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과 신용' 일편단심

▲ 라면의 원조 삼양식품 창업주 고 전중윤 명예회장

국민영양식으로 사랑받는 라면의 원조(元祖)라 불린 삼양(三養)식품 창업주 전중윤(全仲潤) 명예회장이 아흔다섯 천수를 다하고 지난 10일 별세했다. 고 이건(以建) 전중윤 명예는 ‘정직과 신용’의 일편단심으로 “온 국민이 배불리 먹으면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대의를 실천한 후 대관령의 삼양목장내에 준비된 영원한 유택으로 돌아갔다.


全仲潤(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
'정직과 신용' 일편단심
‘근면절약’ 라면으로 食足平天 헌신일생

경제개발기의 절약근면 국민식량

고인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5.16혁명으로 “배고픈 국민에게 밥을 먹여주겠다”고 국가재건 사업을 벌일때 값싸고 영양가 고른 라면을 개발했다. 1961년, 6.25 정전후 배고픈 국민들이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 주변에서 꿀꿀이 죽을 먹기위해 늘어선 행렬을 보고 10원짜리 ‘국민식량’ 개발을 착상했다.
전중윤 명예는 식품산업과는 거리가 먼 전문 금융인이었다. 제일생명보험 경영자로 일본업계를 시찰하던 중 전후 경제개발에 몰두하던 일본인들이 하루 두끼씩 ‘절약근면 식사’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 1963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라면 디자인.

알고보니 구 일본 관동군이 전시 비상식량으로 개발한 ‘건면’을 당시 미국이 잉여농산물로 원조하던 미국 밀가루로 만들어 국민영양식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40대의 보험 경영인은 국가 재건용 절약근면 국민 영양식으로 라면개발에 나선 것이다.
전사장이 일본 시찰을 끝내고 귀국길에 건면 샘플을 들고와 뜯어보니 면 제조기만 구입하면 한국형 건면으로 ‘라면’을 개발할수 있다고 확신했다. 단지 면 제조기 수입을 위한 외화조달이 문제였다.
더구나 한일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이라 정부간 대화도 어렵고 상업차관의 길도 없었다. 이에 전사장이 일본측에게 “6.25 한국전 특수로 일본경제가 부흥했으니 지금은 한국경제 개발을 위해 도와 줄때가 아니냐”고 주장하자 일본사람들이 수긍했다.
전사장은 이같은 일본측의 협조약속을 믿고 귀국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여 “배고픈 국민들에게 값싼 영양식을 공급하자면 건면이 제격”이라고 설득했다. 그뒤 박정희 대통령이 건면 샘플을 시식한 후 “맛도 좋고 영양도 좋다”는 전갈을 보내와 정부 보유불 5만달러를 불하받아 면 제조기를 도입, 삼양라면이 탄생할수 있었다.

‘한류의 원조’로 ‘식품황제’추앙

삼양식품공업이 성북구 하월곡동에 공장을 세워 1963년 9월, 국내 처음으로 라면을 생산하여 한그릇에 10원씩 판매하니 금방 불티가 났다. 처음엔 ‘라면’이

▲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앞줄 왼쪽 첫번째)의 라면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1980년대 당시 박 대통령과 박근혜양이 전중윤 명예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란 “봉제용 실이라는 말이냐”는 질문도 나왔지만 라디오 선전을 통해 선전하고 무료 시식회를 갖게되자 입소문이 널리 퍼져 국민영양식의 반열로 올라섰다.
이무렵 모두가 새벽에 출근하여 통금(通禁) 직전까지 야근하던 중노동시절이라 라면은 특근팀의 야식(夜食)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한해와 수해로 집을 떠난 재난민들의

▲ 전중윤 명예회장(왼쪽 첫번째)이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삼양라면 공장 생산라인을 점검하던 모습.

구호식으로도 간편하게 공급할수 있었다. 국방과 경제개발의 제1선을 수시로 시찰하던 박대통령이 휴전선을 지키는 장병들의 ‘불침번 야식’으로도 좋겠다고 지적했다. 박대통령은 술마신 다음날이면 라면에 고추가루를 넣어 먹으니 얼큰해서 좋더라는 말을 전중윤 사장에게 일러주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삼양라면이 1970년대 경제개발기의 국민 영양식으로 사랑받은 사실은 오늘의 7080세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삼양라면의 인기가 해외교포사회로 전파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면서 한류(韓流)의 원조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 장병들이 미 군납용으로 조달된 일본산 라면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여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미국측과 어려운 협상과정을 거쳐 삼양라면으로 대체됐다.
이로써 한국라면의 원조인 삼양식품의 전중윤 사장은 ‘식품황제’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받을수 있었다. 금융인으로 출발하여 ‘식족평천’의 대의에 도전한 전중윤 창업주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수 있었다.

우지라면 날벼락, 절치부심 극복

식품황제의 명예가 최고수준이던 노태우 정부시절 1989년 어느날 라면에 사용된 우지(牛脂)가 공업용이라는 악성 투서가 무시무시한 여론재판을 몰고 왔다. 삼양식품 창업이래 20여년간 모든 법절차를 거쳐 우지를 수입, 제조해 왔는데도 뒤늦게 음해성 투서 한장이 식품황제를 악덕기업인으로 낙인 찍었으니 청천벽력이고 날벼락이었다.

