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미국의 일본개혁

[일본과 일본인 제14화]

일본의 패전 70년
실패한 미국의 일본개혁
한국은 지식국가로 잘사는 나라 돼야

글/ 이원홍(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일공사, KBS 사장, 문화공보부장관 역임)

2015년 8월 15일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우리가 해방과 독립을 쟁취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창세기 이래 가장 험난했던 20세기 터널을 탈출한지도 15년이 된다. 한민족의 고난은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1875년 운양호(雲楊號)사건이 시발점이다. 일제의 패망까지 무려 130년. 일제침략은 35년이 아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전율의 터널이었다. 참고 견디며 오늘을 이루어냈다. 통계청 예측을 보면 2015년은 1인당 GNP가 31.705달러, 2019년 40.989달러, 앞으로 5년이면 4만 달러 대에 진입한다.
한국과 한국인을 능욕하는 일본의 버릇을 고쳐주는 길은 우리가 도덕적 지식국가(道德的知識國家)로 일본 보다 잘사는 나라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이 두 가지가 일본의 고질병을 고쳐주는 명약이다. 외국기관의 연구에 한국이 일본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제치욕은 35년 아닌 130년

문화답사기 작가 유흥준씨가“한일관계 교류에서 정말로 나빴던 적은 단 두 번밖에 없다”고 말하면서“임진왜란 7년과 일제식민치하 35년”이라고 설명했다.(11월 14일자 중앙일보). 해방 이후 반일세력의 요새는 진보적 지식인이었다는데 유씨의 설명은 뜻밖이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저질은 가장 잔학한 침략전쟁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거기에 왜구의 노략질과 크고 작은 침략전쟁을 합하면 일본의 한반도침공이 무려 900회에 달한다고 한다. 그 이전은 차치하고라도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자행된 왜구(倭寇)의 침탈과 일제침략의 수순이었던 명치(明治)의 잔학행위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일본은 대륙문화의 젖꼭지이자 박물관

거꾸로 생각해 보면 더욱 답답하다. 한반도는 일본을 개화시킨 문명의 젖줄이다. 토기문명(土器文明)과 벼농사로 인간의 생존기술을 전해주었고, 야모토(大和)와 가와치(河內)에서 나라 세우는 길을 가르쳐주며 불교와 천자문(千字文), 서화(書畵), 도예(陶藝)와 관개기술(灌漑技術)까지 사람이 풍성하게 사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은 태평양 바다위의 섬나라다. 대륙의 문명 문화는 한반도에서 끝이 난다. 대륙의 선진문화 통로는 한반도밖에 없다. 한반도의 지형도 대륙의 영양으로 통통해진 젖꼭지로 보이지 않는가. 일본을 양육하는 문명 문화의 젖꼭지다.
일본은 한반도문화의 박물관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진귀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것을 발굴해서 알리는 것은 역사행위(歷史行爲)다. 김달수(金達壽) 이진희(李進熙) 정조문(鄭詔文) 김정주(金正柱) 강덕상(姜德相) 같은 선각자들이 있어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 여기까지 계도되었다. 김달수와 이진희의“일본 속의 조선문화”는 일본의 지식인뿐만 아니라 학문수준이 높은 일본학자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작가 가운데는 한반도전래문화(韓半島傳來文化)발굴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우리가 챙기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명량관객 2000만의 힘을 보라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을 그린 영화“명량”의 상영은 참으로 좋았다. 관객도 2000만을 넘을 것이라 한다.“한ㆍ일 70년”에 진입하는 한국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었다. 그래서 자존자대(自尊自大)의 대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원균(元均)의 참패에서 살아남은 12척의 전선(戰船)으로 133척의 왜적(倭賊) 대군을 섬멸한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전쟁에 관객이 공감했다.
한국과 일본은 숙명적인 경쟁관계다. 사람은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나라는 근공원교(近攻遠交)로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무기를 들고 전쟁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만사를 경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도 정치도 외교도 모두 경쟁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옳을 수도 있다. 역사가 경쟁의 기록이니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명량해전은 우리의 전장(戰場)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본과 견주는 삶의 질 경쟁도 따지고 보면 전투적 경쟁이다.

