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한국인을 찾아서 20]

단재 신채호(申采浩)

동북공정을 통곡한다

평생의 일념 민족정기 조국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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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의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건을 건설할지니라.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매진해야 하리라.”

불후의 명문, 조선혁명선언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이 불후의 명문(名文)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1923).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직된 지하 항일무장조직 의열단의 투쟁 선언이기도 한 <조선혁명선언>.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단재 신채호의 사상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의미심장한 글이다. 적극적이고 투쟁적이지 못한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신랄하고도 명쾌한 비판이자 조국의 나아갈 바를 당당하게 천명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조선의 선언문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880년 12월 8일 대전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신성우가 정6품 사간원 정언 벼슬을 그만둔 뒤 고향 청원으로 내려가지 않고 처가에 안착했으므로 신채호 집안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안동 권씨촌 외딴 묘막에 기거하면서 산간 밭을 개간해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었고, 춘궁기에는 콩죽이나 쑥죽 등으로 연명했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할아버지에게 엄하게 한문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불같았고, 품성이 뛰어나 글을 배울 때 남보다 앞섰다. 13세 때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무렵 <삼국지>나 <수호지>등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을 정도로 학문에 열정이 대단했으며, 자긍심 또한 매우 강해 자신이 옳다고 믿음에는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3세 되던 해에 형 재호마저 세상을 등지자 신채호는, 15세 때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를 맞는다. 이웃마을 관정리에 갑오농민군이 들이닥쳤고, 당시 이 마을 서당에 다니던 신채호는 봉건적 폭압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 일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모든 강제 권력이나 억압을 거부하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세에 이르러 평소에 닦은 뜻을 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의 날카롭고 웅혼한 필치는 이 무렵에 이미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계몽운동의 기치를 들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설립되고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는 등 새로운 계몽운동이 활발해져, 신채호 역시 청춘의 혈기를 불태우며 애국운동에 가담하였다. 1901년 22세 때 잠시 향리 근처에 설립된 문동학원(文童學院)의 강사가 되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성균관의 학우들과 함께 격렬한 항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매국노 규탄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선유(先儒)들의 썩어빠진 사필(史筆)을 바로잡고 민족혼을 불러일으켜 내 나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황성신문>에 논설위원으로 들어가 날카로운 붓으로 솟구치는 우국(憂國)의 뜻을 펼쳤다. 그때 <황성신문>에는 장지연, 남궁억, 박은식 등 이름이 쟁쟁한 애국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 10월 일제의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정치, 경제, 군사를 멋대로 좌우하는 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에 격분한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써서, 발행부수보다 훨씬 많은 일만 부를 사전검열도 받지 않고 이른 새벽 장안에 배포했다. 일제에 의해 마침내 장지연은 체포되고, <황성신문>은 정간 당한다.
이때에 탄압을 물리치고 의연 항일운동 선두에 선 것이 <대한매일신보>였다. 영국인 베델이 경영한 이 신문은 당시 영일(英日)동맹을 이용하여 취재와 보도 및 논설을 포함한 일체의 언론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06년, 신채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이 신문의 주필로 초빙 되었다. 그는 박은식을 비롯한 애국적인 언론인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논설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독사신론(讀史新論)>논설을 발표하여 한국 고대사 연구의 방향과 관점을 제시했다.

신민회 통해 항일구국운동

2014-01-13_161945.jpg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국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로 전국의 완몽(頑夢)을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로써 우국 청년들로부터 갈채를 받았고, 이들 열망에 좇아, 조선역사를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대동 4천년사>를 연재하였다. 이어 <을지문덕전>, <동국거걸최도통전>, <이순신전> 등을 연재하여 독자들의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는 민족주의를 ‘타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의’로 규정한 뒤, 민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민족주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당시 많은 한국 지식인들이 비판 없이 수용하던 일제의 침략 논리인 동양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신채호는 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1907년 12월에 항일구국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친일 정부가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는 것에 반대하여, 사실상의 항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애국 언론인들에 의해 여론이 조성 되었으며, 신채호는 이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당황한 당국은 이 운동을 좌절시키고자 국채보상금 횡령이란 오명으로 양기탁을 구속하고 더욱 압력을 가하여 양기탁과 베델을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이 바람에 거국적인 국채보상운동도 크게 서리를 맞아 좌절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단재는 심회가 평탄치 못하였다. 침울한 날을 보내는 그를 이승훈이 오산학교로 초청하였다. 오산학교는 학문을 가르친다기보다는 나라를 건지고 민족을 개조하기 위한 지도자를 길러내고자 하는 도장이었다. 단재는 이승훈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여 국사와 서양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자아의식의 회복을 역설하고 고구려의 패기에 찬 국토수호를 이야기하여 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명을 주었다. 그는 많은 사료들이 묻혀있는 발해의 고토(故土)를 두루 답사하여 동방을 제패했던 민족의 기상을 찾고 싶어 하였다.

