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번번이 되풀이 시작
올 새해만은

글 / 金 淑 (김숙 본지 상임 편집위원)

천리를 가기 위해서는 한걸음부터 내디뎌야 한다. 천리는 목표고 한걸음은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대치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에게는 여러 방면에 재주가 뛰어난 친구가 하나 있다. 팔등신 가까운 체형에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는 능력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니 그만하면 신의 보살핌을 한 몸에 받았다 할 만하다. 친구는 두툼한 수첩을 갖고 다니며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그때그때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처럼, 창의력이나 재주가 전무한 필자라도 그 친구 덕에 덩달아 특허청의 현관문을 밟은 횟수가 그럭저럭 꽤 여러 번이나 되었다.
처음 몇 해는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언젠가는, 아이디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입만 열면 그저 감탄사를 쏟아내는 필자가 딱해보였음인지 빼곡히 적혀있는 기밀들을 들춰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었고 다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준 선심(?)만으로도 눈물겨웠다.
그럴싸 그러해서 누가 뭐래도 그 친구가 꼭 대박을 터뜨려 일하지 않고도 평생 놀고먹을 인생이 펼쳐질 거라 믿었다. 아울러 긴긴 세월 지치지 않고 옆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대가로 필자에게도 필시 과하다 싶을 만큼의 콩고물이 떨어질 것으로도 굳게 믿었다. 우스갯말로 평생 마실 김칫국을 그때 다 들이켰던 것 같다.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세월이 흘러갔다. 재주 없는 필자는 한 길을 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련을 갖고 다른 길을 기웃거려야 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반면 이곳저곳에 능력이 출중한 친구는 육십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특허청을 들락거리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수집 또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능력이 많음은 부족하다거나 없는 것 보다야 백번 낫다. 거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다는 말을 한 겹 뒤집어보면 경우에 따라 아무 것도 없음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재주가 많다 보니 삶을 대함에 있어서도 어느 한 곳에 치열하기 어렵고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함은 결국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서운 함정이다.
본인이 선택한 삶에 몰두하지 못하고 늘 딴 곳을 엿보며 서성거리는 삶은 초라함과 측은함으로 남아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으로 살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딱히 재주가 없어 잔꾀 부리지 않은 필자의 삶이 그럭저럭 평균치는 되지 않나 스스로 위로해 본다. 사실, 예전에는 다소 뒤처지는 듯한 미련한 삶에 회의가 일었던 적도 더러 있었다. 허나 인생이 어디 한순간의 반짝임으로 끝나는 단거리 경주던가...
종주를 위해서는 끝까지 힘의 안배를 원칙으로 삼고 꾸준히 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장애물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 찬바람도 맞고 눈보라도 이겨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신년벽두가 되었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계획들이 마구 쏟아질 것인데, 살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청사진이 화려한 계획일수록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계획이 질서의 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 말 안에는 전혀 상반된 뜻이 숨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도 달성된다면 굳이 그 말이 필요 없을 테니 하는 얘기다.
여기서 하기는 좀 다른 말이긴 한데 일찍이 영원을 맹세한 사랑이 이루어짐을 본 적이 없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맹세할 일이 뭐 있으랴... 목숨을 건다느니, 생명을 건다느니 따위의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필자는 언약도 계획으로 간주한다. 언약이란 내일에 대한 약속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내일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을 약속함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일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계획 없는 삶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열심히 살다보면 오늘이 쌓여 삶이 되고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새끼손가락 걸어 맹세하지 않아도, 달력에 빨간 줄, 파란 줄을 그어가며 수선스럽게 계획 세우지 않아도 오늘이 그럴싸한 사람의 내일은 당연히 견고할 것이다. 설령 계획이 없는 묵묵한 삶일 지라도 그 묵직한 무게는 어떤 맹세도 따를 수 없는 차원 높은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계획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시작은 한 번으로 족하다. 번번이 하는 시작은 한걸음도 떼지 못한 제자리걸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차분히 훑어봐야 할 때다.
심기일전후의 긴 호흡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채로운 색깔로 덧입혀야 할 시각이다. 새로운 해(年)가 열렸고 아직 갈 길이 멀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5호 (2015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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