한ㆍ일 대립에 미소하는 아베

이상한 표현 같지만 우리는 아베(安倍晋三)일본 총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배운다기보다 깨닫는다. 한국과 일본 사이를 태평양보다 더 멀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의 정치색깔을 추종하는 극우파(極右派)가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의 한류가(韓流街)를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헤이트ㆍ데모”로 무참히 짓밟아도 실오라기정도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2020 도쿄 올림픽에 장애가 될까 걱정하며 뛰고 있는 사람은 도쿄도지사(東京都知事)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한국과 일본을 으르렁거리게 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政治)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베의 정치적 목표는 웬만한 한국 사람이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할 정도다.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호소한 그의 염원이 자민당(自民) 단독 3분의 2 이상 당선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단독 개헌선(單獨改憲線)확보였다. 그 속셈은 첫째 구시대 일본으로 돌아가는 개헌(改憲)에 성공해서, 둘째 천황중심의 국체(國體)를 복원(復元)하고, 셋째 일본을 군사대국(軍事大國)으로 만들어 패전(敗戰)의 한(恨)을 풀겠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경제니 복지니 떠들고 있는 것은 이 세 가지 야심을 이루어내는데 필요한 환경조성에 불과하다.

아베, 선거보도 봉쇄로 小敗유지

아베는 여론봉쇄(輿論封鎖)로 총선을 이겼다. 선거방송의 총량이 종전 선거의 3분의1 정도로 격감했다. 그런데도 아베가 승리하지 못했다. 2석이 낙선했다. 소패(小敗)라 하여야 옳을 것이다. 여론봉쇄전술은 아베와 그의 주변이 2년간 다져온 전술이다. 눈 감고 귀 막은 인사로 NHK 회장과 경영진을“아베의 준마(駿馬)”로 바꿔치운 것이 위기구제의 비방(秘方)이 되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의하면 자민당이“NHKN과 재경 민방(民放) 5사에 출연자의 선정(選定)과 거리의 소리 방송 등 세세한 사례를 들어‘공평’한 보도를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고 설득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다른 민방간부는“틀림없는 <압력>이다. 보도프로에는 위축이 없었지만 정보프로는 신중하게 되어버린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여론조사에는 11월 24일 자민 32%(前回32) 민주6(前5) 공명3(前3) 아베지지39(前39) 반대40(前40)이었던 것이 12월 1일에는 자민27(前32) 민주7(前6) 공명4(前3) 아베지지40(전39) 반대39(전40), 비례대표 자민34(37) 민주13(11) 공명7(5)등으로 미묘한 차이가 드러났다. 올해(2014) 2월 국경 없는 기자단이 발표한 보도의 자유도(自由度)랭킹에서 일본은 한국의 57위 보다 낮은 59위(2010년 11위, 2013년 53위)로 추락했다.

그래도 자민당 단독 개헌은 不可

아베총리의 역사인식과 종군위안부문제에는 변화가 없다. 정권환경에도 큰 변화는 없다. 그러나 극우(極右)의 소굴 차세대당(次世代黨)이 무너졌다. 반한(反韓)의 선두 이시하라(石原愼太郞)와 핵무장(核武裝)운동가 다모가미(田母神俊雄), 이시하라의 수족 같은 니시무라(西村眞悟), 그리고 종군위안부 반대의 선봉 야마다(山田宏)가 모두 낙선했다. 민의(民意)의 승리다. 일본국민이 극우정당(極右政黨)을 거부했다. 그래서 차세대당(次世代黨)이 19석 중에서 2석 밖에 건지지 못했다. 반면 8석에 불과했던 공산당(共産黨)이 21석으로 대승하여 의안발의권(議案發議權)을 확보했다. 아베 덕분이다. 그러나 까다로운 시련이 아베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설명하지만 자민당(自民)은 압승이 아니라 전(293)보다 2석(291)이 줄었다. 공명당이 4석(35) 늘린 것으로 연립여당이 3분의 2선(317)을 초과하는 326석을 확보하는 모양세가 되었지만 아베의 숙원인 자민당 단독 3분의 2선에는 26석이 부족하다. 아베가 노리고 있는 개헌안(改憲案)발의에는 공명당의 동의가 필수조건이 되었다. 공명당이 자민당의 개헌안에 합류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귀추에 따라서는 아베 총리의 중도하차라는 역풍이 될 수도 있다.

