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맹활약 구국정신 66년만에 재건

살신보국(殺身報國) 충정

▲ 백골부대 정신을 계승한 서북청년단 기.


전설의 서북청년단 부활
해방공간 맹활약 구국정신 66년만에 재건
총재 손진 옹, 애국원로 지도층 총결집

8.15 해방공간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결하던 시기 우익 행동단체로 맹활약했던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이 해체된 지 66년 만에 부활됐다. 지난해 11월, 서울시립 청소년 수련관에서 재건총회를 가진 서북청년단은 종북 좌파들의 난동에 맞서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으로 구국운동을 재개하겠다는 방침이다.

▲ 서북청년단 재건총회가 11월 28일 오후 2시 서울시립 청소년수련관에서 개최되었다.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서북청년단 홈페이지>

종북좌파 척결 시민구국 운동

서북청년단은 재건총회를 통해 전설의 서북청년운동 족적을 남긴 손진(95) 옹을 총재로 추대하고 부총재단은 이창우, 노학우, 이법철, 김찬수, 서무수, 전세원, 김형구, 김성민, 이애란 씨 등 9명을 선출했다.
고문단은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정기승 전 대법관 △김동길 연대 명예교수 △이대용 전 주월공사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박정인 전 백골부대장(3사단) △백상창 사회병리연구소장 △채병률 실향민중앙회장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 △고영주 변호사 △안찬일 교수 등으로 지금껏 종북 좌파 척결 운동을 지도해 온 11명을 위촉했다.
또 서북청년단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은 배성관 예비역 육군대령(육사 25기), 구국결사대장은 정함철, 교육훈련원장은 염동용 부경대 교수가 맡았다.
서북청년단은 재건총회를 통해 1946년 11월 서울 YMCA 강당에서 결성됐던 청년단의 반공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의 종북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북한 자유화운동의 선봉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행동양식은 오늘의 시대상황에 맞게 ‘시민구국운동’으로 전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서북청년단은 행동강령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나라사랑 △정의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는 법치(法治) 확립 △종북, 반역, 거짓선동, 부패척결 및 △북의 주체사상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구국투쟁 등으로 채택했다.

