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박사, ‘나라를 위한 생애’ 회고

박정희(朴正熙)의 5.16정부는 경제개발 원조자금 조달이 막연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 원조를 요청했지만 쿠데타 정권이라는 이유로 냉대했고 일본과는 미수교국 관계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5.16정부는 제3의 대안으로 같은 분단국가인 서독원조를 생각해 냈다. 독일 경제학박사로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던 백영훈(白永勳) 박사가 박 대통령의 서독방문 시 통역관으로 독일차관 도입에 관한 비화를 담은 ‘조국 근대화의 언덕에서’를 출간했다.

고대 신입생으로 인민군, 학도병, 통역장교

백 박사는 1950년 고대 상과 신입생으로 입학한지 석달만에 6.25전쟁을 만났다. 당시 현상윤(玄相允) 총장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오라”고 말하여 안암동 캠퍼스로 갔더니 김일성대학에서 왔다는 젊은 학생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곧 인민군으로 소집되어 수송국민학교에 집합했다가 한 달간 지식훈련과 따발총 사격훈련을 거쳐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됐다. 포항을 거쳐 안강에 이르자 고대 영문과 4학년 선배가 “곧 유엔군이 참전할 테니 탈출하자”고 제의하여 밤중에 몰래 이탈하여 걸어서 김제까지 갔다. 선친은 한때 면장을 지낸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유치장에 갇혀있었다.

친척 집에 숨어 지내다가 고대 피난캠퍼스가 대구에 있다는 신문광고를 읽고 찾아가 1학년에 복교했다. 그러나 다시 학도병 소집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철원 백마고지로 출동하여 중공군과 접전했다. 어느 날 중대장이 “영어 할 줄 아는 자 있느냐”고 물어 손을 들었더니 통역장교 중위계급장을 달아주어 1년 2개월을 복무했다.

그러니까 백 박사의 군복무는 인민군 3개월, 학도병 3개월 통역장교 1년 2개월간 사지(死地)를 넘나들었다.

5.16후 이등병으로 상공장관 보좌관

백 박사는 고대 상대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유학생 시험공고를 보고 독일로 유학하여 뉘른베르크대학을 거쳐 에를랑겐대서 경제학박사를 취득 중대 교수로 근무하다 5.16을 겪었다.

5.16정부의 병역기피자 일제 단속시절 백 박사는 병역기피자로 분류되어 논산훈련소를 거쳐 3번째로 이등병이 됐다. 6.25전쟁 중 학도병이나 통역장교는 군번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병적관리상 기피자로 등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의 정상회담 중 통역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

어느 날 육군 소령이 찾아와 백영훈 이등병을 지프에 태워 남산 중앙정보부로 데려가 김종필 부장을 만나고 상공부장관을 맡고 있던 정래혁(丁來赫) 장군을 만나 보좌관 발령을 받았다.

당시 5.16정부는 서독과의 경제협력을 위해 신응균 예비역 중장을 서독대사로 임명하여 차관도입을 교섭하고 있었다. 신 대사가 독일어에 능통한 백영훈 박사를 찾아 보내주도록 박정희 의장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이 무렵 백 박사는 갓 결혼 후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상공부장관이 방한한 서독 경제장관 통역으로 호출하여 신혼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정래혁 장관이 서독 경제사절단을 파견할 때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상공부장관 특별 보좌관’이 되어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독을 방문하게 됐다.

서독 유학시절 은사와 동문에게 호소

▲ 서독 방문길에 베를린 장벽에서 동베를린을 바라보는 박정희 대통령과 오른쪽 옆 백영훈 박사.

당시 5.16정부는 서독차관에 경제개발 운명을 걸다시피 절박한 상황이었다. 서독 경제사절단은 신응균 대사와 함께 백방으로 뛰었지만 가난한 대한민국을 믿고 상업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의사가 없었다.

백 박사가 뉘른베르크대 은사인 포크트 교수를 찾아가 “도와주십시오”라고 읍소했다. 독일 경제상 에르하르트 박사도 뉘른베르크대 출신이라 백 박사의 간절한 청원에 귀를 기울여 줬다. 드디어 사상 처음으로 서독차관 1억5천만 마르크 도입방침이 결정됐다.

그러나 절반은 서독정부 차관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민간차관이라 제3국의 은행 지불보증이 조건이었다. 당시 한국경제의 대외 신용도로는 제3국 은행 지보를 받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때 다시 백 박사의 은사와 에르하르트 수상의 협조가 작용하여 광부와 간호사를 파독하면서 그들의 노임을 담보로 민간차관 지보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서독 방문이 확정됐지만 타고 갈 비행기가 없었다. 서독 측에 요청하여 루프트한자기를 빌려 공항에 도착하니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이 따뜻하게 영접했다. 박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찾아가 목이 메어 연설을 중단했던 장면이 연출됐다. 박 대통령이 아우토반 고속도로 편으로 돌아올 때 뤼브케 대통령이 “각하,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건설뿐입니다”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우토반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기간 중 통역관으로 가까이 수행했던 백 박사는 이날의 ‘아우토반 눈물’이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 자동차 등 산업화의 기반이었다고 증언했다.

백 박사는 이 시절 개발연대의 눈물과 감동을 되돌아보며 그사이 ‘잊혀진 영웅들’을 다시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새 여명을 열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전략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한국경제 번영을 가져온 ‘한강의 기적’에는 ‘라인강의 혼’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로까지 확산시켜 주고자 한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우연히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백 박사는 나라를 위한 자신의 회고를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지성인들의 가슴과 정신에 새겨주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6호(2014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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