국가의 근본은 바꿀 수 없는 것

아베와 자민당은 역사의 역행이다. 선거는 만능이 아니다. 선거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뒤집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아베의 개헌론(改憲論)도 수상하다. 우리 헌법은 3분의 2가 아니라 전원이 일치해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이념(國家理念)과 국가의 요건은 고치지 못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베에게는 패전(敗戰)으로 재생한 일본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이 없다. 1946년 11월에 공포되어 일본국의 근본(根本)이 된 헌법은 2016년이면 70세가 되는데 이것을 뜯어고쳐 군사대국의 밑거름으로 하겠다는 것은 대들보를 뽑아 불쏘시개로 하겠다는 것과 같다. 아베는 1954년생이다. 나이로 60세다. 헌법보다 열 살이나 젊다. 이 헌법 아래 역사상 처음으로 번영을 누린 한국전쟁 특수경기(特需景氣)때 출생하여 병역(兵役)걱정 없이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평화헌법의 은덕을 누린 사람이다. 아베가 할아버지 기시(岸信介) 전 총리로부터 배웠다면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기시는 A급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었다가 미국이 점령정책을 수정한 “역(逆)코스(reverse course)” 덕분에 풀려난 분이다. 평화헌법의 혜택을 입었다. 만약에 천황이 국체(國體)가 되고 제9조 전쟁금지조항이 없었다면 이 70년 사이에 일본은 다시 침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침몰하면 일본은 없다.
유엔에 가입한 회원국이 193개국이다. 지난 70년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국가가 무려 183개나 된다. 중대한 계기가 공산권(共産圈)의 붕괴다. 대표적인 것이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社會主義共和國聯邦)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되어 1991년 소멸되었다. 그리고 동독(東獨)인 독일 민주공화국(獨逸民主共和國:1949-1990), 남(南)베트남 공화국(共和國:1949-1976)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민테른 산하에서 공산주의 승리를 선창한 소련이 권력의 모순과 부패로 74년 만에 소멸되자 그 여파가 지구적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이 모두 나라의 진로를 잘못 정했기 때문이다. 공산사회(共産社會)를 인류의 모체처럼 선전했는데 종주국 소련은 겨우 70년을 넘기고 붕괴해 버렸다. 이상(理想)도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냉전으로 뒤집어진 초기 대일정책

일본은 냉전(冷戰)의 여파로 전후(戰後)에 또 한 번 실패한 국가다. 깊은 것은 모르지만 미국은 냉전의 주역인 소련과 공산권을 얕본 것 같다. 맥아더 장군의 미국 의회 청문회(聽聞會)기록을 보아도 그렇다. 맥아더는 군사력의 낙후상태를 들어 한국전쟁에 가담하지 못할 것을 자신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에서 맥아더의 전공은 상처를 입었다. 전후 일본의 개혁에서도 그런 사태가 되풀이되었다. 2차대전 말기 1942년경부터 연구하고 준비해온 일본의 전후처리가 시행 된지 불과 3,4년 만에 근간을 수정하여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핵심적인 점령정책을 수정하면서도 점령초기인 1946년에 제정한 새 헌법 평화헌법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우선 미국정부의 초기 대일정책(初期對日政策)부터 검토해보기로 한다.
일본 보다 먼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전후처리가 먼저 시작되었다. 독일이 1945년 5월 8일 항복했으나 이탈리아는 1943년 7월 25일 무소리니에 반대하는 쿠데타로 정권이 붕괴되어 이미 연합군과 휴전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일본은 포츠담선언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쇼와천황(昭和天皇)의 방송으로 항복을 선포하고 전후처리 교섭에 들어간 상태였다. 전범국(戰犯國)에 대해서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어김없이 집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미 기본방침이 되었다. 핵심적인 과제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협의로 진행되었다.