좌파진영 방해 수난 겪으며 재건

서북청년단 재건총회는 좌파진영의 방해공작으로 경찰이 출동하여 겨우 질서를 잡는 수

▲ 서북청년단은 재건총회를 통해 전설의 서북청년운동 족적을 남긴 손진 옹을 총재로 추대했다. <사진출처=서북청년단 홈페이지>

난을 겪었다. 총회장소로 예약된 서울시립 청소년 수련관 측이 행사 하루 전날 갑자기 총회장소를 빌려줄 수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대관계약 취소를 통보했다. 재건위 측은 이미 3층 강당을 2시간 사용하는 조건으로 계약금을 지불하고 발기인 등에게 사전 통보하여 장소를 변경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수련원 측은 시설 대관운영규칙상 반대 측이 몰려오겠다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당일 3층 복도를 철문으로 막아 출입을 봉쇄했다. 재건위는 1층 로비에서라도 행사를 강행하려 했지만 반대 측이 몰려와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이에 경찰에 신고하여 중부경찰서 전경 50명이 출동하고 경비과장이 “합법집회를 방해하면 연행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여 겨우 총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음향시설과 영상시설을 확보할 수 없어 육성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재건 총회 후 배성관 사무총장은 대관약속을 위반한 수련원 측에 대해 권리행사 방해, 업무방해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행사를 방해한 배후세력을 끝까지 추적하여 서북청년단 깃발로 응징하겠다고 다짐했다.
서북청년단 재건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수석 부대변인은 “21세기 들어 해괴한 단체가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 시계는 거꾸로 도는 모양”이라고 악평하고 영화평론가 허지웅 씨는 “끔찍하고 창피한 역사”, 진보 좌파성향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지존파 보다 훨씬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인 서북청년단의 재건위는 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보수 우익 언론에서는 “서북청년단은 난장판 된 우리사회를 몸으로 지키겠다는 국민저항권 차원의 보위책으로 풀뿌리 우파 시민운동의 희망”이라고 극찬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김일성에 항거 월남한 청년조직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이 결성된 것은 1946년 11월로 김일성의 독재에 항거하여 월남한 이북 각도 청년들의 우국충정이었다. 서북청년단은 종로 YMCA 강당 결성식에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북선청년회 △황해도회청년부 △양호단 △평안청년회 등이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우기성(鮮于基聖) 씨를 선출했다.
서북청년단은 결성 이후 1947년 3.1절 기념식 후 좌우 대결 시가행진 시 남대문 충돌사건을 비롯하여 부산극장 사건, 부산 좌익청년운동 사무실 습격사건 등으로 좌익세력 난동에 강력 대응했다. 또한 대북공작으로 김일성 암살조를 두 차례나 평양으로 밀파하고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진압에도 큰 공을 쌓았다.
그러나 서북청년단 결성이후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장군의 대동(大同)청년단,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민족(民族)청년단 등이 속출하여 갈등을 빚다가 대동청년단으로 통합됐다. 이때 통합에 반대한 문봉제(文鳳濟), 김성주(金聖柱) 씨 등 잔류파는 계속 서북청년단 간판을 유지했다.
그 뒤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서북청년단은 대한청년단으로 흡수되어 이름이 사라졌다가 지난해 재건됐기에 66년 만의 부활이다.
당시 대한청년단은 총재 이승만 대통령, 최고 지도위원 장택상(張澤相), 지청천, 전진한(錢鎭漢), 서상천(徐相天), 유진산(柳珍山), 강낙원(姜樂遠), 단장은 신성모(申性模) 씨 등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1953년 9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청년단도 해산명령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상승, 무패의 백골부대 깃발계승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의 좌우익 대결뿐만 아니라 6.25 전쟁 중 포병장교, 첩보장교, 정훈장교 등으로 참전하고 적진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에도 전공을 세웠다.

▲ (오른쪽부터) 서북청년단 배성관 사무총장, 손진 총재, 정함철 구국결사대장.<사진출처=서북청년단 홈페이지>

백골(白骨)부대로 불린 육군 제18연대가 바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연승, 무패의 전과를 기록했다. 함남 영흥 출신인 한신(韓信) 대령이 서북청년 3,000명을 모아 최강의 전투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 재건 서북청년단 고문으로 위촉된 박정인(朴定仁) 장군은 백골부대장에 부임한 후 적의 GOP 도발에 사단포를 동원한 강력 응징으로 김일성마저 놀라 자빠진 진기록을 세웠다. 이 사건으로 박 장군은 사단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뒤 남북대화 도중에 북측에서 “박정인 그 자가 지금도 살아 있느냐”고 물어 보더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재건 서북청년단이 이 백골부대 기(旗)를 상징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백골깃발은 “백골이 진토 되도록 살신보국 한다”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보·전략 전문가 출신의 구국열정

서북청년단 사무총장 배성관 예비역 대령은 부산 출신으로 육사 25기 소위로 임관된 후 전방 GP 장 근무를 마치고 국방부, 육본, 합참, 한미연합사 등의 정보·전략분야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다.
또한 국정원 전신 중앙정보부에 파견되어 북한 정보도 깊이 다루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 국방정보대학에서 전략정보를 전공하여 이 분야 전문가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왔었다.
배 사무총장은 서북청년단 재건총회 방해사건 관련 고소장을 경찰에 접수했다. 또 재건총회를 악의적으로 비판한 영화평론가 허지웅 씨와 조국 교수는 서북청년단 아닌 일반 시민이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여 곧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장 정함철 씨와 교육훈련원장 염동용 교수는 배 총장과 함께 모두 부산 출신이다. 서북청년단의 뿌리가 이북 각도 출신 청년들이지만 세월이 흘러 재건 청년단 지도부에 이북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7호 (2015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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