박스 모양이 아닌 돔 형태였고, 크기가 가압경수로처럼 컸다면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비등경수로 건설은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이 억세게 운이 좋다는 이유는 우리는 가장 안전한 노형인 가압경수로만을 개발하고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원자로를 유지보수하는 데 유리하고 운전능력이 탁월하여 세계 평균 원자로 이용률보다 20퍼센트나 높은 95퍼센트에 달한다.

고리 1호기 계속운전 원전수출 크게 기여

“원자폭탄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인내와 천재성이 결합된 결과이다.”
철학자 러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원자력기술은 가난과 배고픔이 상식으로 통했던 반세기 전 우리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머나먼 미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빈곤과 가난의 땅에서 남의 도움으로 간신히 태어난 고리 1호기는 선천적으로 수학과 과학의 재능을 가진 한국인의 저력과 이 땅의 원자력인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힘입어 건강하게 자라났다. 고리 1호기는 원자력발전소의 맏형으로서 가난의 굴레를 벗고 산업화로 가는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 강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
고리 1호기의 가동 초기에는 원자력 전문가가 전혀 없어서 불시정지 등 잦은 고장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원자력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탁월한 관리, 철저한 유지보수와 운전능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자로로 바꾸어 놓았다. 가동 첫해에는 발전정지 건수가 무려 17회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15년간은 연평균 6.7회, 그 후 15년간은 단 4회뿐이었다. 원전이용률은 92퍼센트에서 최고 96퍼센트를 달성했다. 그야말로 고리 1호기의 탄생은 한국인에게는 축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고리 1호기 계속운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고리 1호기는 오늘을 위해서 수천억 원을 들여 완벽하게 리모델링했다. 그 내용은 비상발전기 연료탱크 보강 등 총 1,911건, 증기발생기 저압터빈 등 대형기기를 총 915건을 교체했으며, 특히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주원인인 수소폭발 방지설비를 갖춰 중대사고 방지능력을 전보다 열 배나 향상시켰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안전한 발전소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힘으로 해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원자력발전 선진국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해냈다는 한국인의 자신감과 긍지의 승리라 할 것이다. 고리 1호기 계속운전은 우리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해외 원전수출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확신하건데 고리 1호기에서 근무하는 단 한 사람도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고리 1호기의 심장을 뛰게 하자

현재 미국은 103기의 원전 중에서 60기가 계속운전 중이며, 19기가 정부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대형 원전사고가 일어났던 미국 스리마을 섬 2호기는 상업운전을 시작한지 불과 넉 달 만에 사고가 났으며, 체르노빌 4호기는 상업운전 2년 후에 일어난 사고로 계속운전과느 무관한 사고이다.
고리 1호기는 앞으로도 안전하게 계속운전을 하여 전 세계에 우리의 유지보수, 운전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체르노빌과 스리마을 섬 사고 후 세계적으로 원전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졌으며, 이번 후쿠시마 사고는 대지진과 엄청난 쓰나미가 동시에 덮친 최악의 자연재해였지만 이를 계기로 원전의 안전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인류 역사는 엄천난 자연재해와 실패와 좌절을 딛고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로로 허를 찔린 인류는 그 아픔을 딛고 원자력 르네상스를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대한민국이 세계 원자력발전 산업을 주도해 나갈 것이다.

원자력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 지배

우주의 탄생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인 물질과 에너지가 하나이고 상호변환이 가능한 핵반응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금도 우주에서 계속 되고 있는 많은 별들의 생성과 소멸은 핵반응에 의한 것으로, 우주를 지배하는 반응은 핵반응이고, 우리의 삶(생명)을 지배하는 반응은 화학반응이다. 화학반응보다 에너지 밀도가 백만 배나 큰 핵반응을 이용해 국가의 에너지 안보를 이루는 것은 대단히 뜻 깊은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화학에너지(화석에너지)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지만 원자력은 인적자원을 포함해서 천연자원이(핵분열, 핵융합) 무한하기 때문에 영구히 에너지 안보를 이룰 수 있다.
그뿐인가. 원자력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 지구온난화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과학기술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UN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역설했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후손(atoms for next generation)을 위해 반드시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뤄야 할 것이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천연자원이 다 고갈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재생에너지로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시기가 되면 결국 원자력발전 강국만이 살아남을 것이며, 이들 국가가 세계사를 이끌고 나갈 것이다. 동시에 에너지 자원빈국인 대한민국은 원자력 기술자립을 통해서 국위를 선양하고 확실한 에너지 안보를 이루어 가까운 장래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후손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금수강산과 원자력기술을 꼭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장인순 박사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산업통상부는 에너지위원회를 통해 고리 1호기에 대한 계속운전과 영구정지 의견을 수렴한 끝에 한수원에게 2017년 이후의 계속운전 신청을 하지 말 것을 권고키로 했다. 이로써 고리 1호기는 경제성과 안전성 판단에도 불구하고 폐로의 운명을 맞게 됐다. 편집자)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2호 (2015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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