직접군정에서 간접군정으로 바뀐 일본점령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海戰)에서 일본에 패배한 미국은 1943년 가타르카나르 승리로 전세가 회복되자 1944년 들어 전후계획위원회(戰後計劃委員會:PWC)와 정책위원회(政策委員會:PC)를 설치하고 두뇌를 모아 전후계획작성에 들어갔다. 1943년에 이미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한 국가와 지역위원회(CAC)가 있었으나 그 곳에서 종합한 정책안(政策案)을 신설된 전후계획위원회(PWC)로 넘기는 방법으로 기구를 통합했다. 1941년 2월에 설치된 전후계획 특별조사부(特別調査部:SR)가 있었으나 이것도 전후계획위원회(PWC)의 하부기관으로 통합되었다.
미국 최고의 두뇌들이 이렇게 전후정책수립에 동원되어 결정된 것이 패전국 일본의 전후처리였다.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진 1944년 12월 국무부(國務部)는 전후계획위원회(PWC)를 폐지하고 대신 국무ㆍ육군ㆍ해군통합위원회(國務ㆍ陸軍ㆍ海軍統合委員會:SWNCC)를 신설했다. 영어로는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ee로 약칭 SWNCC(스윙크)라 하였다. 1947년에는 국가안전보장법에 따라 공군이 참가하게 되어 명칭도 State-Army-Navy-Air Force Coordinating Commitee, 약칭 SANACC(사내이크)로 변경되었다.
미국은 점령 이후에도 정책연구가 계속되어 사태대응이 빨랐다. 연구대상에 한국을 포함시킨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극동지역의 광범위한 문제를 검토하는 극동소위원회(極東小委員會:SWNCC Subcommitee for the Far East), 약칭 SFE를 통합위원회의 하부기관으로 만들어 정책작성을 전담시켰다. 이렇게 작성되는 대일점령정책(對日占領政策)은 모두 연번호로 표시되는 SWNCC문서로 보존되고 있다.
미국은 당초 일본의 점령방식을 직접군정(直接軍政)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국무부(國務部)가 1년 넘어 검토 끝에 작성한 초기대일정책요강초안(初期對日政策要綱草案)을 심의한 국무ㆍ육군ㆍ해군 3부조정위원회(國務ㆍ陸軍ㆍ海軍 3部調整委員會:SWNCC)의 하부기관인 극동소위원회(極東小委員會:SFE)도 거기에 동의했다. 문서도 SWNCC150으로 확정되었다. 1945년 6월 11일이었다. 40여일 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고 일본이 수락했다.
사태가 급진전했다. 극동소위원회는 다시 계획을 수정하여 SWNCC150/1 문서로 확정했다. 그러나 대일점령(對日占領)의 직접 명령자인 육군부(陸軍部)가 최종 조정자로 나섰다. 직접군정을 간접군정(間接軍政)으로 하는 등 수정을 가했다. 문서는 SWNCC150/3으로 바꾸어졌다.

초기 점령정책 45년 9월 22일 공표

국무부가 1년여 씨름 끝에 성안한“미국의 초기대일정책요강초안(初期對日政策要綱草案)이 대일정책기본문서(對日政策基本文書)인 SWNCC150으로 확정되었지만 3전 4전을 거듭하여 SWNCC150/3으로 수정되었다. 문서는 다시 국무부로 이송되고 통합참모본부(統合參謀本部)의 의견을 수렴하여 SWNCC150/4로 바꾸어져 3부 조정위원회(SWNCC)에 회부되어 승인을 얻었다. 최종단계인 대통령의 제가를 필한 문서 SWNCC150/4/A로 확정되어 1945년 9월 22일 국무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내용이 방대하여 중요부분만 초역했다.