아, 아, 고구려

1910년 4월, 신민회 일부 동지들은 조국에서 합법적 애국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국외로 나가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단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품에 안고 안창호, 김지간 등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청도로 향했다. 그가 해외로 망명한 것은 비록 나라는 망하더라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끝내 8월 29일, 조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동지들과 비분의 눈물을 흘리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안창호가 중심이 된 온건파와 이동휘가 이끄는 급진파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단재는 온건파 안창호 등과 함께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동포들에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은 흩어진 고구려의 혼을 찾아 사대주의자들의 곡필(曲筆)로 왜곡된 민족역사를 바로잡고 민족 주체의식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그는 동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유적 답사의 길에 올랐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유랑 길이었다.
그는 고조선 발상지의 흔적을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옛 전쟁터나 폐허로 변한 고성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지도와 자료를 대조해 보며 산하의 이름을 묻고 그곳의 풍습을 확인하여 고대사와 비교 검토했다. 그리고 깨진 금석 조각을 찾아내고 매몰되어 있던 성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집안현(輯安縣)에서 환도성(丸都城)의 흔적을 발견했다. 흩어진 능과 묘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고, 대규모 능으로 짐작되는 것만도 수백 기나 되었으며, 흩어져 있는 묘는 1만 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나무 잎 무늬가 있는 쇠자(金尺)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이 매입한 광개토왕비의 탁본 가격을 물어보고는 너무나 비싸 잠자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백 기의 능 가운데 남아 있는 팔층석탑사면방형의 광개토왕릉 및 오른쪽에 있는 제천단(祭天壇)을 사진 대신 붓으로 옮겨 그리고, 능의 높이와 넓이를 보폭으로 확인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선상고사>의 한절을 보면 그의 고적을 답사하는 심회와 돈이 없어 유적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쓸 수 없는 안타까움을 역력히 알 수 있다.
“…왕릉 상층에 올라가 석주(石柱)가 섰던 자취와 복와(覆瓦)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송백(松柏)을 보고, <후한서>에 ‘고구려는 … 금은재화를 모두 함께 묻었으며, 돌을 쌓아 분봉을 하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는 간단한 문구가 비로소 해석될 수 있었다.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 기를 파볼 것이요, 수천 원 혹 수만 원이면 능 한 개를 파볼 것이라. 그리하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살아 있는 사진을 보리라’하는 꿈만 꾸었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하루 동안, 외부에 대한 조악하고 거친 관찰뿐이었지만,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여하가 눈앞에 살아나 ‘그곳에서 한 번 본 집안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렸다.” 신채호는 조국의 옛 유적을 더듬으며 이처럼 비통한 생각을 되풀이 했다.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신규식의 초대로 상해에 간 신채호는 박은식, 김규식, 여운형 등을 만나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상해의 외국 조계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들은 한국인 청년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백여 명의 동포청년을 모아 박달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워, 재중 동포 자녀들에게 독립 의식을 북돋워주었다.
신채호는 여기에서 교재 <조선사>를 저술하고, 다음해에는 <꿈하늘>이라는 작품을 썼다. 신채호는 역사 연구를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길로 삼았다. 그는 과거 자체를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다. <독사신론>을 통해 당시 국사 교과서의 잘못과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을 호되게 비판한 적이 있던 신채호는, 민족해방운동을 북돋우기 위해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마침내 거국적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투사들은 상해로 모여들어 그곳 하비로(霞飛路)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게 되었다. 임정은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구성하여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노무국총관 안창호 등을 뽑았다. 단재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때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을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를 ‘외세에 매달려 자주성을 망치는 민족 반역적인 행위’로 격렬하게 규탄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추천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안에서는 추악한 파벌 투쟁이 일어났다. 신채호는 민족통일전선의 확대와 화합을 극력 주장했지만 극심해져만 가는 내부의 분열에 깊이 절망했다.

