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 공경 孝가 정답이지만…

연금법 싸움질 보며
'늙으면 어떡하나' 걱정
노부모 공경 孝가 정답이지만…


글/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태평양위원회 이사장)

오늘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고민이 ‘늙으면 어떡하지’일 것이다. 국민연금법이 왜 크게 문제되는가. 바로 노후대책 때문이다. 늙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벌 길도 없다. 나라를 향해 손을 벌리면서 “내가 젊었을 때 번 돈의 일부를 맡아 잘 굴렸다가 내가 늙었을 때 입에 풀칠이나 하게 해 주오”라는 구걸 때문에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법이 바로 그것 아닌가.

‘늙으면 죽어야’가 정답인가

사실은 “늙으면 죽어야 해”가 정답이다. 그러나 죽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기를 싫어하는 동물의 일종이다.
인간 이외 모든 동물에게는 노후대책이 필요 없다. 동물들은 늙어도 새끼들의 신세를 지지 않는다. 제 힘으로 먹고 살 수 없게 되면 새끼들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져 삶을 끝낸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다르다. 사람은 죽기를 싫어할 뿐 아니라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한다. 건강 100세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 사람은 200세, 300세까지 살기를 바란다. 사람만이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놀랍고 특이한 동물이다.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는 인간이란 동물은 어떤 훌륭한 정부의 노후대책에도 만족할 수 없다. “영원히 살게 해 달라”는 노인에게 국가가 무슨 대책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어떤 대책도 임시처방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노인들은 아들과 딸들이 맡아서 돌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노인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 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어긋난다. 사회주의가 부도덕한 정치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가 인간문제를 다 책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가 순리 아닌가

아들과 딸들은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순리이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오늘의 인간생존이 매우 딱하다.
21세기를 사는 70억 세계인구는, 말하기는 좀 거북하지만 “정년퇴직과 동시에 죽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명작가 박영준은 대학에서 오래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식 후 곧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우리가 ‘좀 더 사셨으면’ 했었지만 오늘에 생각하면 박영준은 행복한 선배였다.
마르크스는 염세주의자가 아니었고 다만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잘못된 철학을 깔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무결하게 평등한 세상이 있을 수도 없지만 설사 그런 세상이 된다고 해도 사람은 답답해서 살 수 없다. 나는 결코 강제로 만든 평등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
아들과 딸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노년은 언제 어디서나 비참하기 마련이다. 요새 멋도 모르고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지만 거기도 효(孝)가 없으면 노년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
또 결혼을 하지 않고 버티는 남녀가 많다고 하는데 그들은 아들딸 낳아 고생스럽게 키워도 늙어 효도를 받기가 어렵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독신을 고집하는 남녀는 모두 어느 수준의 염세주의에 젖은 ‘영리한 사람’들 아닐까.
마음대로 관광이나 다니면서 돈을 쓰고 가겠다는 젊은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할 것이다. 그들은 효가 사라진 세상에서 아들딸을 낳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석학 토인비(Arnold J. Toynbee)가 “한국은 효가 바탕인 이 시대의 특이한 나라”라고 칭찬했었지만 오늘의 한국 효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궁금하다. 한국에 효가 되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전 세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정상화의 길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저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싸움 밖에 모르는 정치판

싸움 밖에 모르는 곳이 정치판이라면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하다. 한국정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여와 야가 있어 정책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국민이 판단할 수 있고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되어 여‧야가 격돌하고, 더 나아가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주먹질을 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공무원연금 개혁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학교수 40년의 나도 이해를 못하는 법안인데 어떻게 이런 법안이 정국을 혼란시키는가. 총선이나 대선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여야가 벌써부터 힘겨루기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생각 없이 굿판을 벌인 것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야가 정권 잡겠다고 쇼 하지 말고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결정인지 심사숙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준엄한 역사의 교훈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사람이 엮은 것이기에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것은 역사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역사가 랑케(Ranke, 1795~1886)는 역사가의 노력이란 “무슨 일이 진정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는 곧 사실과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있은 일을 사람이 지우거나 바꾸거나 멋대로 풀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일본에 유명한 한국계 폭력배의 두목으로 마쯔이(松井)라는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살인을 하고도 법정에 서서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 놈이 죽었다”고 자기변명을 했다고 들었다.
남의 발을 밟고도 피해자를 향해 “네 놈이 내 발 밑으로 들이밀었다”고 우겨대는 깡패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방위청 장관을 지낸 하마다라는 자는 공공연히 “일본은 침략국가가 아니다”고 선언하고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일(中日)전쟁도 장개석(蔣介石)이 도발하여 일본이 말려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으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 아닌가.
역사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던져준다.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잔인한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
오늘 아베의 일본에서 벌어지는 군국주의로의 회귀는 왜곡된 역사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행위이므로 오래갈 수는 없다. 히틀러가 무너지고 도죠(東條))가 망하듯, 잔인무도한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망치고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애국자가 보이지 않는 세상

애국자가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애국을 부르짖고 우국(憂國)을 앞세운 자가 허풍만 남기고 다 떠나버린 이제는 누구도 애국을 논하지 않는 쓸쓸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누구인가. 나는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대답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일 때 나라를 지킨 장군이요 백성을 살린 위인이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인 김구와 이승만을 덮어놓고 존경했다. 또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정신을 일깨워준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의 애국정신·독립정신을 우러러보며 살았다.
오늘은 이처럼 존경스런 어른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오히려 태극기를 멸시하고 애국가 부르기를 꺼리는 색다른 인간들이 각계각층에서 날뛰는 한심한 대한민국 아닌가.
그나마 북에서 남파되어 적화통일 하겠다고 날뛰는 흉악한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대한민국을 미워하는 놈들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빨리 망하기를 바라는 악질분자들이다.
잘 나가던 대한민국이 오늘 이 꼴이 된 것은 부정부패에 원인이 있지만 더욱 큰 원인은 이 땅에 숨어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나쁜 놈들이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그냥 두고 정치가 바로잡히고 경제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0호 (2015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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