▲ 우지 라면의 오해를 딛고 일어나 삼양라면 판매촉진운동을 벌인 삼양가족들.

‘정직과 신용’의 라면 원조를 추락 시켜야 겠다는 음모가 역력했다. 삼양라면의 시장 점유율이 60%에서 순식간에 15%선으로 떨어지고 종업원 1,000여명이 일터를 잃었다. 법정투쟁을 통해 명예를 회복해야 겠다고 나섰지만 언론의 융단폭격과 검찰의 독선적 공권력 남용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수사과정에서 전문가들의 과학적 주장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참다못해 당시 김종인 보사부 장관이 TV에 출연하여 라면의 무해를 공식발표했지만 끝내 기소되고 말았다. 재판과정은 수시로 재판부를 교체하면서 무한정 시간을 끌었다. 그렇지만 검찰의 무리한 기소권 남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7월 서울고법이 전원 무죄를 선고하고 뒤이어 대법원마저 최종 무죄로 확정 판결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여론재판의 난리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문제는 삼양식품 등 무리하게 기소된 선발사의 피해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인 반면 특정 경쟁사가 국내 라면시장을 지배하게 됐으니 음해성 투서공작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삼양식품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수 있었지만 ‘풀리지 않는 숱한 의혹’을 메모로 간직한채 우지라면 파동을 절치부심(切齒腐心)으로 극복코자 했다. 그로부터 전명예는 눈물겨운 제2의 창업을 시작한 것이다.

경영은퇴하며 ‘시장의 순리’ 교훈

삼양식품은 1998년 법원에 화의(和議)를 신청한 후 거의 대부분의 자산을 매각하여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일치단결했다. 전 임직원 명의로 ‘절치부심’이라고 선언하며 창업정신으로 되돌아가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시작했다.
전 명예회장은 우지라면 무죄의 교훈으로 정치와 권력과는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또 ‘언론특력’에도 대항하지 말아야 하고 악법(惡法)도 법이라는 비싼 교훈을 새겼다고 말했다.
삼양라면의 제2 창업과정에는 옛 사람들의 성원이 답지했다. 삼양라면 인기가 폭발할때 도봉동 공장으로 확장이전 한후 도봉천변 사람들을 대량고용했다. 그들 ‘도봉동 사람들’이 우지라면 파동시에도 삼양라면을 사랑하고 IMF 외환위기때도 변함없이 ‘보은의 사랑’을 보내왔다.
전명예회장은 제2의 창업이 한단계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된 2010년 3월, 50년의 현역을 마감하고 경영은퇴했다. 장남 전인장 회장이 창업주 아래에서 20여년 경영수업을 쌓아 경영권을 승계했다. 2세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창업정신인 ‘정직과 신용’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전명예는 2세 경영에 단 한가지를 당부했다.
“지나친 경쟁에 나서지 말고 시장의 순리에 따라서 차근차근 하라”
식품황제로서 최고의 명예를 획득했다가 터무니 없는 수모와 좌절을 겪은 창업주가 경영권을 물려주며 할수 있는 최고의 값진 교훈이라고 믿어진다.

岩下老佛로 대관령목장 영면

고인은 강원도 금화군 임남면 달전리 223번지 정선 전씨 양반댁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넓은 철원평야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일제하에 천재들의 코스로 알려진 선린상고로 유학하여 총독부 체신국 보험과에 취직했으니 일찍부터 출세했다.
8.15직후에도 미 군정청에서 체신부 행정관을 거쳐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 관리 업무도 맡았다. 그뒤 6.25를 거친후 1959년 동방생명 설립에 참여했다가 정부의 요청으로 부실경영에 허덕이던 제일생명 사장으로 발탁되어 경영혁신하던 도중에 라면을 만나 식품황제가 될수 있었다.
전 명예의 기업정신은 라면에 이어 박대통령의 축산진흥 방침에 호응하여 대관령 목장 건설로 ‘식족평천’의 뜻을 펼쳐냈다. 해발 1,000m의 대관령에는 학술적으로 목장이 안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강원도 태생의 체험을 바탕으로 손수 도끼와 톱을 들고 초지(草地)를 조성하여 600만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규모의 목장을 일궈냈다.
목장은 우유와 담백질의 공급원으로 라면의 스프를 공급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대관령 정상에 신재생 에너지원인 풍력발전기를 설치하여 목장과 함께 국민관광지가 되어 각국의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되돌아 보면 고인의 삶은 일편단심이었다고 회고된다. 고인은 수많은 장서와 독서로 경영어록을 많이 남겼다. 경영은퇴후 노환이 깊어지기 직전까지도 독서하고 집필해 왔다. 말년에는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교훈이 될만한 대목을 번역하여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어느날 전 명예회장께서는 착하게 살다가 미래를 향해 웃으며 죽음을 맞는 소사(笑死)의 법칙을 들려주기도 했다.
아마도 강원도 태생의 ‘암하노불’(岩下老佛)의 경지에서 아흔다섯 생애를 마감했을 것이다. 월간 경제풍월은 지난 2010년 8월, 이건(以建) 전중윤(全仲潤) 명예회장의 ‘정직과 신용’의 일편단심을 ‘한국의 기업가정신’이라고 표상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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