<조선상고사> 연구

41세가 된 신채호는 동지들의 권유에 따라, 독립운동 동지인 새 아내를 맞이하고 북경으로 향했다. 그는 북경의 주요 신문인 <중화일보>에 계속 논설을 발표하여 일제의 지배와 싸우는 조선민족의 모습을 강력한 필치로 호소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정인보가 쓴 <단재와 사학(史學)>의 한 구절에는 단재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단재가 불교에 깊음이 조선인거사림(朝鮮人居士林)에 거의 최고요, 유학을 항상 배척하기는 하되 거기에 대한 지식은 또한 일가(一家)의 견(見)을 가졌다. …남의 말은 좀처럼 그렇다고 하는 법이 없는 오골(傲骨)인데 오직 조선사학에 있어서는 아직 초학 소년이라도 그 欠處를 잠론(暫論)하면 문득 송연히 듣고 재삼 심사(沈思)하여 자족하는 태도가 없으니… 일반 조선사에 대한 성침(誠?? )이 특심하였음을 알 것이다.” 그는 42세에 비로소 사내아이를 얻고 생활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탓이었을까,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곧 출가하였다. 그러나 고대사 연구는 중단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연구 논문의 일부가 서울에 보내져서 <동아일보>에 연재되기도 했다.
그는 권력투쟁을 증오한 나머지, 권력에 무관심한 운동이 아니면 독립운동에서 통일전선은 결성될 수 없다고 여겼다. 북경에서 함께 활약한 사람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립이 단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무렵 북경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무정부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으며, 신채호도 이들과 함께 행동했다.
신채호의 본격적인 아나키즘 수용은 3·1운동 이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신채호는 3·1운동 과정에서 민중들의 폭발적인 힘이 드러나자 민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인식, 민중 해방을 표방하던 사회주의에 주목했다. 그는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 이념으로 수용하면서 국수주의를 극복해갔다. <국제연맹에 대한 감상>에서 모든 나라가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임을 강조하면서, 강력자에 대한 요구를 버릴 것을 역설했다. 1928년, 그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북경에서 개최한 ‘동방연맹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한국의 역사를 크게 왜곡하는 범죄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음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높은 문화전통을 소리 높여 민족독립운동으로 활약하는 신채호에게 일제가 깊은 적대감을 품지 않을 리 없었다. 일제는 늘 신채호의 행방을 주시하다가, 마침 그가 무정부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그를 체포하여 대련(大連)의 감옥에 투옥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죄목을 날조하며 공판을 서둘러, 1930년 5월 대련의 법정에서 10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여순의 감옥으로 이감했다.

영원한 자유인

신채호는 여순 감옥으로 옮겨진 직후인 1930년 6월, 그의 최초의 저작집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에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가 잇달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 저작물들은 제판이 완료되어 인쇄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 일제는 신채호를 대련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죄상을 날조하기 위해 잔악하기 그지없는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신채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여순 감옥에서 몸이 몹시 쇠약해졌지만 결코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고, 항상 저작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쇠약해져 5년 뒤에는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결국 그는 옥중에서 죽음을 예견하고 가까운 동지에게 ‘유서’와 다름없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가운데 이렇게 적고 있다. “꼭 써서 남겨야 할 원고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 죽는 것이 유감천만이네.” 이리하여 그는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삶을 마감하니, 향년 쉰일곱이었다.
단재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흔히 전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단재는 세수를 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낯을 든 채로 세수를 하였으므로 옷이 온통 젖었다 한다. 주위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그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선비가 세수를 한다고 고개를 숙인다니, 말이 되느냐?”
이렇게 곧은 심성은 그로 하여금 일생을 민족사의 올바른 기술에 바치게 했다. 단재 신채호의 평생 일념(一念)은 첫째 조국의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 민족사를 올바로 써서 시들지 않은 민족정기 세우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기다리고자 함이었다. 그는 떠도는 나그네의 몸으로 참고문헌을 구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정인홍공약전><육가라국고>를 써서, 이 나라 사학계에 불멸의 공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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