[궁극목적]
*일본이 다시 미국의 위협이 되거나 세계평화와 안전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할 것.
*타국의 권리를 존중하고 유엔 헌장과 원칙이 밝히고 있는 미국의 목적을 지지하는 평화적이며 책임 있는 정부를 궁극적으로 수립할 것.
*이 목적은 다음 수단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
1. 일본국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 구주(九州), 사국(四國), 주변 소도(小島)로 제한한다.
2. 일본국은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비군사화(非軍事化)되어야 한다.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의 영향력과 일본국의 정치생활, 경제생활 및 사회생활에서 일소되어야 한다. 군국주의와 그 침략정신을 표시하는 제도는 강력히 억압되어야 한다. (3, 4항 생략)
[연합국의 권한]
<군사점령(軍事占領)>
일본국 본토를 군사점령한다. 점령군(占領軍)은 미국이 임명하는 최고사령관(最高司令官)의 지휘하에 둔다. 점령 및 관리를 위한 정책은 미국의 정책으로 한다.
<일본정부와의 관계>
천황과 일본정부의 권한은 일체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 최고사령관은 천황을 포함한 일본정부기구와 여러 기관을 통해 행사된다.
[정치]
<무장해제와 비군사화>
일본국은 육해공군, 비밀경찰조직, 또는 민간항공(民間航空)을 보유할 수 없다. 지상(地上) 항공 및 해군병력은 무장해제 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대본영(大本營), 참모본부(軍令部) 및 일체의 비밀경찰조직은 해소한다. 육해군 자재(資材), 육해군 함선(艦船), 육해군 시설(施設), 민간항공기는 최고사령관이 요구하는 곳에서 처분되어야 한다. 일본국 대본영 및 참모본부(군령부)의 고급직원, 일본국 정부의 타의 육해군고급직원, 초국가주의적(超國家主義的) 및 군국주의적(軍國主義的) 조직의 지도자와 군국주의 및 침략의 중요한 추진자는 구금(拘禁)하여 처분을 위해 유치(留置)한다. 군국주의자와 호전적 국가주의(好戰的國家主義)의 적극적 추진자는 공직 및 공적(公的) 또는 중요한 사적책임(私的責任)이 있는 어떠한 지위에서도 배제되어야 한다. 초국가주의적 또는 군국주의적 사회상(社會上) 정치상(政治上) 직업상(職業上)의 단체와 기관은 해산하고 금지한다.
이론상, 실천상의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準軍事訓鍊 포함)는 교육제도에서 제거한다. 직업적 구육해군장교와 하사관 및 타의 일체의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의 추진자는 감독적 및 교육적 지위에서 배제한다.
<전쟁범죄인>
최고사령관 또는 적당한 연합국기관에 의해 전쟁범죄인(戰爭犯罪人)으로 고발된 자(연합국의 포로 기타의 국민을 학대한 것으로 고발된 자를 포함)는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 유죄판결이 있을 경우 처벌한다. 연합국 중의 타의 나라로부터 그 국민에 대한 범죄를 이유로 요구된 자는 최고사령관에 의해 재판을 위해 또는 증인으로서 필요하지 않는 한 당해국에 인도하여 구금한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과정에 대한 요구의 장려>
종교적 자유는 점령과 동시에 즉각 선언한다. 동시에 일본인에 대한 초국가주의적 및 군국주의적 조직과 운동은 종교의 외피의 그늘에 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명시한다.
인종, 국적, 신앙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차별대우를 규정한 법률과 명령 및 규칙은 폐지한다. 본 문서에 기재된 목적과 정책에 모순되는 것은 폐지, 정지, 또는 필요에 따라 수정한다. 이러한 법규의 실시를 임무로 하는 기관은 폐지 또는 적절하게 개조하여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인해 일본국 당국에 의해 불법으로 감금되고 있는 자는 석방한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법제도(司法制度)와 법률제도(法律制度) 및 경찰제도(警察制度)는 (문서에 제시된 정책에)적합하게 개혁되도록 점진적으로 지도한다.
[경제]
<경제상(經濟上)의 비군사화(非軍事化)>
일본 군사력의 현존 경제기초는 파괴(破壞)하여 재흥(再興)을 허여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다음 사항을 포함한 계획을 실시하여야 한다.
*군대 또는 군사시설의 장비와 유지 또는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물자생산을 즉시 정지 또는 금지한다.
*해군함선과 일체의 형식의 항공기를 포함한 군용기재(軍用器材)의 생산 또는 수리를 위한 일체의 전문적 시설을 금지한다.
*음폐 또는 의장(擬裝)된 군비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국 경제활동의 특정부문에 대한 감찰관리제도(監察管理制度)를 설치한다.
*가치를 주로 전쟁준비에 두고 있는 특정산업(特定産業) 또는 생산부문을 제거한다.
*전쟁수행력의 증진을 지향하는 전문적 연구와 교육을 금지한다.
*장래의 평화적수요(平和的需要) 한도(限度)에 일본중공업의 규모와 성격을 제한한다.
*비군사화 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범위 안으로 일본국 상선(商船)을 제한한다.
<민주주의세력의 조장>
민주주의 기반위에 조직된 노동, 산업 및 농업에 있어서의 조직의 발전은 이를 장려한다.
일본국민의 평화적 경향을 강화하여 경제활동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지배하고 지도하는 것이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제활동과 경제조직 및 지도의 형태는 이를 지지한다.
일본의 경제활동을 평화적 목적을 위해 지도하지 않은 자는 경제계의 중요한 지위에 머물게 하거나 선임하는 것을 금지한다.
산업과 금융의 대(大) 콤비네이션의 해체계획을 지지한다.
[배상(賠償)과 반환]
<배상>
일본국이 보유하여야 하는 영역외에 있는 재산은 관계 연합국당국의 결정에 따라 인도한다.
<반환>
일체의 식별이 가능한 약탈재산은 이를 완전 신속하게 반환케 한다.
[재정 화폐 및 은행정책]
일체의 상품수출입, 외국환(外國換) 및 금융거래에 대한 통제를 유지한다.
[황실재산(皇室財産)]
황실재산은 어떠한 조치로도 면제되지 않는다.
이상이 미국의 초기대일방침이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 1일 초기 기본지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시달되었다. 많은 준수사항이 시달되었지만 몇 가지만 예로 들면 “귀관은 모든 무기, 탄약, 함정 및 비군사적용도(非軍事的用途)의 항공기를 포함한 군용기재(軍用器材)를 압수 또는 파괴하고 그 생산을 정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인 대만인(臺灣人)과 조선인(朝鮮人)은 군사상의 안전이 허용되는 한 해방국민으로 취급하라”고 주의를 환기했다.

