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모란이나 동백이나
살다보면 오십보 백보

글/金淑 (김숙 본지 상임 편집위원)

세상살이는 누구에게나 거의 비슷하기 마련이다. 본인과 다른 사람들의 생활이 언뜻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도 하나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도나 개나 오십 보 백 보다. 윷판에서 한 끗이나 두 끗이나 별 차이 없고 우리네 인생도 끗발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아니, 이렇게 무차별적인 단정은 어폐가 있다. 윷을 던져 승부를 겨루는 과정이라면야 도든 개든 단순히 그 게 그 거일 수만은 없다. 윷판을 걷고 난 후에 비로소 원점이 되고, 원점이 된 이후의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얘기의 핵심파악은 윷놀이가 끝난 뒤, 이를테면 인생의 종국에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냐, 그 건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적당한 시기에 윷판을 치우면 간단해지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이해하자는 말이다.
최근 들어 필자는 생의 한 가운데서 한 발짝 비켜선 채 주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런 상태를 관조라 할 수 있을지,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사리사욕을 꾀하지 않고 지혜로써 사리를 비춰보려고 애쓰며 살고는 있다.
오늘 아침에 친정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내내 우울했었다. 어머니의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함은 아픔이고 상처고 형벌이다. 이렇듯 어머니의 노환은 자식에게 서러움이자 회한이 된다. 또 가끔씩은 평정심마저 잃고 허우적허우적하며 가혹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다가 나마저 기진맥진하면 그땐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퍼뜩 정신을 차려본다.
어머니에 대한 대책 없는(?) 애틋함을 갖고 있었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저녁나절, 갑자기 후배가 찾아왔다. 아직 오십이 채 되지 않은, 마음으로 아끼는 아주 고운 모습의 후배다. 후배를 바라보자 처음 떠오른 말은 “핼쑥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말이 감정의 과잉은 아닐 것이라 여기며 필자가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1년여 만에 본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호들갑스러운 말이나 스스럼없는 행동 대신 잠깐사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후배는 핏기가 없고 파리했다. 작년에 비해 체중도 5~6Kg 줄었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잔재미에 치중한 글보다는 루이제린저, 하이덱거, 헤르만헷세나 실존철학에 심취했었다던 그 후배를 잠깐 사이 떠올려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아무도 모르는 운명은 반드시 예정되어 있어 우리는 그저 그 궤도를 가고 있을 것이라는 불확실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웃음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맺었던 필자나 필자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의미 없이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키득거리며 명동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지고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늘 그렇게 종작없이 덤벙거리며 지냈었다. 돈키호테 같음은 그때나 이때나 딱히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자면 또래보다는 웃자라 있었다던 후배가 오늘 느닷없이 나타나 내심 휘청거리고 있는 필자에게 심오한 그 무엇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으니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랐음은 크게 무리가 아닐성싶기는 하다.
암투병중인 후배는 완치를 위해 암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기로 했다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만큼 굉장히 놀랐다. 금세 눈시울이 젖어들었고 목젖이 따끔거렸다. 의연하게 서 있는 후배 앞에서 자칫 철없는 선배가 될 뻔했다.
누구든 어디에서든 100세 시대를 외친다. 결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말도 아니다.
단지 무조건의 장수가 축복은 아닐 테고 삶의 질이 문제일 것이나 어찌됐든 고령화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이 됐고 현실이 됐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가, 50세가 되기 전에 생명의 끈을 놔 본적 있었던 사람의 생에 대한 애착 혹은 애증이다. 그녀는 이미 생물학적인 나이의 후배가 아니었다. 필자보다 저만큼 높은 곳에 서 있었으며 눈빛도 깊고 마음도 고요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요점마다 방점을 찍어놓은 한 권의 철학서적 같았다.
후배의 얘기를 듣는 동안 줄곧 어머니의 얼굴과 후배의 얼굴이 겹쳐졌다 사라지고 또 다시 사라졌다 겹쳐지곤 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어머니의 가속화된 노환에 정신 줄을 놓다시피 한 필자에게, 냉정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고마운 사실이다.
꽃잎이 피어난 채, 향기를 머금은 채 비바람을 못이여 억지로 꺾여진다면 얼마나 한스러울까... 향기는 사치스러워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이파리 하나하나 오직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꽃잎들은 또 얼마나 애처로울까...
벌 나비들을 불러 모아 꿀을 따게 해준 후 어느 날 홀연히 꽃잎을 떨군다면 그 건 서러움이 아닌 장엄한 마무리로 봐야 하는 게 옳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우리들 인생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와 나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고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이 우주의 질서를 절대로 모른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어떤 이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것일까...
모란이나 동백이나, 까마귀나 공작이나, 갑돌이나 갑순이가 결국 한 끗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색한 인생의 판을 되도록 빨리 접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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