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량’ 영화 포스터

근래 영화 ‘명량’이 높은 인기를 끌면서 화제다. 이순신(李舜臣)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 성공을 계기로 이순신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났다. 반가운 현상이다. 영화 ‘명량’의 성공을 계기로 이순신 죽이기와 원균(元均) 영웅 만들기를 되돌아본다.

영화 '명량' 대흥행
'원균 명장론' 망발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배를 버리고 도망간 패장아닌가

임진왜란 뒤 공신을 선정하는데 1등공신은 이순신·권율(權慄)·원균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처음에는 2등공신으로 올라갔다. 공신도감 도제조, 즉 공신선정위원회의 위원장 격인 이항복(李恒福)이 선무공신을 정할 때에 원균을 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와 함께 2등으로 올렸는데 선조(宣祖)가 1등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때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제 원균을 2등으로 낮추어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임금이 그렇게 생떼를 쓰자 이항복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하며 발을 뺐다.
“원균은 왜란 초에 수군이(부하가) 없는 장수였으나 이순신 덕택으로 해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3도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이순신·권율과 같은 1등공신으로 책정하기 어려워서 2등공신으로 내려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1등공신으로 책정하겠습니다.”
선조가 원균을 1등으로 올려준 것은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면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칠천량전투에서 참패하여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간교한 술수였다. 칠천량패전 직후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다’ 면서 처벌을 건의하자 끝까지 원균을 감싸고돌면서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자 사관은 이렇게 통렬히 비판했다.
“한산도에서 남김없이 패전한 원균은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야 마땅하다. 또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균은 성질이 포악한 일개 무뢰한이다. 이순신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통제사가 되었으며, 단번에 적을 섬멸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부족하여 패전했다. 그러고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바람에 장병들을 모두 죽게 했다. 이런 원균의 죄를 누가 벌주어야 하는가. …이런 일을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릴 것 같다.”

선조와 원균세력은 이순신 깎아내리기

근래에도 가끔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돼먹지 못한 ‘원균 명장론’, 또는 ‘원균 용장론’은 이처럼 당시 국왕이던 선조가 원조였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명장이고 용장이란 말인가. 명장이라면 전쟁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빛나는 전공을 세워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 어떤 사서에도 원균이 임진왜란이든 그 이전이든 어디에서 적을 무찌르고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는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선조와 원균의 후원세력인 서인들이 끊임없이 이순신을 깎아내린 까닭이 오로지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한 데에 있었다. 원균을 등용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원균을 1등공신으로 올리도록 강요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이순신이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게 잡혀가고 그토록 원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원균은 이순신이 아끼던 역전의 장수들 대부분을 갈아 치우고 자신의 뜻에 맹종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가 하면, 군비는 허술히 하는 대신 운주당에 들어앉아 주색에만 빠졌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렇게 나온다.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해서는 순신이 시행하던 모든 군중 약속을 변경하고, 부하 장수와 군사들로서 순신에게 신임 받던 사람은 모두 쫓아버렸으며, 그 중에서도 이영남(李英男)은 전날 자신의 패전한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 더욱 미워하므로 군사들이 통분히 여겨마지 않았다. 또 순신이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략을 토론하던 운주당에서 원균은 애첩을 데리고 같이 기거하며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에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또 술을 좋아해서 늘 취해 있었고, 장수들도 그를 비웃고 군사에 관한 일은 전혀 말하지 않으므로 그의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이런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이순신이 잡혀가자 일본 장수들도 “이순신이 없어졌으니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고 좋아하면서 잔치까지 벌였다. 1597년 정유년 6월 하순, 그래도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던 일본군은 또다시 이중간첩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후속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밀서를 전했다. 첩보를 받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도원수 권율과 상의하여 수군의 출동을 명령했다. 일본군의 똑같은 간계에 세 차례나 넘어간 셈이었다. 명령을 받은 원균은 먼저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무찌른 뒤 수륙연합작전을 펴서 부산을 쳐야 한다면서 좀처럼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함대를 끌고나갔다가 6월 18일에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수군장수인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만 잃고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원균은 지략도 용기도 없었다

패보를 받은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출동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궤멸하기 시작했다.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한산도에 이르자 부하들은 모두 도망치게 한 뒤 군량과 무기들을 모두 불태우고 전라도로 도망쳤다. 원균은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積) 등과 함께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랐는데, 그 뒤의 자취가 종적 없이 묘연하다. 원균에게는 제대로 해전을 지휘할 지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렬히 전사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최고사령관이 함대가 전멸당하기도 전에 배를 버리고 달아날 수 있었겠는가. 원균이 과연 명장이고 용장이라면 그토록 막강하던 조선 수군을 어처구니없게 단 한 번 해전에 말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전 초에 경상우수영 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킨 원균, 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원균은 결과적으로 볼 때 선조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위해 이적행위를 자행한 2대 원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이순신 죽이기라는 점에서는 선조와 오늘날의 원균 용장론자들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 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순신 장군의 잠을 깨우고 그를 두 번 죽이는 모독행위다.

통영백성들 지금도 이순신 사모

이순신은 전투마다 앞장서서 적탄을 맞아가면서도 목숨을 걸고 승리를 위해 싸웠다. 그런데 원균이 해전에서 앞장섰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가 적탄을 맞았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원균 명장론자, 원균 용장론자들은 원균을 위해서는 없는 전공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이순신의 전공까지 거의 다 원균의 전공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임진왜란 해전의 승패는 전함과 무기, 또는 군사의 우열에 따라 갈린 것이 아니었다. 장수의 자질이 승부의 명암을 갈랐다. 원균은 아무리 우수한 전함과 화약무기, 역전의 용사가 있어도 장수가 용렬하고 무능하면 백전백패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자에 이런 기록이 있다.
“상(上)이 ‘통영의 백성들이 지금도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는 백성들이 모두 흰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여자들도 모두 흰 치마를 입습니다’하였다.”
원균이 이순신보다 훌륭한 명장이라면 옛날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이나 한산도 사람들이 어찌하여 구국의 영웅 원균을 추앙하여 향화를 베풀었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을까. 또한 원균이 임진왜란 당시 출중한 용장이며, 그의 전공을 모두 이순신이 가로챈 것이라면 어찌하여 지난 400년 동안 그런 사실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을까. 원균이 과연 이순신보다 훨씬 훌륭한 명장이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은 어찌하여 ‘원릉군(原陵君:원균)’의 후예를 자처하지 않고 ‘충무공의 후예’라고 하는 것인가. 무슨 까닭에 ‘충무공 이순신함’은 있는데 ‘원릉군 원균함’은 없는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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