일본을 스위스 같은 태평양 섬나라로

이대로라면 전후(戰後) 일본은 상당한 부분 군국주의 침략국가의 오명을 벗는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구체적 시행단계로 들어갔다. 군사시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대부분의 시설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일본 피해국가에 제공했다. 군용활주로가 파괴되고 군수공장도 생산장비를 외국으로 반출하고 파괴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재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철저하게 파괴해서 제거했다.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을 티끌만큼이라도 남기지 않았다. 모조리 두들겨 부수었다. 미국은 일본을 스위스 같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나라로, 전쟁 없는 평화의 섬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극동의 섬나라 일본에 성경적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칼을 두들겨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끼리 전쟁을 하거나 군사훈련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미가. 4장3절4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이사야는“그가 모든 민족을 심판하고 국제분쟁을 해결하실 것이니 사람들이 칼을 두들겨 보습을 만들고 창을 두들겨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끼리 전쟁을 하거나 군사훈련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고 했다.(이사야2장4절)
미국의 초기 대일정책은 하나의 유토피아가 아니었으면 처절한 복수전이었다. 일본인 우치무라(內村鑑三)는“이 세상의 지자(智者)들은 전쟁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 밖에 알지 못한다. 옛날의 주(周)의 무왕(武王)도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소신에 다를 것이 없었다.”고 개탄했다.
전쟁세력의 재기를 막는 길은 자금을 봉쇄하는 길이다. 그 방법은 전쟁수행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재벌(財閥)을 해체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이것을 경제민주화(經濟民主化)로 평가했다. 일본을 스위스 같은 섬나라로 만들려면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을 해체하여 탈공업화(脫工業化)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국내의 중화학공업을 플랜트 채로 제3국으로 이전하여야 한다. 그래서 일본의 허용공업력(許容工業力)을 일본이 침략한 나라의 생활수준으로 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군수산업(軍需産業)으로 지정되었던 총체적 산업시설의 30%를 배상시설(賠償施設)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그 대상이 중국 54%, 버마와 마래이 15.4%, 필리핀 19%, 네덜란드 11.5%로 정해졌다. 이 시설은 모두 신품 같이 손질한 것으로 플랜트를 조립하면 가동할 수 있는 공장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1946년의 일본경제가 1930년에서 34년까지 4년간의 18%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과도한 약체화(弱體化)를 지적하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본의 평화공작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47년경에는 냉전(冷戰)의 열풍이 지구를 휩쓸고 있었다. 소련의 공산주의체제가 유럽을 잠식하고 중국공산당의 모택동(毛澤東)이 장개석(蔣介石)을 내몰며 중국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봉쇄를 주안으로 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마셜 플랜을 공표하는 것으로 공산주의 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문제는 평화공작을 시작한 일본이었다. 지리적으로 소련에 가까운 곳이면서 러시아혁명 때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한 소련파와 중공파의 국내침투가 활발해졌다. (다음호에 계속)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5호 (2015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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